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53)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53)화(53/151)
시안을 응접실로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고맙습니다.”
짧게 인사를 마친 시안이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곤란한 얘기인지 그는 안으로 들어오고서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먼저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가 없어 우물거리는데 시안이 응접실 한쪽에 시선을 던졌다.
“돌리가 두고 간 물건인 모양이네요.”
“네? 아.”
응접실 한쪽 탁자에 놓인 건 돌로라사가 두고 간 필기구였다. 깃펜 끝에 깜찍한 토끼 인형이 달려 있었다.
‘도와달라고 하신 걸 보면 공녀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인데 큰일이네. 나 때문에 괜히 공녀님 생각이 더 났으면 어쩌지?’
레이첼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미리 치워두었어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아뇨.”
손을 들어 레이첼을 말린 시안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는 오히려 돌리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기쁜걸요.”
그렇게 이야기한 시안은 응접실로 들어온 뒤 처음으로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돌리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프람 저택에서 아이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처음 저택에서 놀다 가신 날에는 대공 전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그레이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요?”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시안의 눈이 커졌다.
슬픈 기색이 사라진 것이 반가워서 레이첼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한 것, 그림책, 작고 귀여운 것, 토끼, 여름, 파란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하하.”
돌로라사가 알려줬던 ‘시안이 좋아하는 것’을 늘어놓자 시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에 레이첼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대공 전하께서 좋아하실 것 같지 않은 것들을 알려주시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셨군요.”
“돌로라사 공녀님의 영향을 받으신 건가요?”
“맞습니다. 달콤한 것과 예술 작품집은 원래 좋아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돌리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겁니다. 돌리와 어울리는 것들, 돌리가 생각나는 것을 곁에 두다 보니.”
“역시. 대공 전하라면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보던 책을 그림책이라고 표현했다니, 돌리답네요.”
“사랑스러운 분이세요.”
“고맙습니다. 편견 없이 돌리를 사랑스러워해 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레이첼 백작에게는 참 감사한 일이 많아요.”
편견?
의외의 단어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공녀님이 자신을 예뻐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걸까?’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차를 마신 시안이 레이첼과 눈을 맞췄다.
“도움을 부탁드린다고 했었지요. 사실은 제가……. 돌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에 손목이 부러진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던 그레이엄을 떠올렸다.
‘대공 전하가 공녀님에게 한 거짓말이라면 분명 선의의 거짓말이었을 거야. 그게 문제가 된 걸까? 그래서 아까 티 나게 거짓말을 한 그레이엄을 탐탁지 않아 했던 거고.’
잠시 뜸을 들인 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돌리는 제가 아닌 황제 폐하의 딸입니다.”
“……네?”
“내내 숨겨왔던 일인데 어째서인지 폐하께서 사실을 밝히시더군요. 곧 사교계에도 이야기가 퍼질 겁니다.”
시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돌로라사의 비밀을 설명했다.
레이첼은 놀라서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사람들이 공녀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이유가 이거였어. 결혼도 하지 않은 시안이 어느 날 갑자기 출신도 모르는 아이를 데려와 공녀로 삼았던 거니까.’
돌로라사 이야기를 하며 따스하고 부드럽게 미소 짓던 시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짜 자기 딸도 아닌 아이를 그토록 사랑하며 키우다니, 대공 전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시안이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돌리가 무척 놀랐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 당연하지요. 제게 화를 냈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습니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어제저녁부터라니 큰일이네요. 벌써 점심이 지난 시간인데…….”
“제가 하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럴 만해요. 하지만 너무 걱정이 됩니다. 돌리가 백작을 무척 좋아했으니 백작이 무언가 말해주면 듣지 않을까 싶어요.”
“으음.”
“……부탁입니다. 돌리가 저를 용서하고 저와 함께하는 건 바라지 않아요. 부디 돌리가 방 밖으로 나와서 끼니만이라도 챙길 수 있도록……. 아이를 설득해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세요. 두 분이 서로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데, 당연히 함께하셔야지요.”
시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아빠에게 주겠다며 케이크 모양과 장식을 고민하던 돌로라사를 떠올렸다.
‘공녀님이 대공 전하를 싫어할 리가 없어. 선물을 준비하는 내내 얼마나 행복해하셨는데. 그냥, 놀라고 서운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뿐이야.’
레이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공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편지를 써드릴 테니 공녀님께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 *
한편 테오도르는 제인이 살던 로튼 스트리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트레이유의 생일 연회 이후로 벌써 몇 달이 흘렀다. 혹시 테오도르나 제인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호사가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연노란 꽃이 그려진 잡화점 기둥 뒤에서 제인이 살던 집을 살폈다. 며칠째 입구를 노려보았지만 누가 드나드는 흔적은 없었다.
‘돈 많은 부자가 집을 샀다더니 방치해 놓은 모양이야. 제인은 어디로 간 거지? 나한테서 뺏어간 돈 내놓으라고 해야 하는데.’
줬던 돈을 뺏는 건 훌륭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인을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라 악마로 기억하는 테오도르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돈을 돌려받으면 길드에 가야지. 어머니 소식도 수소문하고, 레이첼에 대한 정보도 모을 거야. 망할 안대 쓴 놈도 거기 가면 만날 수 있을 테고.’
한참이나 집을 노려보고 있으니 덩치가 큰 여자 하나가 테오도르에게 다가왔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거기 샌님같이 생긴 양반!”
“어? 나, 나를 부른 거냐?”
테오도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아까부터 여기서 뭘 하는 게요? 동네 사람들이 신경 쓰인다고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도둑놈이면 썩 꺼지고, 도둑놈 아니어도 썩 꺼지시오!”
“도둑놈이라니! 천한 것이!”
“뭬야? 천한 것?”
여자가 굵직한 빗자루를 치켜들자 테오도르가 얼른 말을 바꿨다.
“처, 천한 것이 혹시 지나가나 감시한 것이다! 저 집이 그 뭐냐. 잘생긴 백작과 불륜을 저지른 여자가 살았던 집이라고 해서!”
“아. 그걸 구경하러 온 양반이셨구만. 이제 그 여자 여기 안 사는데. 남들 다 구경할 때 뭐 하고 이제야 오셨소?”
여기 안 산다니, 예상했던 사실이지만 막상 얘기를 들으니 기운이 쭉 빠졌다.
시무룩하게 고개 숙인 테오도르를 보며 여자가 혀를 찼다.
“쯧쯔. 다음부터 구경거리가 생기면 빨리빨리 다니시오.”
“혹시 그 악마, 아니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느냐?”
“이사 갔소.”
“어디로 갔는지를 물은 것이다.”
“알려주면, 뭘 줄 거요?”
“뭐, 뭘 달라고? 줄 게 없는데?”
“에잉, 그럼 볼일 없소. 썩 꺼지시오!”
당장 내일 밥 사 먹을 돈을 걱정하는 처지에 줄 게 있겠냐!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참고 타운 하우스로 돌아갔다.
테오도르는 베렝겔라의 물건 중에서 여자가 마음에 들어 할 것이 없나 찾기 시작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시안은 제일 먼저 돌로라사의 안부를 챙겼다.
닉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인데 걱정입니다.”
“……그래. 내가 직접 가볼 테니 돌로라사의 방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발소리를 죽여 돌로라사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닉이 놓아둔 쟁반과 식은 수프가 놓여 있었다. 접시와 숟가락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시안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돌리, 아빠 왔어.”
“…….”
방문에 귀를 대보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방문 바로 앞에 누군가 앉아 있는 기척이 났다. 무릎을 세우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웅크려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돌리, 왜 거기 앉아 있어. 바닥 차가울 텐데.’
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내가 오길 기다린 걸까? 그렇다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목이 메서 큼큼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돌리. 아빠가 너무 늦었지?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미안해.”
눈을 가리고도 길드의 정보원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 감각이 예민하다는 것은 때로 고통스러웠다. 문 너머에서 딸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느껴질 때는 더더욱.
입술을 꾹 물었다가 문 아래 틈으로 레이첼이 준 편지를 끼워 넣었다.
“그레이엄의 검술 훈련을 하는 날이라 프람 백작 저택에 다녀왔어. 레이첼 백작이 너한테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더라. 어떤 내용인지 나는 보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읽으렴.”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문 너머에서 바스락바스락, 접힌 종이 펴는 소리가 들렸다. 흑, 눈물 삼키는 소리도 났다.
대체 뭐가 적혀 있었던 걸까.
가슴이 아파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돌리.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네가 너무 어려서 말하지 못했고, 그 뒤에는 언제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하지 못한 거야.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
“처음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나중에는. 그래. 폐하의 말씀대로 네 진짜 아빠가 되고 싶은 욕심에 네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정말 미안해.”
긴 사과에도 돌로라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히 이 문 너머에서 울고 있는 게 확실한데. 시안의 말을 듣고 있는 게 분명한데.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더 애절해졌다.
“……돌리. 아빠가, 아니 내가 뭘 해주면 좋겠니? 뭐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제발 뭐든 말해주렴. 네가 계속 이렇게 굶으면 마음이 너무 아파.”
“…….”
“황제 폐하께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혹시 내가 보고 싶지 않다면 저택을 나가마. 네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다면, 굶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면 아빠는, 아니 나는…….”
뭐든 괜찮아. 뭐든 상관없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시가르에게 보내는 일 따위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돌로라사와 떨어져 사는 삶 따위 시안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돌로라사가 원한다면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것도, 아이 없는 삶을 사는 것도 견딜 수 있었다.
죽여버리라는 시가르의 명령을 어기고 작은 돌로라사를 품에 안아 든 순간부터 돌로라사는 시안의 하나뿐인 딸이었으니까.
돌로라사의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도하듯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시안은 여신 예니스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한 번도 신에게 기도 따위 올려본 적 없었으나 지금만큼은 아주 간절히 바랐다.
‘여신 예니스 님. 제발 제 딸 돌로라사를 돌봐주십시오.’
잠시 후, 기도에 화답하듯 돌로라사의 방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