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8)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8화(8/215)
출발의 노래 (3)
* * *
에일라트를 향한 여정은 쉽지 않았다.
예루살렘 주변은 척박한 땅이었고 남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좌측에 사해, 우측에 산맥들을 낀 채로 남하했다.
예루살렘을 떠나고 벌써 일주일.
그사이 나와 불트는 꽤 친해져 있었다.
“자, 옳지. 옳지.”
불트가 사과를 덥석 물었다.
난 녀석의 부드러운 갈기를 쓰다듬었다.
말을 탄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이래서 그렇게 많은 무인武人들이 자기 말을 사랑했던 건가.
불트도 기분 좋다는 듯 머리를 연신 흔들었다.
그때 누군가 날 부르는 게 들렸다.
“공자님! 보두앵 공자님!”
고개를 돌리자 에이그가 보였다.
손에 들린 그릇.
딱 봐도 내 아침 식사 같은데.
에이그가 숨을 헐떡이며 그릇을 건넸다.
“오늘도 여기 계셨군요. 음식을 가져왔으니 좀 드시지요.”
마른 빵에 비스킷.
그리고 소금에 절인 고기라.
일주일째 똑같은 식단인가….
처음 며칠은 몰라도 이제 슬슬 질리는데.
“일단 그쪽에 내려놔 줘. 좀 있다 먹을게.”
“가니에르 경께서 제게 직접 명하시길….”
에이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공자님께서 이 그릇을 비우시기 전까지 절대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넌 가니에르 경이 아니라 내 종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입맛이 없는….”
난 빵이랑 고기를 조금 집어서 입에 쑤셔 넣었다.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먹을게.”
그동안 친해진 건 불트뿐만이 아니었다.
에이그도 처음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게 날 대했다.
아직도 너무 깍듯하긴 한데….
뭐, 차차 나아지겠지.
에이그가 가져온 건초더미를 불트에게 내밀었다.
“자, 불트 너도 먹어야지.”
근데 건초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물에 불린 건가?
“왜 건초를 물에 적신 거야?”
“이 깐깐한 녀석이 건초를 그냥 주면 안 먹더군요.”
에이그가 불트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편식하는 아이를 노려보는 부모의 눈빛.
“자, 이번엔 아예 물에 불려서 갖고 왔어. 이제 됐지?”
불트가 싫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이게 진짜…!”
그런 둘의 모습에 난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저 둘이 친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군.
난 고개를 돌렸다.
이젠 익숙해진 모래 언덕과 낙타들의 풍경.
마차들의 줄지은 행렬까지.
중간중간 마을과 성채들에 들르면서 마차의 수는 처음보다 늘어나 있었다.
“확실히 성채는 많아.”
십자군이 인력은 열세일지 몰라도 성채는 이슬람 세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부족한 병력 수를 성채로 보완한다는 수비 전략.
‘그 유명한 크락 데 슈발리도 한번 구경해보고 싶은데.’
그렇게 놀러 다닐 여유는 없겠지.
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해야 할 건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에일라트를 재건해 왕실, 그리고 내 자금을 확보하는 것.
일단 돈이 있어야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졌다.
두 번째는 르노 영주가 휴전 협약 깨는 걸 막기.
이것도 내가 에일라트에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다음에는 동로마 문제도 해결해야 할 텐데….’
그건 좀 더 찬찬히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
입에 음식을 쑤셔 넣던 그때 가니에르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의 망토가 모래바람에 휘날렸다.
“그래도 오늘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접시를 비울 때까지 에이그가 안 돌아가겠다고 해서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에이그는 여전히 불트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가니에르도 나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께선 직접 경험하신 적 없으시겠지만….”
가니에르가 말에서 내렸다.
“여정에서 배를 채우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전투라도 벌어지면 여유롭게 식사할 기회는 없으니까요.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물은 꾸준히 마시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사막에서 물의 중요성은 말 안 해도 안다고.
하틴 전투.
십자군 최악의 패배도 사막을 무작정 행군하다 벌어진 참사였으니까.
다행히 이번 여정은 베네치아인들이 철저히 준비한 덕분에 큰 문제 없었다.
“앞으로 남은 길은 어떤가요?”
“이제 삼사일 정도 있으면 에일라트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근처 기사단 성채들에 연락해 식량과 물자들도 미리 옮겨놨고요.”
가니에르가 뒤를 손짓했다.
“가는 길목에 마을들도 몇 개 있으니 보급이 떨어질 일도 없겠죠. 사실 그것 말고 공자님께 보고드릴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전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희를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근처를 지나는 상단인 줄 알았는데….”
그가 뒤쪽을 가리켰다.
난 그를 따라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주변이 모래지대라 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걸을 때마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발에 느껴졌다.
저 멀리 빽빽한 점들이 보였다.
적어도 수백은 족히 넘을 것 같은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더군요. 정찰을 몇 명 보내봤는데 대부분 비무장한 시민들, 그것도 유대인들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직접 확인해봐야겠군요.”
내가 말했다.
비무장한 유대인들이라.
왜 우릴 쫓아오는지부터 알아내야겠지.
“다른 기사들과 가셔서 우두머리를 데려오시죠. 그때까지 행군은 잠시 멈추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가니에르가 동료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순식간에 대열이 이루어졌다.
기사단 명성에 어울리는 일사불란한 기동.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도대체 몇 년을 훈련해야 저런 팀워크가 가능한 걸까?
그들이 다시 돌아온 건 고작 몇 분 후였다.
출발할 때보다 한 명이 늘어 있었다.
가니에르의 뒤에 앉은 한 노인.
흰 수염에 긴 코트가 보였다.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길잃은 순례자들인가?
가니에르의 부축을 받으며 노인이 내 앞에서 내렸다.
그가 반쯤 절하듯 힘겹게 몸을 숙였다.
“이 미천한 자가 예루살렘 왕국의 지고하고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이제는 ‘지고’하고 ‘고귀’한이라.
고귀, 자애, 지고.
이 정도면 다음엔 뭐가 나올지 궁금한데.
노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전 아흐람의 아들인 에마누엘이라고 합니다. 고귀하신 분의 길 앞에 부디 평안이 깃들길 빕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흐람의 아들 에마누엘이여. 그대의 길 앞에도 평안이 있길 빕니다.”
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유대인들이 하는 인사법이 뭐였더라.
안고 키스하는 거였나.
안는 건 상관없지만 입맞춤은 좀 그런데.
다행히 그는 가볍게 포옹만 했다.
“며칠 전부터 저희 일행을 따라오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산맥에서 길을 잃으신 겁니까?”
“이곳에서 길을 잃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공자님께서 베네치아 상인들을 이끌고 에일라트를 재건하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만. 그게 저희를 따라오시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원래 에일라트는 저희 유대 부족들이 살던 도시였습니다. 십 년 전 살라딘이 이집트군을 끌고 와 항구를 약탈하고 불태우기 전까지는 그랬지요.”
이집트군이 약탈이라.
에일라트를 황폐화한 장본인이 살라딘이었나.
“그때 저희는 식솔만 데리고 겨우 도시를 빠져나왔습죠. 이번에 그곳을 재건하신다는 소식에 가산을 정리해 허겁지겁 공자님을 따라온 겁니다.”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대충 알겠습니다.”
난 건너편의 무리를 힐끔 바라봤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얼굴이 조금씩 보였다.
장정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여인과 노인, 아이들이었다.
도시를 재건한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한 건가.
“그렇다면 따라오지 마시고 아예 저희와 함께 이동하는 게….”
입을 열려던 그때,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목소리.
“이런 거지들 같으니라고!”
마르코였다.
그가 툭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달려왔다.
“공자님, 절대 안 됩니다! 당장 이놈들에게 거리를 두고 떨어지라고 하시죠.”
마르코가 노인을 향해 삿대질했다.
“이놈들은 저희 식량을 축내려는 겁니다. 곧 있으면 아이들이 굶주렸으니 먹을 걸 좀만 내어달라고 애걸복걸하겠죠.”
“저희에게 필요한 식량은 저희가 스스로 챙겨왔습니다.”
노인이 화난 어조로 말했다.
“거룩한 성도와 제 부족의 명예에 맹세코, 여러분의 물건을 빼앗을 생각도 결코 없습니다. 애초에 저희에겐 그럴 힘도 없고요.”
그가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공자님, 저희가 바라는 건 그저 사라센인들의 약탈을 피하는 것뿐입니다.”
“이곳 근처에 바다위 부족들이 많긴 하죠.”
내가 말했다.
베두인, 바다위 부족들.
애초에 이렇게 많은 병력을 끌고 온 것도 그놈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니까.
제대로 된 호위 병력 없이 이곳을 지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그걸 아는 이들도 거리를 두고 우릴 따라온 거겠지.
이들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에일라트의 재건.
그걸 위해서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긴 한데.
여기선 육감을 한 번 믿어봐야겠군.
난 노인을 빤히 바라봤다.
딱히 불길함이나 불안감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적대감, 적의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고민 끝에 난 결정을 내렸다.
“충분한 식량과 보급품을 가지고 계신다면 저희와 합류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공자님…!”
“도시를 재건하려면 결국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베네치아인들만으로 항구를 운영하기는 힘들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내가 마르코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용할 수 있는 인력이 있다면 재건 작업도 더 빨리 끝나지 않겠습니까? 무너진 성벽을 다시 복구할 사람도 필요하고요.”
“….”
마르코가 시뻘게진 얼굴로 침묵했다.
내 말이 맞다는 건 자기도 잘 알겠지.
“감사합니다, 지고하고 고귀하신 분이시여. 짐을 나르는 데 인력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희 장정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감사합니다, 아흐람의 아들 에마누엘이여. 그럼 가서 나머지 일행들에게 알리시지요. 정리가 끝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일행 쪽으로 돌아갔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린 여정을 재개했다.
사막과 초원, 언덕과 산맥이 다시 나타났다.
난 불트 위에서 기지개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에일라트까지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런 내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 늦은 오후, 우린 또다시 정체불명의 무리와 마주했다.
갈색 말과 낙타를 탄 한 무리의 인영들.
그들을 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마치 수풀 속에서 뱀을 발견하고 배가 뒤틀리는 기분.
“아무래도 사라센 상인들인 것 같습니다만. 제가 한 번 확인을….”
“가니에르 경, 부대에 전투 준비령을 내리세요.”
내가 인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확인해볼 필요 없습니다. 적이니까요.”
* * *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며 땅을 붉게 불태웠다.
언덕 위 사내들은 그들의 먹잇감을 내려다봤다.
낙타, 말, 물자, 그리고 식량.
이렇게 탐스러운 먹잇감이 나타난 건 몇 년 만.
그것도 무슬림이 아닌 프랑크 이교도들.
“우리를 경계하고 있군. 안 그런가?”
“해가 뒤쪽에서 지고 있으니 아직 저희 정체를 눈치채진 못했을 겁니다.”
“다른 부족들은?”
“이미 전서구를 보내놨습니다. 곧 있으면 전사들을 이끌고 합류할 겁니다. 그전에 먼저 치시지요”
“좋아, 놈들은 먼 길을 내달려왔어. 야생마를 잡을 때처럼 최대한 지치게 해야 한다.”
“부하들에게 화살을 준비하라고 일러놓겠습니다.”
“예루살렘의 깃발이 확실했나?”
“예, 분명 왕실을 나타내는 문장이었습니다.”
“왕족을 포로로 잡을 수 있다면 그만큼 몸값을 받아낼 수 있겠지. 설령 프랑크 놈들이 안 낸다 해도 살라딘께서 상을 내려주실 거다.”
선두에 선 사내가 검을 치켜들었다.
초승달처럼 휜 검이 주황빛으로 번뜩였다.
“모두 검을 들어라! 알라께서 우릴 승리로 인도하신다!”
그가 소리쳤다.
“알라께 맹세코, 저 이교도 놈들을 물리치고 빼앗은 재물은 너희들 모두에게 공평히 나누어주겠다!”
“알라 후 아크바르! 알라 후 아크바르!”
“하나님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이시다!”
전사들의 외침이 언덕을 타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