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120)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120)화(120/151)
몽롱하던 레이첼의 정신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설마. 설마 이거…… 꿈이 아닌 거야?’
평소에 꾸던 꿈과는 어딘가 다른 시안의 반응과 말투가 그제야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레이첼이 고개를 돌리며 시안의 가슴을 밀어냈다.
“시안, 잠시만, 멈춰주세요.”
“싫습니다.”
“……!”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몸의 무게와 옷 위로도 선명히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 덕분에 여기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레이첼이 발버둥 쳤다.
“안 돼. 제발 그만, 그만해요.”
그제야 시안이 맞댔던 입술을 떼고 물러났다. 그는 반짝이는 입술을 핥으며 슬쩍 눈웃음 지었다.
“아까 분명 후회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죄, 죄송합니다. 아까는, 그게. 꿈인 줄 알고…….”
“그런 것 같았습니다.”
민망함에 입술을 꾹 깨문 레이첼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잠옷을 정돈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해 주세요.”
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호칭으로 날 부르지 말라고 분명 얘기했을 텐데요. 그거야말로 내게는 결례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되셨잖아요. 저 때문에 대관식이 엉망이 되기까지 했고요. 게다가 꿈인 줄 알고 이런 일까지.”
“레이첼.”
짧게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은 시안이 레이첼의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커다란 품은 따뜻하고 듬직해서 절로 긴장이 풀어졌다.
“당신이 내게 사과할 건 나를 이름이 아닌 황제로 불렀다는 것과 몸이 좋지 않은데도 내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 두 가지뿐입니다.”
“…….”
“꿈속에서는 계속 시안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정 불편하다면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좋으니,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거리감 따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시안.”
“그래요. 그렇게.”
시안이 깊은숨을 내쉬며 레이첼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아까도 묻긴 했지만 잠이 깬 것 같으니 다시 묻겠습니다. 몸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정말 아프지 않아요.”
“다행입니다. 걱정했어요.”
잠시 시안의 품에 안겨 있던 레이첼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는 저항 없이 밀려나며 황금빛 눈동자로 레이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레이첼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시안. 아까 제가 한 얘기들은 잊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아까 한 얘기들이라면.”
“제가 꿈을 꾸는 줄 알고 했던 말과 행동 전부요.”
“흐음.”
예상은 했지만 시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레이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말했다.
“제 마음이나 당신 마음과 상관없이 저는 당신과 꼭 파혼해야 해요. 그러니 제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저와 이별해 주세요.”
“싫다고 했을 텐데요.”
“제발, 시안. 제발…….”
간절하게 읊조리던 레이첼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파혼을 거부하던 시안이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더 파혼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잠시 고민하던 레이첼은 숨겨두었던 마지막 카드를 꺼내기로 했다. 그녀는 시안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레이엄과 돌로라사는 연인이 되어야 해요. 그러려면 우리가 헤어져야 하고요.”
“…….”
“당신을 사랑하지만 제 욕심 때문에 아이들의 미래를 망가트릴 수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런 얘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믿습니다.”
“……네?”
믿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답이었다.
시안이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레이첼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당신은 예니스의 딸이 아닙니까. 게다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지요. 그런 미래를 봤다면 나를 밀어내는 게 당연합니다. 이해해요.”
두 아이가 원작에서 이어진다는 이유로 헤어져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이해받지 못할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태 아무에게도, 심지어 미래를 보는 라일러스에게조차 시안과 파혼해야 하는 이유를 털어놓지 못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당사자인 시안이 레이첼을 이해한다고 말해줄 줄은 몰랐다.
레이첼의 입술이 떨렸다.
“시, 시안.”
“나는 당신의 그런 점 역시 사랑하거든요.”
“그럼 파혼해주시는 건가요?”
“아뇨. 그래도 파혼은 안 됩니다.”
“시안……!”
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술을 모아 부드럽게 바람 소리를 낸 시안이 속삭였다.
“내가 시간을 달라고 했던 말, 기억합니까? 시간이 지나면 전부 괜찮아질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전부 괜찮아진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레이첼, 너무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 것만 생각해요.”
“하지만…….”
“쉬어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혹시 또 쓰러지지 않도록 몸조심하고요. 내게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으니까.”
“잠깐만요. 이렇게 가시겠다고요?”
레이첼이 몸을 일으키는 시안의 손을 꽉 붙잡으며 매달렸다.
시안은 기분이 좋은 듯 가볍게 웃으며 레이첼을 침대에 바르게 눕혔다.
“당신이 나를 붙잡아주니 기분이 무척 좋네요. 하지만 미안합니다. 당신은 쉬어야 하고 나는 가야 해요. 깨는 걸 보고 가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시안은 대관식 도중에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쯤 황궁은 갑자기 자리를 비운 황제 때문에 우왕좌왕 난리가 났을 것이다.
망설이던 레이첼이 시안의 손을 놓았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준 시안이 쪽, 레이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보고 싶을 겁니다. 내 생각 많이 해요. 나도 그러겠습니다.”
어쩜 저런 말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민망해진 레이첼이 이불로 입과 코를 가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씩 미소 지은 시안이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고,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건넸다.
“폐하께서 나오신 걸 보니 레이첼이 깨어난 모양이군요!”
“폐하, 밖에 마차를 대기시켜두었습니다. 어서 황궁으로.”
“원로회 귀족들이 아직 황궁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끼익, 닫히는 문 너머로 시안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레이첼의 안부와 앞으로 할 일을 전달하면서도 눈으로는 끊임없이 레이첼을 살폈다.
그런 시안의 애정이 숨 막히게 좋았다.
시안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분간 파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 걸까.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시안…….’
탁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레이첼은 다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
며칠 뒤.
황제가 된 시안에게 모든 권한을 인계한 벨윈더가 모처럼 캐롤 의상실을 찾았다.
캐롤이 반색하며 벨윈더를 맞았다.
“어머, 황태후 전하를 뵙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불러주시면 저희가 황궁으로 찾아뵀을 텐데요.”
“오랜만이야, 캐롤. 바쁜 일이 전부 마무리됐거든. 이럴 때 가게에서 직접 의상을 맞추면 기분 전환이 되니까.”
겸사겸사 거리의 분위기도 확인할 생각이었지만 벨윈더는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눈치 빠른 캐롤 역시 짐작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고.
재빨리 줄자를 준비해 온 캐롤이 벨윈더의 치수를 확인하며 재잘거렸다.
“어머, 황태후 전하는 치수가 전혀 변하지 않으셨네요. 의상실에서 보관하던 샘플을 참고해서 만들어도 되겠어요.”
“드레스 맞추는 게 오랜만이라 샘플을 새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원하신다면 얼마든 새로 해드리겠습니다. 사교 시즌이 끝나기도 했고 큰 주문이 많지 않아서 여유가 있거든요.”
“그래?”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의상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멜리타 이아콥스였다.
그녀는 먼저 와서 치수를 재는 벨윈더를 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예를 갖췄다.
“……황태후 전하를 뵙습니다.”
“멜리타 이아콥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그대도 기분 전환하러 의상실에 온 건가요?”
“아, 저는.”
멜리타가 뭐라 말하려는데 캐롤이 선수를 쳤다. 그녀는 벨윈더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멜리타에게 전부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멜리타 부인께서는 요즘 의상실에 직접 들러서 드레스를 맞추신답니다.”
“아니, 왜? 멜리타 부인 정도의 고객이라면 의상실이 저택으로 방문해야 하지 않나?”
“그게, 요즘은 전처럼 드레스를 맞추지 않으셔서요. 이번 달에도 겨우 한 벌 맞추셨답니다.”
“한 벌?”
“지난번에 멜리타 부인이 레이첼 백작께 무안을 준 일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레이첼 백작이 글쎄 선황후이신 베아트릭스 폐하를 도운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그것 때문에 이아콥스 가문이 부인에게 재정 지원을 끊은 거군.”
멜리타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 창피한지 얼굴을 붉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캐롤이 멜리타를 흘겨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비웃음이 걸렸다.
“사교 시즌이 끝났기에 그나마 다행이지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벨윈더가 고개 숙인 멜리타 쪽으로 걸어갔다.
교양 있는 벨윈더는 캐롤처럼 멜리타를 비웃는 대신 그녀를 걱정했다.
“멜리타 이아콥스, 마음고생이 많겠군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드레스 몇 벌을 선물해 줄 수 있기는 한데…… 그러면 부인의 자존심이 더 상하겠지요?”
“…….”
“역시. 그럼 드레스 대신 조언을 하나 선물하겠습니다.”
“기꺼이 듣겠습니다.”
“레이첼 백작을 찾아가서 다시 정식으로 사과하세요.”
“사, 사과라니요. 저는 그날 분명 사과했습니다.”
“날 바보로 아는 건가요? 그날 당신은 사과하지 않았어요. 아, 그래. 하긴 했지요. 레이첼 백작이 아닌 내게요.”
멜리타가 움찔 놀랐다.
은근슬쩍 넘어가긴 했지만 사실 그날 멜리타는 레이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을 나무라는 벨윈더에게 사과했을 뿐이었다.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벨윈더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멜리타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치를 떨며 레이첼을 피했다. 예비 황후가 된 레이첼을 축하하지도, 앓아누운 레이첼의 건강을 염려하는 서신도 보내지 않았다.
사교계의 꽃이 예비 황후에게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고, 누가 봐도 토라진 티가 났다.
“그러니 레이첼에게 은혜를 입은 베아트릭스 선황후 폐하도 스테판 공작도 당신에게서 경고의 의미로 등을 돌린 게 아닙니까.”
벨윈더가 멜리타의 어깨를 토닥였다.
“레이첼 백작이라면 아마 멜리타 그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주변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 생각, 잘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후 한동안 의상실 입구에 서서 부들부들 떨던 멜리타는 무얼 결심했는지 조용히 의상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다음 날, 프람 저택에 멜리타가 찾아왔다. 이 계절에는 보기 힘든 과일과 꽃바구니를 든 채였다.
라일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멜리타 부인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레이첼 백작의 몸이 좋지 않다고 하여 문병을 왔습니다.”
“그러십니까. 들어오십시오.”
프람 저택 응접실과 홀은 이미 꽃과 선물로 가득했다. 벌써 문병을 다녀간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멜리타는 자신이 늦은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라일러스는 멜리타가 가져온 꽃과 과일을 선물이 쌓여 있는 곳 한쪽에 내려놓았다.
“기껏 병문안을 와주셨는데 레이첼이 아직 자는 중이라서요. 급한 일이 있다면 바로 돌아가 보셔도 됩니다. 선물은 레이첼에게 전할 테니까요.”
“아, 아뇨. 급한 일이 없으니 깨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사용인들이 멜리타와 라일러스의 앞에 차와 간식을 내놓았고,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셨다.
먼저 입을 연 건 라일러스였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실 텐데 간단한 점이라도 보시겠습니까?”
“네? 점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밖에서 점을 보실 때처럼 복채를 내셔야겠지만.”
멜리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보겠습니다. 주교님께 점을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멜리타가 허리춤에 매달아둔 주머니를 꺼내자 짤랑짤랑, 금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라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돈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동시에 라일러스의 지팡이가 허공을 휘익 날아 멜리타의 머리를 때렸다.
따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