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129)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129)화(129/151)
‘난 그동안 뭘 고민했던 걸까.’
돌로라사의 취향이 원작과 같다면 아이는 지금의 그레이엄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그레이엄은 원작과 달리 세상을 비관하지도, 인류애를 잃지도 않았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따스하고 다정한 어른으로 자라겠지.
‘하마터면 원작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억지 연애를 강요할 뻔했어. 역시 물어보길 잘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을 억지로 맺어주는 건 레이첼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레이첼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레이첼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는 돌로라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원작 여주인공은 이런 순간마저도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황녀님.”
“네에…….”
“괜찮아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눅 드실 필요 없어요.”
“네……?”
돌로라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얘기가 믿기지 않는 듯 한참이나 눈을 굴렸다.
레이첼이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휘지우스처럼 냉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하, 하지만 보통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휘지우스가 아니라 아빠처럼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는걸요.”
“꼭 다른 사람들과 같은 취향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독특한 황녀님의 취향이 더 매력적인걸요. 응원하고 싶어져요.”
“응원이라고요? 레이첼 백작이, 저를.”
머뭇거리던 돌로라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스크림 가게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원작 그레이엄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겠어. 참 예쁘다.’
지금은 그레이엄 역시 돌로라사처럼 숨김없이 마음을 표현하지만 원작에서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거짓이 일상인 아빠와 상처받은 엄마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돌로라사의 순수한 따스함과 애정이 차갑게 얼어붙은 그레이엄의 마음을 녹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레이첼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너무 겁먹지 말고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세요. 황녀님은 휘지우스나 황제 폐하, 아트레이유와 그레이엄이 지켜 드릴 테니까요.”
“응! 그럴게요. 고마워요, 레이첼 백작. 정말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보호받으며 냉정하고 무뚝뚝한 미남들과 가까이 지내는 돌로라사라니. 그야말로 소설 속 여주인공 그 자체였다.
뿌듯한 마음이 레이첼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돌로라사는 재잘재잘 냉미남의 멋진 점을 늘어놓았다.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들이 가끔 보여주는 미소가 얼마나 가슴 떨리는지, 때로는 잔혹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시원한지 등등.
상기된 뺨으로 수다를 떠는 돌로라사에게 맞장구치며 레이첼도 무척 즐거웠다.
돌로라사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원작 소설 속 그레이엄의 매력과 정확히 같았으니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고 거리로 나온 돌로라사가 레이첼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 즐거웠어요! 아이스크림도 맛있었고, 이야기 나누기도 재미있었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황녀님께서 즐거워하셔서 더 즐거웠고요.”
“행복해요.”
돌로라사가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차 정거장 쪽으로 걸어가던 레이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께서도 제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맞다! 잊고 있었어요.”
제자리에 멈춰 선 돌로라사가 메고 온 가방에서 납작한 상자를 꺼내 레이첼에게 내밀었다. 아이의 얼굴이 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드리려고 했던 건데 깜빡 잊어버렸어요. 이런 길거리에서 선물이라니, 미안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어디서 주시든 상관없답니다. 감사히 받을게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지금 열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지금 꼭 열어보셔야 해요.”
반짝이는 돌로라사의 눈빛을 받으며 레이첼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달칵, 가벼운 소음과 함께 나타난 건 손수건이었다.
레이첼의 눈이 커졌다.
“와아, 세상에…….”
손수건에는 레이첼과 시안의 이름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캐롤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추며 훌륭한 자수를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돌로라사가 배시시 웃었다.
“마음에 드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손재주가 좋으신 줄은 알았지만 정말이지 깜짝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캐롤이 만든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해요.”
“그, 그 정도예요?”
“그럼요. 이런 손수건을 선물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에헤헤.”
기쁨에 몸을 꼬던 돌로라사가 말했다.
“사실 그거, 레이첼 백작이 아빠랑 결혼할 때 선물하려고 했던 거예요.”
“결혼…… 할 때요?”
“그런데 어제 레이첼 백작이 아빠랑 파혼하고 싶다고 해서……. 오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파혼하면…… 못 드리니까…….”
“아…….”
“그런데, 저기, 있잖아요, 레이첼 백작.”
레이첼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돌로라사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아빠랑 파혼 안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아빠랑 레이첼 백작이 파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욕심부린다고 혼내고 미워해도 괜찮아요.”
“황녀님…….”
“저, 저어. 그러니까. 저는.”
어려운 말을 하려는지 돌로라사는 한참이나 말을 더듬으며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몸을 낮춰 돌로라사와 눈을 맞춘 레이첼은 조용히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건지 돌로라사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용기를 냈다.
“……레이첼 백작이 제 엄, 엄마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 엄마가 되어주세요.”
엄마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돌로라사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엄마가 되어 달라고.’
자신에게 엄마가 생기길 바라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을 돌로라사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레이첼이 두 팔을 뻗어 돌로라사를 품에 안아주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되어 드릴게요. 파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엄마라고 불러주세요.”
“아…….”
돌로라사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기쁨과 행복의 눈물이 레이첼의 드레스를 적셨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저 정말 행복해요…….”
“제가 더 감사하죠. 저를 엄마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감사 인사가 오래도록 거리를 맴돌았다.
돌로라사와 저택으로 돌아온 레이첼은 제일 먼저 케이티를 찾았다.
“케이티! 케이티 어디 있어? 케이티!”
“저 찾으셨어요?”
급히 홀로 걸어 나오는 케이티를 보며 레이첼이 반색했다.
“케이티, 나 잠시 외출해야 하니까 황녀님을 부탁해.”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두 분 도련님이 황녀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그리고 드레스 좀 찾아줘. 예전에 캐롤 의상실에서 샀던 세트 의상 있잖아. 그거, 오늘 입어야겠어.”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두었답니다.”
케이티의 뒤쪽에 서 있던 시녀가 드레스 상자를 들고 무릎을 굽혔다.
놀란 레이첼이 케이티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서 차마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드레스 룸 깊은 곳에 넣어두라고 했던 드레스였다.
“……어떻게? 어떻게 알고 저걸 미리 꺼내뒀어?”
“라일러스 주교님께서 꺼내두라고 하셨습니다.”
“아빠가?”
몸을 돌리니 홀과 연결된 응접실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라일러스가 보였다.
그는 레이첼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그 아래로 그레이엄과 아트레이유의 것으로 보이는 엄지손가락이 쑥 나왔다가 사라졌다.
“맙소사.”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으면서도 레이첼의 입꼬리가 하늘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말을 잇는 케이티 역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저희 모두 오늘을 기다렸답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황제 폐하를 밀어내시기에 매번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두 분이 진심으로 맺어지게 되셨잖아요. 정말 기뻐요.”
“본의 아니게 답답하게 만들었네. 미안해.”
“무슨 말씀이세요. 레이첼 백작님이 이유도 없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오히려 제가 도운 것이 없어서 죄송하지요.”
“고마워. 늘 마음을 다해서 나를 응원하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기쁘다.”
“후후. 그럼 그동안 제 마음고생에 보답한다 생각하시고, 이제 드레스를 입으러 가시겠어요? 아주 아름답게 꾸며드리겠습니다.”
“부탁할게.”
“맡겨주세요.”
커다란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갈아입고 몸을 장식하는 동안 레이첼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안 생각뿐이었다.
얼른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겨 너무도 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그에게 해주고 싶었다.
황궁으로 달려간 레이첼은 시안을 찾았다.
아름다운 모습에 사람들이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안. 시안.’
지나가던 시종이 후원에서 그를 본 것 같다고 했고, 레이첼은 급히 후원으로 향했다.
눈이 녹지 않아 고즈넉한 후원 중앙에 시안이 서 있었다.
“시안.”
우아하게 솟은 정원수를 바라보던 시안이 기척을 느끼고 레이첼을 돌아보았다. 그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레이첼. 어서 와요.”
“시안……!”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달려간 레이첼이 시안에게 매달렸다.
레이첼을 품에 안으며 풀썩 눈 위로 넘어진 시안은, 레이첼과 마찬가지로 캐롤 의상실에서 맞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