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114)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114)화(114/151)
시안은 아트레이유를 비롯한 귀족 모두가 대회의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말없이 아트레이유가 늘어지게 앉아 있던 황제의 의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곁에는 충직한 신하 휘지우스와 오랜 친구 스테판만이 남았다.
둘 모두 시안이 어릴 적부터 공들여 그의 곁에 두었던 사람들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황제가 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결국 황위에 오른 것은 시가르였고, 시안은 공포스럽던 황성과 제국의 안정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아트레이유가 태어난 뒤에는 유능함을 더 널리 펼치지 못할 스테판과 닉, 휘지우스에 대한 미안함마저도 버렸다. 감히 조카의 것을 넘보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황제를 보필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자신이 황제를 가까이서 더 많이 더 충직하게 모실수록 자신과 가족들이 안전하고 자신의 사람들이 더 활약할 수 있을 테니까.
내내 시안의 곁에서 부복한 채 움직이지 않던 휘지우스가 말했다.
“황제 폐하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본래의 자리를 되찾으셨군요. 저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 그대는 내가 황제가 되지 못한 것을 나보다 더 아쉬워했었지.”
“대공 전하께서 황제 폐하가 되신 이후에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온갖 제국의 소식을 전하의 발아래 가져다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고맙다. 오늘 맡긴 일을 훌륭히 수행해 준 것도 고맙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부디 저를 유용하게 부려주시기를.”
“당분간 바빠질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예.”
휘지우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대회의장을 나섰고, 마지막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스테판이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된 걸 축하한다, 친구.”
“고마워.”
“별로 기뻐하는 얼굴이 아닌데? 시가르였다면 내가 드디어 황제다! 하면서 엄청나게 웃어댔을 텐데 말이야.”
“솔직히 좀 얼떨떨해. 생각도 안 해본 일이었으니까.”
“진짜 아트레이유한테 황위를 넘길 생각이었어?”
“조카의 자리를 탐내는 숙부가 되고 싶지 않았어. 내가 그 애한테 해줄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었으니까.”
“하여튼. 짜증 날 정도로 훌륭한 놈이라니까.”
“그런가.”
“뭐 어쨌든 난 네가 황제가 되어서 좋아. 시가르 같은 놈 밑에서 일하기는 정말 싫었거든.”
시안이 입꼬리를 올렸으나 자연스러운 미소는 지어지지 않았다.
휘적휘적 걸어가 시안의 어깨를 툭 친 스테판이 대회의장을 나가며 말했다.
“참. 그리고 하나 더 축하한다.”
“뭘?”
“드디어 아버지의 복수를 해냈잖냐. 너한테는 이거야말로 축하할 일이지. 안 그래?”
그러고는 시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너른 대회의장에 혼자 남은 시안이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괜히 20년 지기 친구는 아니구나.”
맞다.
지금 시안은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월감이나 기쁨을 느끼지 않았다.
그보다는 후련한 마음이 더 컸다. 시가르의 죄를 밝히고 놈을 감옥에 처넣어 단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끝났다.’
10년 동안 바라던 일이었다.
딸과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묻어 놓고 감히 꺼내 화를 내지도 못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감정의 파도가 그를 덮쳤다. 크게 웃거나 울지 않았지만 마음이 울렁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산 너머에 해가 걸리고 붉게 노을이 질 때까지 홀로 마음을 추스른 시안이 천천히 몸을 돌려 대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커다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그의 눈이 커졌다. 애써 갈무리해 둔 감정들이 폭포처럼 사방으로 쏟아졌다. 머리가 멍했다.
복도에서 그를 기다리던 레이첼 때문이었다.
여린 분홍빛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 뜨거운 노을에 당장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레이첼.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왜.”
반사적으로 물었으나 시안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레이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안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당신이 걱정돼서요.”
상냥하고 아름다운 레이첼.
짧게 숨을 들이마신 시안이 몸을 굽혔다. 그는 레이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끓어오르는 감정을 조용히 쏟아냈다.
오래 묵힌 감정은 끈적하고 때로는 아팠으나 시안은 자신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가늘고 연약한 레이첼의 어깨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위로받았다.
‘아버지. 제가 해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형에게 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어요.’
레이첼이 자신의 등 위에 손을 얹어주는 것을 느끼며 시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격변의 날이었다.
* * *
제국과 수도의 분위기는 오묘했다.
시가르가 선황을 독살하고 황좌에 앉았다는 이야기와 연이은 황태자의 반란, 그리고 갑작스럽게 황제가 된 시안의 존재에 혼란스러우면서 동시에 고요했다.
시가르가 퇴위하며 예니스 교가 다시 문을 연 탓이었다.
황제의 권리는 임시로 벨윈더가 이어받았고, 그녀는 국고가 텅 비었다는 시가르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뜻하고 자비로운 예니스 교의 포용력과, 제국 멸망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 시안의 정치적인 수완에 제국과 수도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이 지난 뒤, 베아트릭스와 스테판이 레이첼을 찾아왔다.
“여어, 레이첼 백작. 잘 지냈지?”
“황후 폐하와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황후 폐하?”
레이첼은 베아트릭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가르의 곁에 힘없이 서 있던 당시의 모습도 안쓰러웠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눈 밑이며 얼굴 여기저기가 까맣고 몸도 비쩍 마른 것이 며칠을 굶은 사람 같았다.
베아트릭스가 힘없이 웃었다.
“미안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아뇨, 아닙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두 사람을 가까운 응접실로 안내한 레이첼은 따뜻한 차와 부드러운 간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베아트릭스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소화가 안 돼서. 먹으면 뭐든 토해 버린답니다.”
“황후 폐하.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황실 주치의는 뭐라고 하던가요?”
대답은 스테판이 대신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렇대.”
“긴장이 풀려서요?”
“그래. 몇 년이나 시가르 곁에서 살아남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잖아. 함부로 기침 한 번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스테판이 곁눈질로 곁에 앉은 베아트릭스를 살폈다. 그는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자신의 이모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시가르가 그렇게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기절하셨어.”
죽기 전에는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자에게서 벗어난 충격 때문이었다.
베아트릭스는 몸과 마음이 약해서 이용하기 편하겠다는 이유로 황후가 된 인물이었다.
베아트릭스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스테판이 가로막았다.
“며칠 동안 울다가 기절하셨다가 깨어나서 다시 울기를 반복하셨어. 의사 말로는 소화기관이 죽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다고 하더라. 물만 겨우 드시고 계셔.”
“그런……. 그런 상황에서 황궁을 나오셔도 되는 건가요? 그럴 때일수록 더 잘 쉬셔야 하잖아요. 여기는 왜.”
“이모님이 레이첼 백작,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셔서.”
“저를요?”
“……이모님. 제가 얘기할까요?”
베아트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구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린 베아트릭스가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그녀는 힘겨운 듯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레이첼 백작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네?”
찻잔을 내려놓은 베아트릭스가 엎드리듯 깊이 상체를 굽혔다. 푸석한 머리카락이 뺨 옆으로 흘러내렸다.
레이첼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화, 황후 폐하. 일어나세요. 갑자기 감사 인사라니요.”
“황제 폐하, 아니 시가르가 그렇게 된 것이 레이첼 백작과 시안 대공의 덕이라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덕분에 황후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정말이지…….”
투둑, 베아트릭스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황후 폐하…….”
“난 황후가 아니에요. 남은 생이 얼마가 되었든, 이제 나는 베아트릭스 이아콥스로 살 겁니다. 끔찍한 아이사와 더는 연관되고 싶지 않아요.”
강한 어조로 말을 내뱉은 베아트릭스는 힘겨운지 몸을 웅크린 채 마른기침을 했다.
스테판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베아트릭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정식으로 결혼 무효 절차를 밟기로 했어. 시안이 도와준다더라.”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결혼 무효를 한 번 도왔던 시안이니 이번 일도 분명 깔끔하고 빠르게 마무리해 줄 것이다.
“그동안 사뒀던 저택 중 한 곳으로 가서 지내실 예정이야. 퇴위하고 감옥에 갇히긴 했지만 아직 시가르가 죽은 건 아니니까. 의사가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은 일단 몸과 마음을 추스르셔야 하니까요.”
“나도 고마워. 레이첼 백작이 제안했던 단기 임대 덕분에 어디든 사람 사는 냄새가 나거든. 기사들도 충분하고. 솔직히 빈 저택보다 훨씬 안심이 돼.”
“그렇담 다행이에요.”
“출발하기 전에 당신한테 인사하고 싶다고 하셔서 잠깐 들른 거야.”
“출발하기 전에 들렀다고요? 지금 바로 출발하시는 건가요?”
“어.”
“아……. 그럼 황태자, 아니 아트레이유는요? 데려가시나요?”
스테판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녀석은 지금 반란 혐의 때문에 황태자궁에 연금되어 있어. 좀 애매하긴 하지만 어쨌든 반란은 반란이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들어주라.”
“네,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아트레이유 좀 돌봐 줘.”
“아트레이유를요?”
“원래대로라면 연금에서 풀려난 뒤 이모님과 함께 이아콥스 저택으로 들어와야 해. 당신도 알잖아.”
레이첼도 한 번 겪은 적 있는 일이었다. 레이첼과 테오도르의 결혼이 무효가 된 뒤 그레이엄은 프람 백작 가문의 영식이 되었다.
“그런데 당신도 보다시피 이모님 상태가, 당장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든. 나도 이모님 모셔다드려야 해서 당분간 저택 비워야 하고.”
“멜리타 부인은요?”
“아트레이유랑 별로 친하지 않으셔. 게다가 사교계 꽃이잖아. 연회다, 뭐다, 그런 것 때문에 저택에 잘 계시지도 않고.”
“그렇군요.”
“레이첼 백작이랑 그레이엄이 아트레이유랑 친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아트레이유 좀 돌봐 줘.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흔쾌한 허락에 스테판이 안도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레이첼 백작한테는 고마울 일이 많네.”
“아트레이유는 프람 저택에 놀러 오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전처럼 몰래 올 필요 없이 여기서 지낼 수 있다고 하면 좋아할 거예요. 그레이엄도 대화 상대가 늘어나니 좋아할 테고요.”
“당신은?”
“저는.”
레이첼은 집무실에 고이 보관해 둔 아트레이유의 소원 쿠폰을 떠올렸다. 씩씩하지만 아직은 조그마한 소년이 장난스레 건넨 종이였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아껴 두었던 소원 쿠폰을 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