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100)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100)화(100/151)
시안의 말을 듣는 순간 레이첼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레이첼은 휘청이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그 바람에 뺨에 닿았던 시안의 손이 떨어졌다. 닿을 곳을 잃고 허공에 남은 시안의 손이 아득하게 보였다.
시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레이첼을 끈기 있게 기다렸고,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째서……?”
레이첼은 파혼하고 싶지 않았고, 조금 전까지 시안 역시 같은 마음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안이 진짜로 파혼을 거부할 줄은 몰랐다.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대공 전하는 내가 바라는 걸 거절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당연히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겠지, 생각했던 거야.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착각이 부끄러웠다.
시안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충격이 가신 뒤 찾아온 것은 그가 처음으로 거부한 것이 하필 파혼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멍하니 시안의 손을 바라보던 레이첼이 고개를 들어 시안과 눈을 맞췄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시안은 평온했다.
“제게 이유를 물으시는 겁니까?”
“…….”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시안은 레이첼보다 먼저 테오도르가 팔아버린 프람 영지를 사들이고 그녀의 부모님이 묻힌 곳을 찾았다.
약혼식에 참석한 증인들 앞에서 약혼 서약이 아닌 사랑을 맹세했고, 테오도르에게 복수하는 레이첼을 앞장서서 도왔다.
레이첼의 앞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늘 다정하고 상냥했다.
그것이 시안의 본래 성품이라 생각했다.
‘아니. 아니었어. 대공 전하는…… 내게만 다정하셨던 거야.’
왜 몰랐을까.
시안은 스테판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이토록 다정하지 않았다. 남색이라 오해받을 만큼 여성을 멀리했으면서 레이첼의 곁에는 기꺼이 머물렀다.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안의 황금빛 눈동자에 왠지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대공 전하는 매번 이런 눈으로 날 보고 계셨어. 지금처럼,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가슴이 벅차올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레이첼의 대답을 기다리던 시안이 못 견디겠다는 듯 재차 물었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파혼을 거부한 이유.”
과하게 다정하고 친절한 시안을 보며 그가 제게 호감을 품은 게 아닐까 생각한 적 있었다.
그때마다 레이첼은 시안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무시했다.
정말로?
정말 시안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 아냐……. 나 사실 알고 있었어.’
길드의 정보원인 시안만큼은 아니지만 레이첼은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았다.
이토록 티 나게, 넘치게 쏟아지는 애정을 몰랐을 리가 없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해왔을 뿐.
‘우린 안 되니까……. 이어질 수 없으니까.’
마음을 알아도 받아 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모른 척했던 거였다.
그레이엄과 돌로라사가 원작대로 연인이 되려면 레이첼과 시안은 연인이 되어선 안 됐다. 제국 귀족법은 가까운 친척 사이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돈 사이의 사랑이라니.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허락받지 못할 게 뻔하지 않은가.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는 분명 테오도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 거짓 약혼을 하기로 약속했어요. 지금 약속을 어기시겠다는 건가요?”
“예.”
‘맙소사.’
파혼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대답에 몽글몽글 기뻐지려는 마음을 애써 붙잡은 레이첼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대공 전하. 이러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혹시 당장 파혼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원작 소설 대로 그레이엄과 돌로라사가 연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아이들은 이제 고작 네 살, 일곱 살이었다. 시안과 레이첼이 ‘당장’ 파혼할 필요는 없었다.
레이첼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당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저는 백작을 향한 마음을 정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에 레이첼의 눈앞이 아찔했다.
레이첼의 파혼 요구가 계기였던 걸까. 원래도 애정이 넘치던 시안이었지만 이제는 거침없고 직선적이기까지 했다.
그때 구세주처럼 케이티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레이첼 백작님. 아직 대화 중이신가요? 저녁 식사 준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레이엄 도련님과 라일러스 주교님께서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시안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노을 지던 하늘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군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레이첼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 몸을 바로 세운 시안은 레이첼의 파혼 요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보고 싶을 겁니다.”
시안이 응접실 문을 닫고 나가고서야 레이첼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 *
쨍그랑!
시가르가 집어던진 술잔이 시종의 머리에 부딪혀 깨졌다. 시종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리를 비키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잔뜩 술에 취한 시가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쓸 만한 패인 줄 알았건만,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어! 젠장!”
테오도르가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던 계획은 하나 같이 실패했다.
원로회에서 테오도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짜증이 나면서도 속이 시원했다.
“그딴 놈. 차라리 없는 게 나았어. 처음에 반역죄로 처단했으면 이런 망신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을.”
남을 잘 믿지 않던 시가르였다. 조금만 흠을 보여도 반역죄로 처단하던 그가 처음으로 기회를 주었던 자가 하필 테오도르였다.
그런데 망할 놈은 기회를 잘 활용하기는커녕 되려 시가르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전단 사건 이후 황제가 무능력한 자를 억지로 보좌관의 자리에 앉혔다며 말이 많았다.
적당히 무시하며 지내려 했는데 이번에는 그 무능력한 보좌관이 백작의 저택에 숨어들어 해를 끼치기까지 했다.
레이첼이든 시안이든 어딘가에는 흠집을 냈어야 했는데, 정말로 무능력한 놈은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쓸모없는 것.”
문제는 시가르가 그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범죄자를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며 원로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안 그래도 시안을 편들며 시가르를 곱게 보지 않던 귀족 원로회였다.
시가르는 소금과 설탕 사건으로 개인 재산을 크게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도르 따위 때문에 정치적 기반마저 흔들리는 건 큰 문제였다.
시가르가 입술을 씹었다.
“이게 다 망할 연놈들 때문이야. 그놈들만 사라지면 된다고!”
시안과 레이첼.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놈들이 아니었다면 소금과 설탕을 무리하게 사들이거나 테오도르를 보좌관에 앉히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시안과 레이첼, 두 사람이 사라져야 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시가르의 세계에 평온이 찾아올 수 없었다.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하면 그놈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까.”
전에 말벌술을 보냈던 것처럼 노골적인 방법을 썼다가는 원로회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검술에 능한 시안에게 평범한 암살자 따위를 보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고, 레이첼의 저택은 테오도르 놈 때문에 당분간 황궁만큼 철저하게 보호받을 예정이었다.
술병에 입을 대고 술을 들이켜던 시가르가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래. 그 방법이 좋겠어. 거기 시종! 당장 황궁에서 부리는 심부름꾼을 모두 모아와라. 당장!”
레이첼을 향한 시안의 애정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시안이라도 품에 안긴 레이첼의 공격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 테니까.
* * *
늦은 밤, 시안은 침실 창틀에 걸터앉아 달빛에 약혼반지와 커프스단추를 비춰 보고 있었다.
분홍색 다이아몬드와 하늘색 다이아몬드의 조합은 레이첼을 떠올리게 했고, 시안은 미소를 멈추지 못했다. 프람 저택에서 마주했던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테오도르의 처형을 마무리하고 레이첼을 찾아갔을 때, 시안은 슬펐다. 레이첼이 파혼을 말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파혼하도록 해요.’
파혼을 말하는 레이첼은 시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파 보였다. 누가 봐도 파혼을 원하지 않는 투였다.
그때부터 시안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레이첼이 자신과의 파혼을 원하지 않는다니!
‘나는 당신과 파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게다가 레이첼은 시안의 파혼 거절에 얼굴을 붉히며 너무도 환하게 웃었다.
‘당황해서 본인이 웃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지.’
당장 레이첼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무척 애를 써야 했다.
그러더니 꼭 파혼해야 한다며 시안을 몰아세울 때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슬픈 얼굴이 되었다.
‘파혼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모습, 레이첼 백작답지 않았어.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고.’
레이첼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약혼식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시안을 바라보던 레이첼의 얼굴과 그 이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모습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레이첼의 마음에 남은 장벽이 시안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시안은 테오도르 놈처럼 싫다는 레이첼을 억지로 끌어당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 스스로 벽을 열고 나와 시안의 품에 안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잘그락, 커프스단추를 상자에 넣고 왼손 약지에 반지를 낀 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이 내게 안기게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