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82)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82화(82/215)
세 로마 (2)
* * *
“황제가 롬바르디아를 칠 거라니. 백작에게서 그런 낌새를 눈치챈 게냐?”
“예, 확실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저렇게 강렬한 감정을 놓치긴 힘들지.
우릴 깔보는 듯한 자신감.
감정들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또다시 원정 계획을 세운 겁니다.”
난 이곳에 오기 전 마르코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보두앵 4세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지금 이 난리라니. 우선 로마. 그리고 혼인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까지 집어삼키면….”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 판도가 이루어지면 황제의 권위는 하늘 높이 올라간다.
교황권도 무릎 꿇린 황권이라.
상상만 해도 어질어질하네.
물론 시칠리아의 귀족들이 순순히 왕위를 내어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커. 황제는 이미 롬바르디아에서 패배를 겪은 적 있지.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간….”
보두앵 4세가 말했다.
“제국 전체가 흔들릴 게다.”
“황제 본인도 그걸 모르진 않을 겁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선다는 건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화해한다면….
자연히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막으려는 거겠지.
내가 동로마를 구한 스노우볼이 여기까지 굴러온 셈.
자기 말을 잘 듣는 대립 교황을 내세우고 로마를 침공.
또 난장판이 벌어지겠군.
프리드리히 황제의 우선순위는 황권 강화.
예루살렘 수호는 어디까지나 뒷전이었다.
“사절단의 말은 가만히 있으란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지. 네 말대로라면 이탈리아는 전장이 될 거다.”
“아마 그렇겠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시기에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싸움이라.
정말 완벽하군 완벽해.
보두앵 4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선 널 이곳에 붙잡아 놓고 싶다만…. 그런다고 네가 가만히 있어줄 것 같진 않구나.”
“제가 가서 이 분란을 막겠습니다. 아직 방법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만에 하나 교황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3차 십자군은 물 건너가는 셈.
그런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겠지.
“어떻게든 생각해내야겠죠. 일단 제가 가기는 해야 합니다.”
난 보두앵 4세를 바라봤다.
희뿌연 그의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폐하이시라면 제 뜻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로마와 유럽의 중요성.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보두앵 4세가 모를 리 없지.
“너와 동행할 기사 수를 배로 늘려야겠다. 용병들도 최대한 고용해서 데려가거라.”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루아크 수호단장과도 의논을 해봐야겠구나. 성묘수호단도 널 따른다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겠지.”
“특별 수당이 꽤 많이 들 겁니다.”
내가 웃으며 답했다.
북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에 이어 다시 이탈리아까지 가는 바이킹들이라.
12세기 판 세계 일주 같네.
“수송할 배도 더 필요하겠군요. 베네치아랑 제노바에 따로 연락해두겠습니다. 그것 말고도 준비해야 할 게….”
보두앵 4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런 자잘한 것들까지 네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기사들을 차출하고 돈을 마련하는 건 내가 하면 그만이야. 성전기사단 뒷정리도 마찬가지다. 지금 네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따로 있어.”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넌 혼인식에 집중하거라. 아무리 바쁘다 해도 신부와 며칠은 함께 보내야지. 첫걸음을 잘못 떼면 모든 게 어그러지는 법이다. 그게 전투든 결혼 생활이든.”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보다 더 빨리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로마 제국 황녀랑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요.
보두앵 4세가 의자에 다시 털썩 앉았다.
“우선 식을 좀 더 앞당겨야 겠다.”
* * *
며칠 후
예루살렘
성묘교회
교회는 고요했다.
침묵 속에서 난 교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벽 곳곳에 놓인 수십 수백의 양초가 환한 빛을 뿜어냈다.
기사 서임식 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분위기는 그때랑 180도 다르네.’
꽃잎과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천 조각들.
성직자들이 부르는 라틴 성가가 울려 퍼졌다.
양옆엔 귀족, 기사와 사절단.
중앙엔 높다란 제단이 있었다.
제단 앞에는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만이 서 있었다.
마치 한 폭의 명화를 보는 듯한 장면.
여러모로 장엄하긴 하네.
이 정도면 국왕 결혼식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내가 들어서자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익숙한 목소리.
포교관이었다.
“예루살렘 왕실의 고귀한 왕족이자 에일라트의 재건자, 신성한 앨릭서의 제조자, 로마 제국의 친우이자 마기스트로스, 키프로스의 정복자이자….”
이젠 저 리스트도 익숙하군.
숨을 들이마신 포교관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마와 홈스의 해방자, 십자가의 기사, 기독교의 수호자, 보두앵 공자이십니다!”
난 홀로 중앙을 걸었다.
이젠 망토를 밟지 않고 걷는 것도 익숙했다.
양옆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두앵 4세와 위그.
시빌라와 루아크, 에이그까지.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뿐이었다.
난 제단 앞줄에 홀로 선 보두앵 4세를 바라봤다.
그는 서 있기 힘든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얀 정식 예복.
내게 기사 서임을 해줄 때와 같은 복장이군.
그에게서 낯선 감정이 느껴졌다.
질투심…은 아니군.
걱정이었다.
날 향한 걱정.
21세기에도 저런 삼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얼굴 사이로 낯선 얼굴들도 보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대귀족들.
그들 모두 예루살렘 왕실과 대비되는 화려한 비단옷 차림이었다.
그들 바로 옆에는 신성로마제국 사절단.
동로마랑 신성로마제국이라.
둘 중에 누가 진짜 로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고 보니 동로마 황제가 (자칭)신성로마의 존재를 인정하긴 했었나?
어찌 되든 좋게 끝나진 않겠지.
교회 정중앙을 지난 난 제단 앞에 멈춰섰다.
이제 다음 차례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마 제국의 테오도라 황녀이십니다!”
테오도라가 내가 지내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왔다.
두 귀족 여인이 그녀를 뒤따랐다.
자줏빛 옷과 보석.
내가 여태까지 봤던 그 어떤 옷보다 화려했다.
얼마나 많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었을까.
그녀가 내 옆에 멈춰섰다.
긴장이 느껴졌다.
아니.
내가 긴장한 건가?
테오도라가 날 바라보며 속삭였다.
“괜찮으신가요? 얼굴이 살짝 하얘지신 것 같은데요.”
“….”
역시 티 나는 건가.
“결혼은 처음이라서요.”
“…다행이네요.”
그녀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결혼은 처음이거든요.”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성호를 그었다.
이젠 우리가 무릎 꿇을 차례.
테오도라와 난 함께 무릎 꿇고 총대주교를 바라봤다.
“이 신성한 성경에 맹세코, 두 사람은….”
정작 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혼인 맹세와 세 번의 짧은 입맞춤.
그걸로 혼인식은 끝났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혼인식을 올리자마자 곧바로 유럽으로 떠나신다니.”
테오도라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제가 싫어서 떠나시는 줄 알겠군요.”
“절대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신성로마 사절단이 있는 곳.
“신성로마제국에서 왜 사절단을 보냈는지도요. 그래도 떠나시기 전에 이렇게 식을 올릴 수 있어 다행이네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녀가 덧붙였다.
“기회가 있을 때 즐겨야 하는 법이죠. 촛불은 언젠가 꺼지기 마련이니까요.”
“….”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말인데.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조용한 사람들을 가장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악마로 변신하는 법이니.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제단 아래로 내려왔다.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난 창문 밖을 바라봤다.
교회 밖 도시에서도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와아아!”
예루살렘 전역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나팔과 종소리.
사람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거리를 뒤흔들었다.
이들이 단순히 혼인식을 축하하는 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 왕실에서 베푸는 선물이오!”
“가장들은 모두 나와 빵과 돈을 받아가시오!”
세금을 걷던 징세업자들이 이젠 돈을 나눠주며 다녔다.
음식과 비단옷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성들.
그런 그들의 돈주머니를 노리는 좀도둑들.
무슬림 시민들도 길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기거나 물건을 팔았다.
“콘스탄티노플에 축복을! 미카엘 대천사께 영광과 영원한….”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 라틴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이집트 콥트 교회, 유대교, 이슬람, 마니교 등등.
사제와 신부, 학자들도 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겼다.
거기에 사절단들까지 선물을 뿌리며 열기에 동참했다.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거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까지.
하지만 사절단 모두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직 한 사절단.
다마스쿠스에서 온 사절단은 환영받지 못했다.
“내가 지금 그대들의 목을 치지 않는 건 오늘이 내 사랑하는 조카의 혼인식이기 때문이오.”
보두앵 4세가 몸을 왕좌 앞으로 내밀었다.
“그대들 사절단이 내게 뻔뻔히 거짓말을 늘어놓던 게 불과 몇 주 전의 일이지. 근데 이렇게 다시 찾아오다니.”
그가 물었다.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요?”
“알라께 맹세코 결코 보두앵 국왕 폐하를 모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절단 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깊은 주름과 하얗게 물든 머리칼.
우사마 이븐 문끼드.
늙은 그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용감한 전사들의 사령관, 살라흐 앗 딘(살라딘) 술탄께선 보두앵 공자의 혼인식을 축하하시기 위해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또한 이전에 있었던 사소한 오해 역시….”
그가 덧붙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바로잡기를 희망하십니다.”
“사소한 오해라. 온갖 거짓을 늘어놓으며 날 속이려 했던 게 사소한 오해는 아닌 것 같소만.”
보두앵 4세가 코웃음 쳤다.
“우사마. 그대와 그대의 부친은 예루살렘 왕국의 선대 국왕들을 위해 일한 적 있었지. 내가 그대의 목을 치지 않은 것도 그래서요.”
그가 턱을 괴며 물었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살라딘이 알 아딜의 몸값은 전부 모은 거요?”
“아직입니다. 하지만 온 이슬람이 나서서 돈을 마련하고 있으니….”
우사마가 답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직 몸값도 다 모으지 못했는데 이런 선물이라니.”
보두앵 4세가 사절단이 가져온 짐꾸러미를 가리켰다.
금과 은으로 된 식기들.
거기에 동방에서 들여온 최고급 비단들도 있었다.
“만약 이런 선물 몇 개로 알 아딜의 몸값을 줄이려는 수작이라면 포기하라고 전하시오.”
“술탄께서는 지정된 몸값을 한 푼도 빠짐없이 내실 생각이십니다.”
우사마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알 아딜의 몸값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게 책정되었다 하시더군요. 술탄께선 1만 디나르를 추가로 내실 계획이십니다.”
“몸값을 더 내겠다니.”
보두앵 4세가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해적에게 몸값을 더 받으라고 떵떵거리던 카이사르에 빙의라도 했나 보구려.”
“….”
우사마가 입을 열었다.
“지하드의 영웅을 위해서라면 무슬림 신자들은 얼마든지 돈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알라와 이슬람의 의지입니다.”
“그럼 몸값 대신 이집트를 넘기는 건 어떻겠소?”
보두앵 4세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디 축제를 즐기시오, 우사마. 그대의 마지막 축제가 될지도 모르니. 폭풍이 다가오고 있소. 아주 거대한 폭풍이.”
“전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폐하. 이번 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든….”
우사마가 고개를 들며 답했다.
그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 아름다운 도시와 사람들이 불탈 것 같아 두렵습니다.”
* * *
성묘교회 전경 – Mayer Luigi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