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15)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15)화(15/151)
시안처럼 잠행하면 어떨까 했으나 결국 고개를 저었다. 잠행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레이첼이 어린 그레이엄을 데리고 남들 몰래 움직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레이첼은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했다.
“음……. 어쩌지? 오늘은 외출하기 어려울 것 같아. 엄마가 미안해.”
예상 못 한 사과였는지 그레이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아니에요, 엄마! 나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저기, 저는 그냥…….”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힘들 텐데 내색하지 않고 엄마를 배려하려는 아이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품에 그레이엄을 꼭 안아주었다.
“고맙고 미안해. 그레이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엄마…….”
“나중에 일이 다 마무리되면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자.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으러 가자. 알았지?”
“와앗! 꼭이에요, 꼭! 우리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요!”
에헤헤, 웃으며 품에 안기는 그레이엄이 사랑스러웠다.
“우리 오늘은 뭐 하고 놀까? 그림 그릴까?”
“응, 좋아요!”
그레이엄은 종이에 두 사람을 그렸다. 아주 예쁜 레이첼과 멋진 그레이엄이었다. 아빠는 왜 없어? 하고 물었더니 까먹었어요, 하고는 구석에 조그맣게 점을 찍었다.
한참 그레이엄과 노는데 사용인 하나가 응접실로 들어와 은쟁반을 내밀었다.
“마님. 시안 디카르시냐크 대공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대공이?”
레이첼은 서신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친애하는 엘로사 백작 부인.시안 아이사 디카르시냐크입니다.
정식으로 원로회의 부름을 받기 전에 개인적으로 뵙고 인사드렸으면 합니다.
백작 저택을 주시하는 눈이 많으니 보내드리는 마차를 타고 디카르시냐크 저택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타인의 시선과 미행을 따돌리는 솜씨가 훌륭해 제가 잠행에 이용하는 마차이니 안심하고 이용하셔도 됩니다.
추신. 저택 사용인 대부분을 해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들을 맡길 곳이 없다면 데려오십시오. 제 딸이 도움이 될 겁니다.]
서신을 접고 소리 없이 환호했다.
세상에, 시안이 먼저 그레이엄과 돌로라사의 만남을 주선할 줄이야!
그레이엄과 돌로라사의 연애 문제는 테오도르와 이혼하고서 천천히 생각하려고 했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게다가 답답해하는 그레이엄을 데리고 외출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안이 보내주는 마차라 미행이 따라붙을 염려도 없었고!
기분이 좋아서 어깨가 들썩였다.
곁에서 엄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레이엄이 입술을 삐죽였다.
“엄마는 나보다 종이가 좋아요?”
“응?”
너무 티 나게 좋아했나?
흠흠, 헛기침하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엄마 때문에 서운했구나?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그레이엄한테 좋은 일이 생겨서 기뻤거든.”
“저한테 좋은 일이 생겼다고요?”
“응. 아주아주 좋은 일.”
“그게 뭔데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레이엄이 눈을 깜빡였다.
레이첼이 맑게 웃으며 그레이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공 전하께서 우리를 초대하셨거든. 우리 그레이엄, 외출하고 싶어 했잖아. 비밀 마차를 타고서 몰래 대공 전하의 저택으로 놀러 갈 거란다.”
“대공 전하가 누군데요?”
“음…….”
미래에 네 장인어른 되실 분이란다,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엄청나게 잘생기고, 인품도 훌륭하고, 작위도 높으신 분이 계셔. 아마 우리 그레이엄 마음에도 쏙 들 거야.”
찬사 섞인 칭찬에 그레이엄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들뜬 레이첼은 알아채지 못했다.
엘로사 백작 저택은 백작 저택치고는 무척 크고 아름다운 편이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백작 저택일 뿐. 디카르시냐크 대공 저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공의 저택은 저택이라기보다 성에 가까웠다.
“와아, 그레이엄. 저것 보렴. 우리 집보다 훨씬 더 크다.”
“네에.”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레이첼은 그레이엄과 돌로라사를 만나게 한다는 사실에 들떴지만 그레이엄은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레이엄, 어디 아프니? 표정이 안 좋아.”
“괜찮아요.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요.”
“그, 그렇구나.”
네 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리자 시안이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엘로사 백작 부인.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안 아이사 디카르시냐크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레이첼은 이어서 시안의 곁에 서 있던 소녀에게도 무릎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레이첼 엘로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돌로라사 디카르시냐크입니다. 아버지를 잘 부탁드려요.”
정중하고 예의 바른 인사였다. 역시 원작 여주인공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돌로라사는 시안을 닮은 까만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아름다운 아이였다. 두 볼이 통통한 것이 귀엽고 깜찍해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돌로라사를 향해 활짝 웃는 레이첼을 보며 그레이엄은 볼을 부풀렸다.
저 꼬맹이는 뭔데 이렇게 쉽게 엄마를 웃게 하는 걸까.
저가 더 꼬맹이라는 생각은 못 하고서 그레이엄은 돌로라사를 질투했다.
겨우 종이로 엄마를 웃게 했던 대공이라는 사람도, 돌로라사라는 꼬맹이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빠 테오도르와 달리 우아하고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있었다. 사려 깊고 아름다웠다.
아직 어린 그레이엄의 눈에도 그는 멋지고 근사한 사람이었다.
눈앞에 선 돌로라사도 보았다. 마샤는 그레이엄을 앉혀 놓고 어린애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는데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저 꼬맹이였다. 귀엽고 깜찍하게 생겼는데 차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
‘엄마가 나보다 대공이나 꼬맹이를 더 좋아하면 어쩌지?’
무서웠다. 두려웠다.
엄마에게 최고는 그레이엄 자신이어야 했고, 엄마를 웃게 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엄마가 다른 사람을 좋아해 버리면 자신은 버려질 게 뻔했다.
아빠도 그랬으니까.
시안의 시선이 뚱한 그레이엄에게 닿았다. 그는 아이를 나무라는 대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가 그레이엄 엘로사구나.”
“네에.”
그레이엄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시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네 살이라고 들었는데 눈동자가 깊다. 미성숙한 아빠를 보며 자라서일까.’
시안은 그레이엄에게서 돌로라사를 보았다.
돌로라사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었지만 말과 행동이 청소년 같았다. 사람들은 기특하다고 칭찬했지만 시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의 빈자리가 아이를 너무 일찍 철들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딸과 처지가 비슷한 그레이엄이 안쓰러웠다. 힘든 상황을 꿋꿋하게 버티며 자라준 아이가 대견하기도 했다.
시안은 몸을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아빠를 대신해서 엄마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레이엄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시무룩하던 그레이엄의 눈동자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힘없이 굽어졌던 어깨가 반듯하게 펴졌다. 아이는 시안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알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레이첼은 귀여운 대답에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시안과 그레이엄이 워낙 진지해서 간신히 눌러 참았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눈빛을 교환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그레이엄이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렇게 오래 눈을 맞춘 것이 신기해서 레이첼은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먼저 눈을 돌린 건 시안이었다.
“너도 인사하렴, 돌리.”
“안녕, 그레이엄. 난 돌로라사야.”
깜찍하고 담백한 인사에 레이첼이 미소 지었다.
풀어졌던 그레이엄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
“그레이엄? 너도 인사해야지.”
“……그레이엄 엘로사예요.”
예의와는 거리가 먼 인사였다.
레이첼은 신분이나 예의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시안과 돌로라사에게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귀족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큰일을 치렀을지도 몰랐다.
“그레이엄, 오늘 엄마는 대공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해. 잠깐 돌로라사 공녀님과 기다려줄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네?”
그레이엄의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아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 엄마랑 같이 놀러 온 거 아니었어요?”
“엄마랑 같이 놀고 싶었어?”
그레이엄은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 동시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찡했다.
어쩐다.
몸을 낮춰 그레이엄과 눈을 맞춘 레이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레이엄에게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았어. 그래서 돌로라사 공녀님을 소개해 주려고 했던 거거든. 엄마가 잘못 생각한 거니?”
“친구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완고하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돌로라사와 그레이엄이 연인이 되는 건 온전히 두 사람이 원해서여야 했다. 아무리 원작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대도 억지로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직 때가 아닌지도 모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엄마 마음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
얼른 그러자고 하려던 그레이엄이 입을 벌리고 굳어졌다.
그레이엄은 대공 저택으로 오는 내내 들떴던 레이첼을 떠올렸다. 종이 쪼가리를 보면서 환하게 웃던 모습도 떠올렸다.
엄마는 대공과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나면 엄마가 아주 행복해할 것 같았다.
“으…….”
작은 손으로 꼬옥 주먹을 쥐었다.
엄마가 기뻐하는 일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레이엄은 엄마를 사랑했고, 사랑하면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대공 전하랑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으니까……. 기다릴게요.”
“괜찮겠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돌로라사가 방긋 웃으며 축 늘어진 그레이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레이엄은 제가 돌볼 테니까 두 분은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고맙다, 돌리.”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레이엄은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돌로라사에게 이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레이첼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돌로라사의 손을 쳐냈다.
돌로라사가 내쳐진 손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성질이 참 더럽구나?”
“……몰라.”
“그러면 엄마가 싫어해.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
맞는 말이었다.
그레이엄은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