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59)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59)화(59/151)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시안과 스테판이 연무장에 마주 섰다.
레이첼과 그레이엄이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히죽거리는 스테판을 보며 시안이 덩달아 피식 웃었다.
“나랑 대련하는 게 그렇게 좋아?”
“어.”
“진작 해줄 걸 그랬네. 나랑 대련하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이 눈치 없는 대공 전하야. 대련이 좋은 게 아니라……. 에라이, 관두자. 야, 꼬맹이!”
스테판의 외침에 그레이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공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잠시 후 아이가 힘차게 깃발을 내렸다. 펄럭, 소리와 함께 스테판이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압!”
크게 검을 휘둘러 시안의 정수리를 노렸다. 시안의 저택에 찾아왔던 날 밤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때 시안은 가볍게 몸을 틀어 스테판의 공격을 피했다.
이토록 밝은 곳에서, 이토록 정직한 공격쯤이야 시안은 눈감고도 튕겨내고 반격할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미려하고 아름다운지 스테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움직임을 보며 탄성을 터트릴 레이첼의 모습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시안은 스테판의 예상을 벗어났다.
스테판의 검이 시안의 정수리에 닿기 직전 멈췄다. 시안의 머리카락 몇 올이 검에 잘려 흩어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그레이엄이 깃발을 들어 올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어……. 스, 스테판 공작 각하 스, 승리……인가……?”
시안을 제외한 모두가 놀라 눈을 끔뻑였다.
스테판의 검이 떨렸다. 그가 시안의 몸에 이토록 검을 가까이 가져다 댄 건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 너 뭐 하는 거냐?”
“보면 몰라? 졌어.”
“왜 안 피하는데! 대결한다는 놈이 검도 안 뽑고 피하지도 않고 뭐 하는 거야!”
“빚 갚으라며. 이기고 싶었던 거 아냐? 검 뽑으면 너한테 져줄 자신 없어서.”
“……와, 뭐 이런 재수 없는 놈이 다 있지?”
“이제 됐어?”
“되긴 뭐가 돼? 너 같으면 됐겠냐? 구경꾼 모아놓고 이렇게 이기는 건 아무 의미 없는 거 몰라?”
“그래서 지금 해도 되겠냐고 물었잖아. 괜찮다며.”
“하아.”
스테판이 시안을 이기고 싶어 한 건 진심이었다.
상단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인 스테판은 여행 중에 만나는 웬만한 도적 떼쯤은 혼자 가뿐히 상대할 만큼 실력자였다.
하지만 몇 년을 덤벼도 시안은 이기지 못했다. 그의 실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밤이든 낮이든, 자고 있든 깨어 있든, 그가 긴장을 풀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통이 났고, 오기가 생겼고, 이기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실력으로 꺾고 싶었던 거지, 검도 뽑지 않는 녀석한테 졌다는 소리를 듣는 건 스테판이 바라던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대련은 레이첼에게 시안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시작한 거였다.
스테판은 시안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주제에 연애에는 무지몽매한 친구가 답답했다.
“이기고 싶어서 대련하자고 한 거 아니야. 레이첼 백작 앞에서 네 멋진 모습 보여주라고 자리 만든 거라고.”
“……뭐?”
시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자에 앉은 레이첼을 흘끗 곁눈질했다.
“……그런 의도인 줄 몰랐네.”
“망할 놈. 너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라.”
“으음. 그래. 쓰레기통에 버린 선물 다시 주워서 보관할게.”
“뭐, 야. 그걸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야 이 나쁜……!”
험한 소리를 쏟아내려는데 시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의 입에서 와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스테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진짜 어마어마하게 봐준 거였잖아?’
몸을 낮추고 뒤로 물러나며 스테판에게서 벗어난 시안이 검을 꺼냈다. 그의 검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며 연무장 위를 누볐다.
시안은 유연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동시에 마주 선 스테판에게 서늘한 기운을 뿜었다.
시안이 적을 상대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상대는 동작에 눈을 빼앗기고 기운에 짓눌려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검이 스테판의 주변을 누볐다. 팔과 다리, 가슴과 등 부근의 훈련복이 길게 베였지만 몸에는 긁힌 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얼마나 섬세하게 움직이며 힘 조절을 해야 하는지 아는 스테판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빈틈이 없어 반격하거나 검을 막지도 못했다.
시안의 검은 마지막으로 스테판의 목을 노렸다.
스테판의 등 뒤에 서서 그의 목에 바짝 검을 들이댄 시안이 웃었다.
“움직이지 않아 줘서 고맙다. 오랜만에 크게 움직일 수 있었어.”
“……시끄러워.”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었던 거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않았다.
그레이엄이 깃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스승님, 아니 시안 대공 전하 승리!”
스테판이 씩 웃었다.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뿌듯했다.
레이첼이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입까지 벌리고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이엄이 돌로라사를 만나러 가고 시안과 스테판, 레이첼이 대공 저택 응접실에 모여 앉았다.
레이첼은 내내 시안의 검술을 칭찬했다.
“솜씨가 대단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멋지셨습니다. 저는 그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어요.”
“영광으로 생각해. 처음 본 대련이 시안의 대련이라니, 엄청난 행운이라고. 시안이 대련하는 거 구경하려는 사람이 수도에 널렸거든. 그것도 티켓 팔면 불티나게 팔릴걸.”
“제가 엄청난 장면을 본 거네요.”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영광이라니요. 레이첼 백작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레이첼 백작 앞에서 검을 휘둘러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까요. 파티에서 베렝겔라를 쫓아낸 일로 백작의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정말요?”
처음 듣는 얘기에 레이첼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시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가르의 시험에 단정한 대답을 내놓고 베렝겔라의 잘못을 차분하게 지적하는 레이첼의 모습은 귀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남편의 불륜을 겪고 일어선 레이첼에 대한 호기심과 소문이 사교계를 가득 메웠다. 그녀가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파티가 시안의 파티였던 덕에 소문은 더 무성해졌다.
그런 레이첼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시안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를 독점한 것만 같아서.
겸손하게 고개 숙인 레이첼과 자상하게 레이첼을 바라보는 시안 사이에서 스테판이 입술을 삐죽였다.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말하는 걸 잊어버렸는데, 나 너 때문에 저택 더 사게 생겼어.”
“나 때문이라면……. 지난번 파티에서의 일 때문인가.”
“그래. 그거 때문에 불려가서 실컷 혼나고 저택 한 채 더 사드리기로 했다니까. 벌써 열세 번째 저택이라고! 이게 말이 돼?”
이야기를 듣던 레이첼은 시안의 검 솜씨를 봤을 때만큼이나 눈을 크게 떴다.
‘저택이 열세 채라니! 이아콥스 가문이 부자라더니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부럽다, 부동산 재벌.’
갑자기 스테판의 얼굴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것만 같았다.
시안이 쓰게 웃었다.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 괜찮으면 그 저택 대금 내가 치러줄게.”
“유지비도 네가 내.”
“그래, 유지비도.”
흔쾌한 대답에도 스테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놈의 저택, 대체 언제까지 사야 하는 거지.”
의외의 반응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테판은 저택이 늘어나는 걸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작 각하. 왜 한숨을 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택이 많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저택 많은 거 하나도 안 좋아. 세금도 많이 내고 유지비도 많이 든다고.”
“저택 임대 금액에 세금이나 유지비를 포함하면 안 되나요?”
“임대할 수 없는 저택이니 문제지.”
“임대를 못 한다고요? 그런 저택을 왜 열세 채씩이나.”
“사정상 예비로 사두는 저택이라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거든. 그래서 임대를 못 해. 처음 저택을 산 뒤로 한 번도 안 썼고, 앞으로도 안 쓸 것 같기는 하지만.”
충격적인 얘기였다.
건물이 열세 채나 있는데 쓰지도 않고 임대도 못 하고 세금과 유지비만 내야 한다니! 곤란해할 만했다.
레이첼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평범한 부동산 재벌이 아니었구나.’
자세한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스테판의 말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 쓰려고 예비로 사두는 저택이라면 한두 채로도 충분하잖아. 심지어 한 번도 안 썼다며? 그걸 왜 계속 사야 하는 거지? 설마…….’
생각을 마친 레이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혹시 심리적인 안전 장치가 필요한 상황인가요?”
“……뭐?”
스테판이 시안을 돌아보았고 시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길래 내가 말했잖아. 똑똑한 사람이라고.”
“그냥 과장인 줄 알았어.”
“내가 ‘그냥 과장’해서 누군가를 칭찬하는 사람이었나?”
“아니지. 젠장. 아닌 거 아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 놀랍네. 별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심리적 안전 장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낸 거지?”
“레이첼 백작. 왜 심리적 안전 장치 얘기를 꺼냈는지 알려주십시오. 아무래도 지금 백작이 떠올린 방법이 스테판에게는 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
두 남자의 시선이 모이자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리적 안정이 필요해서 저택을 사는 거라면 저택을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들에게 단기로 빌려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스테판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꾹 참는 눈치였다.
“빌려주라고? 왜?”
“저택을 빌려주고 돈을 받으면 세금이나 유지비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돈 걱정이 사라지면 심리적 안정이 찾아온다는 거야?”
“당연히 아닙니다.”
레이첼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시안과 스테판이 대련했던 연무장에는 어느새 디카르시냐크 대공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이 나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의지할 장소가 필요한 거라면, 그 장소가 안전할수록 마음이 더 편할 거예요.”
“……그렇겠지.”
실제로 베아트릭스는 크고 아름다운 저택보다 은밀하고 견고한 저택을 더 많이 사들였다.
“기사 한둘이 지키는 저택보다는, 여럿의 기사가 지키는 저택 쪽이 좀 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스테판의 눈이 커졌다.
맞다. 이아콥스 가문에서 산 열두 채의 저택에는 문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가 고용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저택에 그보다 많은 기사를 고용하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저택에 누군가 살게 된다면.
최소한 두 명보다는 훨씬 많은 기사를 고용할 수 있고, 기사의 수가 늘어나면 베아트릭스 황후가 그곳을 ‘안전하다’고 느낄 가능성도 컸다.
문제는 임대였다.
스테판이 이마를 짚었다.
“훌륭한 생각이야. 문제는 아까도 말했지만 임대야. 언제 쓸지 모르는 저택을 어떻게 남에게 빌려주냐는 거지.”
“그래서 ‘단기 임대’를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단기 임대? 뭐야, 그 이상한 건.”
생소한 단어에 스테판이 고개를 갸웃했고 레이첼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