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King of Crusaders RAW novel - Chapter (89)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89화(89/215)
로마의 모든 것은 가격이 있다 (4)
* * *
베로나
돌로 이루어진 성벽이 보였다.
성벽 앞을 오고 가는 마차와 양 떼들.
도시는 예루살렘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다.
콘스탄티노플이랑 비교하면….
백화점 옆의 구멍가게 같은 느낌이군.
이곳에 교황이 머무르고 있다는 건가.
서방 라틴교회의 수장.
천상의 열쇠를 거머쥔 성 베드로의 후계자.
주변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위그, 에이그와 소수의 호위 기사들.
우리가 성벽 가까이 다가가자 성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무장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슬 갑옷을 입은 기사들도 있군.
아직 스위스 근위대 복장이 생기기 전이었나.
그것도 꽤 멋있었는데.
저쪽도 잔뜩 긴장한 게 느껴졌다.
양치기와 상인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서둘러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성 밖으로 나온 무리는 우릴 가로막듯 앞에 섰다.
“우선 정찰병을 보내도록 하죠.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위그가 말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쪽이 겁먹었다고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이제 ‘큰 한 방’이 나설 차례였다.
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간단한 제스쳐.
“성십자가를 들어라!”
마차에 있던 기사와 종자들이 줄을 당겼다.
줄이 팽팽해지며 성십자가가 위로 세워졌다.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성십자가(True Cross).
‘저게 진짜일까?’
난 성십자가를 바라봤다.
맨 처음 저걸 찾은 사람이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였던 헬레나였나.
그 이후 실종과 회수를 반복한 성십자가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되찾았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도 성십자가 조각이 있었단 말이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칭’ 성십자가 조각을 다 모으면 나무 몇 개는 족히 될 터.
뭐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지.
중요한 건 이 성십자가가 성도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권위를 갖기엔 충분했다.
‘게임에서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모든 군대에 사기 버프 효과가 있었지.’
난 다리를 흔들어 불트에게 나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린 십자가를 내세운 채로 도시를 향해 진군했다.
더 이상 막아서려는 이는 없었다.
경외감.
경외감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주님의 향기다! 이건 주님의 향기야!”
성십자가가 지나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무릎 꿇었다.
기도문을 읊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역시 성십자가까지 내쫓을 깡은 없겠지.
귀족들도 고개를 숙였다.
서로 조금씩 다른 복장.
각 롬바르디아 도시에서 온 거군.
“성도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공자를 뵙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한 성직자가 다가왔다.
“교황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우린 그의 안내에 따라 나아갔다.
교황은 백마에 탄 채 무리의 정중앙에 있었다.
뾰족한 모양의 모자.
아직 화려한 교황관은 아니군.
황금실로 수놓은 옷은 마치 왕을 보는 것 같았다.
절차가 정확히 뭐였지?
난 불트에서 내린 뒤 교황에게 다가갔다.
주변엔 침묵뿐이었다.
멀리 숲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황이 탄 말의 등자를 잡고 도시 안으로 따라가는 것.
이게 전통이었다.
내가 등자를 잡으려던 그때 교황이 손짓을 보냈다.
말에서 내려달라는 신호.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주변의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다들 놀란 감정이 느껴졌다.
난 교황을 부축해 말 아래로 내렸다.
자연스럽게 하자. 자연스럽게.
교황을 실수로 자빠트리기라도 하면 그것보다 더 웃긴 상황이 있을까?
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교황의 모습을 상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망토를 벗고 그의 앞에 무릎 꿇을 차례였다.
“그리스도 교회의 아들이여, 환영합니다.”
교황이 내 머리를 안아 올리며 입을 맞췄다.
평화의 키스.
난 얼굴을 찡그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남자랑 입 맞추는 건 아직도 안 익숙하네.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신 루치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성도 예루살렘 왕실의 보두앵 공자. 그대가 이곳 이탈리아에 오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 같은 말투.
“헤라클리우스 대주교에게 공자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두 다 좋은 이야기뿐이더군요. 공자의 영광된 이름은 이곳 유럽에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교황의 감정은 차분했다.
보두앵 4세와 마찬가지로 잔잔한 호수를 보는 듯한 느낌.
이 정도는 되어야 교황이 될 수 있는 거군.
난 그를 바라봤다.
로마 교황.
지금 시대의 교황은 한 종교의 성자이면서 동시에 세속의 권력자였다.
유럽의 왕, 귀족들과 줄타기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그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권을 지닌 사내.
교황의 수단은 종교뿐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음모는 기본에 암살, 살인, 문서 위조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대주교에게 라텐란 궁전을 선물했다는 문서도 위조였지.’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교구보다 우위라는 ‘교황 수위권’.
사실 이런 권력을 부여한 건 로마 교황청 자기 자신이었다.
현재의 권력과 권위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만들어낸 셈.
“저도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교황 성하께도 마찬가지이지요.”
내가 말했다.
기사단 처리를 도와줬으니 이 정도 입발림은 해줘야지.
“모두 다 주님의 뜻이지요.”
루치오 교황이 미소 지으며 말에 올라탔다.
난 그의 안장을 붙잡고 옆에서 걸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비켜서며 길을 터줬다.
“공자께서 프리드리히 황제의 사절단과 친하게 지내셨다 들었습니다만.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교황이 말했다.
감정을 읽기 힘든 어조.
육감으로도 별다른 게 안 느껴졌다.
역시 날 의심한 건가?
“사절단과는 그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보두앵 4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말했다.
“중요한 건 행동이지요. 전 교황 성하와 로마를 수호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만약 제가 황제의 편이었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지요. 공자가 하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도 압니다.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요.”
“….”
도시에 들어서자 시민들의 함성이 들렸다.
그들 모두 성십자가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도시 곳곳의 교회에서 종이 울리며 ‘사은찬미가’가 울려 퍼졌다.
역시 준비가 철저하군.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공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공자가 다른 마음을 먹고 이곳 이탈리아에 온 거라고 그러더군요.”
교황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전 그리스도의 아들이자 대천사의 축복을 받은 공자를 믿습니다. 롬바르디아 동맹군의 지휘권을 맡을 적임자는 공자뿐입니다.”
“제가 있는 한 황제의 군대는 교황 성하께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단순히 날 믿고 이런 선물을 주는 건 아니겠지.
난 도시 중 가장 큰 군대를 끌고 왔다.
롬바르디아 도시들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인 셈.
벌써 날 이용할 생각이군.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도 그를 이용할 생각이니.
대화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서로 뒤통수를 치는 것보단 시장에서 가격 흥정하는 거에 가깝다 해야 할까.
“공자께서 그리 약속하시니 큰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사라센들이 성도 예루살렘을 죄어오고 있는 지금 이렇게 군대를 장기간 이탈리아에….”
난 말끝을 흐렸다.
내가 하려는 말은 간단했다.
써먹고 싶으면 보상을 내놔라.
“우리 로마 교황청과 서방 교회는 성도 수호를 위한 모든 지원을 해왔습니다. 이번 기사단 일도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지요.”
그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 말뜻도 간단했다.
기사단 일도 도와줬는데 뭘 또 달라고?
“하지만 성도 수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 힘들고 아깝겠습니까?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편히 말씀하시지요.”
“지금 예루살렘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주민과 새로운 십자군 원정입니다.”
“이주민이라면 이미 순례자들이 있을 텐데요?”
“지금의 순례자들은 대부분 성도 순례 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십자군이라 불리는 무장 순례도 마찬가지.
기사와 순례자들 대부분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레반트를 떠났다.
이들 중 정착하는 이들은 극소수.
라틴인이 없다.
그건 그만큼 징집할 수 있는 병사가 적다는 걸 의미했다.
“예루살렘에 정착해 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특혜가 주어져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돈뿐만이 아닌 종교적인 특혜.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고 봉사한 기간만큼 가족이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을 줄일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이건 게임에서 선택 가능한 정책 중 하나였다.
정착해 거주한 만큼 죽은 가족이 연옥에서 고통받는 시간을 줄여준다!
이를 통해 이주민을 크게 늘릴 수 있었지.
“교리를 바꾸는 것은 쉽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닙니다.”
교황이 말했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부드러운 미소.
“우선 황제와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성도의 일은 그 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보상받기 전에 먼저 황제부터 처리하라는 거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교황 성하.”
“로마 교회는 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의 상황은 너무나 혼란스럽지요.”
“저도 대충 들어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지금쯤 헨리 2세의 아들들.
헨리, 제프리, 리처드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겠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그 옆에서 좋다고 이간질하고 있을 터.
내가 유럽에 온 이유 중 하나도 그걸 막는 거고.
“그걸 해결하려면 우선 프리드리히 황제부터 물리쳐야겠지요.”
* * *
“귀도, 이 녀석!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사내다워졌구나!”
“위그 경께서도 아직 잘 걸으시는군요. 지금쯤이면 나이가 드셔서 힘드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 건방진 입은 그대로구나. 어디 한번 보자!”
위그가 껄껄 웃으며 외쳤다.
그가 옆의 사내를 내게 소개했다.
“이 녀석은 귀도입니다. 페라라의 포데스타(최고 행정관)이지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두앵 공자님.”
귀도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의 옷은 한눈에 봐도 휘황찬란하고 화려했다.
동로마 옷이 간소하게 느껴질 정도.
“공자님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나같이 대단한 이야기들뿐이더군요.”
난 그와 악수를 나눴다.
귀도.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긴 한데.
페라라의 포데스타라.
이렇게 어린 나이에?
그는 아직 이십 대처럼 보였다.
갈색 머리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
가니에르와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위그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가니에르와 함께 검술을 가르쳤던 녀석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 뻔지르르하기만 한 놈이 포데스타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저도 몰랐습니다. 근데 황제와 한 번 싸워서 이기니 다들 영웅처럼 대해주더군요.”
귀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레냐노의 영웅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넌 얼굴이 멀쩡하니 그런 대우를 받는 거다. 만약 내가 그런 공을 세웠다 해도….”
위그가 자신의 가면을 가리켰다.
“아무도 인정 안 해줬겠지.”
“왕국에서 위그 경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발리앙 영주의 형이자 라자루스 기사단 최강의 기사.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위그가 다시 껄껄 웃었다.
“그럼 다음에 한 번 가면을 벗고 거리를 돌아다녀야겠군요. 아이들한테 돌팔매질이나 안 당하면 다행일 겁니다.”
“검을 든 나병 환자한테 돌이라니.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습니까?”
귀도도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전 이탈리아의 상황을 두 분께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공자님의 도착을 반기지 않던 자들도 있었지만….”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일로 더이상 그런 말은 안 나올 겁니다. 반대하던 자들의 표정을 못 보셔서 정말 아깝군요. 제 평생 그렇게 웃긴 장면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웃으며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냈다.
“지금 롬바르디아의 상황은 복잡합니다. 도시마다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르죠. 우선 밀라노와 페라라가 공자님의 도착을 반겼고. 나머지 도시들 대부분….”
난 이어지는 설명들을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정보만 충분하다면 뭐든 해결할 수 있지.
이제 다시 줄타기를 할 차례였다.
목숨이 걸린 줄타기를.
* * *
중세 시대 성유물의 경우 성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성인의 성유물을 들고 도시로 가는 경우 시민들이 그 향기를 맡았다는 서술이 많습니다.
출처 – 낯선 중세 (유희수) 문학과지성사
이미지 – 귀스타브 도레 <성십자가의 발견>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