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88)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88화(88/215)
로마의 모든 것은 가격이 있다 (3)
* * *
“교황 성하께서 베로나로 오지 말라고 하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에이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성직자들이 저희를 속이려는 게 아니었다면….”
“그런 건 아니었어.”
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
교황이 보낸 사절단이 맞았다.
그들이 전할 말도 사실.
다른 건 몰라도 내 육감을 속일 순 없지.
교황은 내가 베로나로 오는 걸 꺼리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알프스산맥을 건너려면 최소 몇 주는 남았을 텐데.’
오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안 알려주다니.
그 이유가 뭐지?
난 천막 밖을 바라봤다.
위그가 성직자들을 천막 곳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사실 안내라기보단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 시간 끄는 거에 가깝지만.
“거기다 날 두려워하는 눈치였지. 그것도 아주 많이.”
“공자님을 두려워하다니요. 애초에 교황 성하를 도우러 오신 건데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고.”
팩트는 팩트였다.
감정적으로 생각해봤자 아무 결론도 안 나오겠지.
차분히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생각, 생각을 해보자.
중세인들이 대충 어떤 마인드셋인지는 알고 있잖아.
“교황 성하는 날 이곳 이탈리아로 부르셨어. 그에 대한 보상으로 기사단 문제까지 도와주셨지.”
근데 도착하자마자 뜬금없이 오지 말라고 했지.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압박을 했을 수도 있겠군.
지금 교황을 압박할만한 존재라.
“롬바르디아의 도시들.”
“예?”
난 탁자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탈리아 북부의 친교황 도시들.
“이 도시들이 교황 성하를 압박한 거야. 우리가 이곳 항구에 남아있길 바란 거지.”
내가 말했다.
이 도시들은 교황 선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교황을 압박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건 이자들밖에 없겠지.
“하지만 공자님은 이들과 손잡고 프리드리히 황제와 싸우러 온 것 아니십니까? 근데 왜….”
“아마 우리의 의도를 의심하는 거겠지.”
난 라스트 크루세이더즈를 할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롬바르디아 동맹.
말은 거창했지만 이들은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이들은 명목상 신성로마제국의 신하였지만 자치권을 놓고 프리드리히 황제에게 대항하며 싸웠다.
베로나, 비첸차, 베네치아에 베르첼리, 제노바, 밀라노, 크레모나, 페라라 등등.
사실상 북이탈리아 도시들 대부분.
하루는 교황편이었다 하루는 황제편으로 바뀌는 도시들도 적지 않았지.
‘신성로마에서 아예 독립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보단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에 가까웠다.
마치 부모님 집에 얹혀살지만 간섭받는 건 싫어하는 백수 자식 같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하나의 국가가 되기엔 도시 간의 반목이 너무 뿌리 깊기도 하고.
이 이탈리아 도시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건 프리드리히 황제 일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지금 원정이 여섯 번째인가.
“우리가 끌고 온 병력이면 어떤 이탈리아 도시든 쉽게 점령할 수 있어. 어떤 단일 도시도 이 정도 병력을 지니고 있진 않으니까.”
“아니면 공자님께서 프리드리히 황제와 손잡았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군요.”
에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쪽에서 먼저 그런 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겠죠. 공자님과 롬바르디아 코무네(도시)들 사이를 이간질하려고요.”
“많이 예리해졌네, 에이그.”
“훌륭한 스승한테 배웠으니까요.”
에이그가 웃으며 답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은 아마 둘 중 하나겠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내가 신성로마제국 사절단과 친하게 지낸 게 알려졌을 수도 있다.
에이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기약 없이 이곳 항구에서 기다릴 순 없을 텐데요.”
“여기에서 놀고 있을 시간은 없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하루하루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곧장 군대를 끌고 베로나로 올라가면….”
“교황 성하와 롬바르디아 동맹을 위협하는 걸로 보일 수 있겠지. 제국이랑 붙기도 전에 우리끼리 싸울 수도 있고.”
“프리드리히 황제만 좋아할 상황이겠군요.”
“….”
난 탁자 위를 두드렸다.
사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우리의 진심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
그러려면 베로나로 직접 가긴 해야겠지.
“군대를 끌고 가면 안 돼. 그랬다간 다른 도시들의 의심만 커질 거야. 그 대신 소수의 호위만 데리고 가야겠어.”
“공자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럼 내가 직접 가야지.”
아무리 의심이 많아도 혼자 오는 걸 막진 않겠지.
이보다 진심을 확실히 보여줄 방법은 없었다.
“교황 성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다른 도시들도 계속 반대하진 못할 거야.”
“그럼 지금 가서 호위대를 준비하겠습니다.”
“잠깐.”
내가 손을 들었다.
단순히 나 혼자 베로나로 가는 것.
이걸로 충분할까?
뭔가 임팩트가 부족한 느낌인데.
롬바르디아 도시들에게 보여줄 확실한 뭔가가 필요했다.
놈들이 거부할 수 없는 결정적인 한 방.
지금 내 손에 있는 건….
“그것도 같이 갖고 가야겠어.”
“그거라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비장의 한 수가 있잖아.”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에이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시 후 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씀은 십자가를….”
“그래, 성십자가를 가지고 가는 거야.”
성유물聖遺物.
이것보다 더 강력한 건 없지.
* * *
베로나
“그럼 예루살렘에서 온 꼬맹이한테 모든 걸 맡기자는 거요? 고작 가장 많은 군대를 끌고 왔다고? 난 결코 동의할 생각이 없소.”
“고작이라니. 지금 당장 병사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요. 황제는 적어도 수만이 넘는 군대를 끌고 올 텐데 우리만으로 승산이 있겠소?”
“보두앵 공자가 정말 우릴 도우려는 거라면 나도 환영이오. 하지만 그가 황제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을 무시할 순 없소.”
아타니아 교회 2층.
수십의 사내들이 열띤 어조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이 일어서고 앉을 때마다 나무로 된 바닥이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포도주잔을 날랐다.
이탈리아 각 도시의 포데스타(최고 행정관)과 명망 깊은 귀족들.
이들은 각자의 도시를 대표해 이곳 회의장에 모였다.
몇 년 전 레냐노에서 프리드리히 황제를 물리쳤던 전우들.
란드리아노의 귀도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페라라 도시의 포데스타 자격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귀도가 일어서며 말했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오. 보두앵 공자가 황제와 손을 잡았다면 왜 이 먼 이탈리아까지 군대를 끌고 왔겠소?”
“예루살렘의 국왕이 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네. 보두앵 공자가 무슨 속셈인지는 누가 알겠나?”
“이렇게 많은 군대를 끌고 온 것 자체가 수상하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예루살렘 왕국이 지금 이탈리아까지 손댈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소. 그건 갓난아기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소만.”
귀도가 말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족과 관료들을 바라봤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
피해망상에 빠진 겁쟁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6년 전 황제의 군대를 물리쳤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들은 여전히 서로를 의심했다.
“예루살렘은 교황 성하의 도움과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군대를 끌고 온 것도 이해가 되지 않소?”
“애초에 예루살렘의 군대는 필요 없소이다! 우린 전에도 그들의 도움 없이 황제를 물리쳤소!”
“황제는 저번보다 더 많은 병력을 끌고 올 거요. 아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겠지. 우연을 바라고 싸울 순 없소.”
크레모나의 포데스타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좌중을 바라봤다.
“어차피 곧 있으면 보두앵 공자의 속내가 뭔지 알게 될 거요. 항구에 남는다면 우리 편. 베로나로 쳐들어온다면 우리의 적이겠지.”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렇게 지금 우리끼리 떠들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오. 다른 사항들이나 논의해봅시다.”
“우릴 지원하기 위해 온 군대를 항구에 묶어놓다니. 그것 자체가 보두앵 공자와 예루살렘을 향한 모욕이오.”
귀도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크레모나의 포데스타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런 모욕을 받고 보두앵 공자가 생각을 바꾼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요?!”
“….”
회의장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 서로의 시선만 살필 뿐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 그대들에게 솔직하게 묻겠소.”
귀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좌중을 바라봤다.
“이탈리아 시민들 사이에서 보두앵 공자의 인기가 높은 건 다들 알 거요. 시골 농부부터 궁정의 음유시인들까지 다들 보두앵 공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가 덧붙였다.
“그런 보두앵이 직접 이탈리아로 왔으니. 그가 그대들 도시 중 하나를 차지하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거 아니오? 아니면 교황 성하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귀도! 그대가 아무리 레냐노 전투의 영웅이라 해도 선이 있는 거요.”
“우리 이탈리아의 가문들은 신성로마제국과 황제가 생기기도 전부터 이곳 이탈리아를 통치해왔소! 그까짓 꼬맹이 하나 두려워 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사내들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귀도는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보두앵 공자를 우리의 형제이자 전우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그를 베로나로 초대합시다!”
“….”
다시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귀도 그대는 아직 젊소. 나이가 어릴수록 모든 일을 간단히 보는 경향이 있지.”
크레모나의 포데스타가 입을 열었다.
그가 손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만약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진다면 프리드리히 황제는 모든 롬바르디아 도시를 파괴하려 들 거요. 그런 만큼 최대한 신중히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소?”
“크레모나 그대들이 우리 밀라노를 파괴했던 것처럼 말이오?! 그때도 신중히 판단을 내린 거요?”
밀라노에서 온 귀족이 코웃음 쳤다.
“몇십 년 전 그대들은 황제 편을 들어 아름답고 평화롭던 밀라노 도시를 파괴했지. 죄 없는 아이와 여인들까지 성벽 밖으로 내쫓고 성벽과 집, 대성당을 무너뜨리지 않았소?!”
“그러는 밀라노 자네들은 로디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우지 않았소이까? 거기에 주변 과수원들까지 싸그리 불태웠지.”
크레모나의 포데스타도 들으라는 듯 코웃음 쳤다.
“밀라노 그대들은 누가 들으면 성인聖人인 줄 알겠군. 부끄러운 줄 아시오!”
“로디는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다른 도시들을 약탈하던 도적 떼였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보복이었단 말이오!”
“정당한 보복이라니! 당장 그 말을 취소하지 않으면…!”
이번엔 로디 사람이 일어서며 외쳤다.
삿대질이 끝없이 이어졌다.
밀라노인이 크레모나인에게.
제노바는 베네치아에게.
베르첼리는 페라라에게.
귀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답이 나오긴 글렀군.”
그때 병사 한 명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병사를 향했다.
“무슨 일이냐?”
병사가 적절한 말을 찾으려는 듯 입을 뻐끔뻐끔했다.
“보두앵 공자가….”
“보두앵 공자가? 그자가 뭘 했다는 건가?”
“보두앵 공자가 지금 이곳 베로나로 오고 있다 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귀족들 모두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귀도가 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시 말해보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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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도레 – 성십자가(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