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111)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111)화(111/151)
시가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책상을 탕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네깟 것들에게 왜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이냐! 사과를 받아야 할 것은 나야!”
“저희가 황제 폐하께 사과를 해야 한다고요? 어째서지요? 저희는 폐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재산도 전부 내놓았는데요.”
“내 나라에서 벌어들인 돈이니 내게 내놓는 것이 당연하지! 내가 준 작위로 잘 먹고 잘살았으니 내게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고!”
“…….”
귀족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돈을 내놓고 제국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가르의 태도는 여기 모인 다른 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분노한 시가르의 눈에 귀족들의 표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날벌레 같은 놈들! 네놈들 때문에 내가 발 뻗고 잔 적이 없어! 네놈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드는 것 자체가 죄악이란 말이다!”
“저희가 숨 쉬며 살아 있는 것이 죄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너! 그리고 시안! 네놈들은 이 땅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야 하는 존재들이야!”
“그런가요.”
레이첼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가르가 사과를 거부하는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흥분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과 얘기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마지막으로 이걸 전해 드려야겠군요.”
레이첼은 예니스 교에서 가져온 또 하나의 서신을 내밀었다.
“사과하신다면 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어쩔 수 없네요.”
“뭐지?”
바스락거리며 서신을 펼쳐 읽은 시가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뭐라, 퇴위?”
“예니스 교는 시가르 아이사 황제가 폐위되거나 퇴위했을 때 다시 아이사 제국과의 교류를 재개할 생각입니다.”
폐위 또는 퇴위 시 교류 재개.
그건 시가르가 지금 바로 퇴위한다면 제국과 교단 사이의 교류 단절을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은 시가르가 지금 당장 퇴위해 주길 바라며 눈을 빛냈으나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가르는 레이첼이 건넨 서신을 찢으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감히, 감히 나의 퇴위를 조건으로 걸었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봐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예니스 따위에 휘둘려 이 자리를 내줄 것 같으냐! 바라던 바다! 꺼져! 예니스든 뭐든 내 땅에서 꺼져버리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뜻을 교단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레이첼이 예를 갖췄다.
설마 정말 이렇게 끝인 걸까.
불안한 귀족들의 눈빛이 레이첼에게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가르에게 재차 묻거나 권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협상 결과에 한 점 미련조차 없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내내 사태를 지켜보던 스테판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망했네.”
짧은 말이었지만 대회의장을 동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 그래도 불안이 넘치던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을 업신여긴 데다 믿고 의지하던 예지력마저 빼앗아 간 시가르에게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예니스 교는 제국이 처음 세워질 때부터 제국의 평화와 안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니스의 예지력과 자비가 없다면 귀족은 물론 제국 전체가 불안에 휩쓸릴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미래 예지와 치유, 자비에 기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발, 황제 폐하! 당장 사과 하십시오! 당장 예니스 교와의 교류를 되살리십시오!”
직접 퇴위를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뜻은 같았다.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 당신 따위가 계속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보다 예니스 교와의 교류를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별로 현명하지 않은 시가르에게도 이것만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그는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큰소리를 해대는 귀족들을 노려보다가 자신의 자리 앞에 놓인 촛대를 움켜쥐었다.
“닥쳐! 한 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이걸로 주둥이를 뭉개버리겠다!”
귀족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몸을 웅크렸다.
시가르의 눈에 말없이 자리에 앉은 레이첼이 비쳤다. 그는 집어 던지려는 듯 촛대를 높이 들어 올렸고, 그제야 내내 미동이 없던 시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두십시오.”
시안이 촛대를 든 시가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걸 던지면 문제가 더 커질 뿐입니다.”
“이거 놔! 망할 놈! 네깟 놈이 내 몸에 손을 대다니! 기사단은 무얼 하는 거냐! 기사단!”
큰소리 치긴 했지만 술과 피로에 찌든 시가르는 시안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촛대를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대회의장 바깥을 지키던 기사들이 웅성거렸고,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기사들이 상황을 보고 머뭇거렸다. 흥분해서 촛대를 휘두르려 하는 황제와 말리는 대공의 모습은 개입을 망설이기에 충분했으니까.
상대가 웬만한 기사 서넛은 맨손으로 상대할 수 있는 시안이기도 했고.
시가르가 소리쳤다.
“뭘 쳐다보고 있는 거냐! 당장 황제의 몸에 손을 댄 시안 놈을 칼로 쑤시란 말이다!”
“네, 네엣.”
앞쪽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귀족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시안은 가볍게 검을 피했다.
탱강!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때렸고, 기사는 휘청이다가 바닥에 넘어져 굴렀다.
시안은 그런 기사를 바라보지 않고 시가르에게 속삭였다.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대회의장 분위기가 나빠집니다.”
“하, 네깟 것이 감히 내게 훈수질을 한단 말이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놔! 이거 놓으라고!”
“휴식을 허락해 주십시오. 회의장 분위기가 지나치게 과열된 것 같습니다.”
“싫다! 내가 왜 그래야 하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치고 말 것이다!”
짧게 한숨을 내쉰 시안이 시가르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대회의장을 지키던 기사 몇으로 내 목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내 목을 가져가는 건 황실 기사단장 넷이 동시에 덤벼도 어려운 일일 텐데요.”
“큭.”
“휴식을 허락하십시오. 그럼 저도 손목을 놓고 물러나겠습니다. 이 많은 귀족과 기사들 앞에서 제게 손목이 잡혀 이리저리 휘둘려지고 싶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젠장……. 젠장!”
체념한 듯 입술을 씹는 시가르를 확인한 시안이 대회의장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한 뒤 돌아와 주십시오.”
“그, 그러겠습니다.”
크게 소리치던 귀족 몇이 민망하다는 듯 먼저 대회의장을 벗어났다.
황제보다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절반 이상의 귀족이 자리를 비키고서야 시안은 시가르의 손목을 놓고 그가 들고 있던 촛대를 빼앗았다.
시가르가 벌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부여잡고 으르렁거렸다.
“네놈……!”
“형님이 폭력적인 방법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형님이 쓰는 폭력이 매우 수준 낮다는 것쯤은 이제 아셨으면 좋겠군요.”
스윽, 반쯤 내리뜬 눈으로 시가르를 살핀 시안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매번 성공하지도 못할 폭력을 휘두르면서 비참하지도 않으십니까.”
“네놈! 네놈, 시안! 으아아!”
뚜벅뚜벅 걸어서 멀어지는 시안을 보며 시가르가 고함쳤다.
하지만 시안의 머리로 촛대나 주먹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시안의 말대로, 괜한 시도를 해 봐야 시가르 자신만 더 비참해질 뿐이었으니까.
* * *
대회의장을 벗어나 복도 테라스로 나온 시안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예니스 교에서 요구한 시가르의 퇴위.
시안에게 이보다 더 큰 기회는 없었다.
‘드디어 시가르에게 아버지를 죽인 죄를 물을 수 있겠어.’
시가르의 앞에서 떨지 않고 의연하게 예니스 교의 서신을 전달하고 퇴위를 요구하던 레이첼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레이첼.’
“……시안.”
순간 시안은 심장이 펑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레이첼을 생각한 순간 레이첼이 자신을 부르며 곁으로 다가와 주다니.
레이첼은 시안의 곁에 나란히 서서 테라스 난간을 잡고 너른 황궁 정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안은 알고 있었다. 레이첼이 정원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으로는 시안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괜찮으세요?”
“무엇이 말입니까?”
“시가르, 그러니까 황제는…… 당신의 형이잖아요.”
“그래서요?”
“으음. 그래서.”
상냥한 레이첼은 손끝으로 난간을 문지르며 잠시 말을 멈췄다.
시안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예뻐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데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저와 예니스 교의 요구가 혹시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못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쨌든 황제는 당신의 가족이잖아요.”
상처 따위를 받을 리가 없었다.
시가르가 제지우스를 죽인 순간부터, 그는 이름뿐인 가족이었다.
오히려 시안은 돌로라사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레이첼에게 독이 든 찻잔을 건넨 시가르가 자신과 피로 이어진 형제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그는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게요. 사실은 마음이 썩 좋지 않습니다.”
“아, 역시.”
레이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단번에 울상이 되었다.
시안이 슬쩍 웃으며 레이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황태자 전하와 돌리, 그레이엄에게 들으니 레이첼 당신이 위로를 무척 잘한다고 하더군요.”
“제가요?”
“제게도 해주십시오. 위로.”
“제가 어떻게…….”
시안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어서 위로해 달라는 듯이.
레이첼이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부서져 버릴 듯 거세게 뛰었다.
레이첼의 가느다란 손이 시안의 등에 닿았다. 조금 서늘한 그녀의 체온이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미안해요.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텨주세요. 모든 게 다, 더 좋아질 거예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시안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시안을 품에 안아주듯 가까이 다가왔던 레이첼이 깜짝 놀라 물러서려 했으나 시안이 더 빨랐다. 그는 레이첼의 이마에 툭,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레이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시안의 입꼬리는 위로 치솟았다.
“그래요. 모든 게 다, 더 좋아질 겁니다. 듣던 대로 더할 나위 없는 위로군요.”
“아…….”
“긴장하신 모양이네요. 아니면 기대하셨거나.”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레이첼이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귀여운 모습에 슬쩍 눈웃음 지은 시안이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위로도 받았으니 다시 일을 마무리하러 가볼까요.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레이첼이 시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시가르를 물리칠 시간이었다.
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곧 대회의장이 가득 찼다.
시가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대로 돌아가 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괜히 도망쳤다가 시안에게 억지로 끌려오는 망신을 당하기는 싫었던 모양이었다.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재개하겠습니다.”
시가르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은 모양이지?”
“이제 시작입니다.”
시가르의 입술이 비틀렸고 시안은 그런 형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저는 황가의 이름 아이사와 디카르시냐크의 이름으로 시가르 아이사, 당신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길 공식적으로 요구하겠습니다.”
“……뭐!”
더 화날 일이 남았겠나 생각하던 시가르는 시안의 말에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일어섰다.
“감히 너 따위가 나의 퇴위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겠다고! 그깟 예니스의 종이 쪼가리 때문에!”
“아니요. 저는.”
시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잘그락, 맑은 소리가 나는 주머니가 탁자에 놓이자 시가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머니 겉에 황실의 문양이 아름답게 수놓여 있었다.
열린 주머니 사이로 보이는 검은 유리 나무를 확인한 시가르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 이걸 네놈이 어떻게……!”
“시가르 아이사. 당신에게 선황 제지우스 폐하를 독살한 죄를 묻겠습니다.”
대회의장이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