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62)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62)화(62/151)
레이첼은 단단하게 받쳐주는 손에 의지한 채 밭은 숨을 내쉬었다.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나야말로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는 안 됐는데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고개를 저었다. 시안이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시안은 레이첼을 부축해 조심스럽게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바닥에 무릎을 대며 몸을 낮췄다.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레이첼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안은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레이첼은 시안의 시선을 피한 채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시안이 레이첼에게 주머니를 돌려주며 말했다.
“이런 얘기,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백작이 어떤 마음일지 이해합니다.”
“이해…… 하신다고요?”
“저 역시 그 아름다운 물건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니까요.”
“아…….”
천천히 고개를 든 레이첼이 시안과 눈을 맞췄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주머니 안에 든 유리 나무들이 부딪히며 잘그락잘그락 맑은 소리를 냈다.
‘대공도 이것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구나…….’
동질감, 측은함, 반가움 같은 감정들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안의 모습에 가슴이 찡했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가가 뜨끈해졌다.
나쁜 짓을 벌인 건 테오도르라는 걸 알면서도, 시안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레이첼의 장밋빛 입술이 달싹이더니 물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왜……. 왜 테오도르를 잡아가지 않으시나요?”
시안의 눈이 커졌다.
그럴 만도 하다. 이 순간에 레이첼이 자신을 비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지금 그 얘기는 듣지 못한 것으로 해주세요.”
“미안합니다.”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 곧고 단정한 사과에 레이첼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이 차오를 것도 같았다.
시안은 손을 뻗어 주머니를 움켜쥔 레이첼의 손끝을 부드럽게 당겨 쥐었다.
“구차한 변명 같겠지만 레이첼 백작 때문이었습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백작이 지금 같은 얼굴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제가 테오도르를 잡아가면 전 남편에게 미련이 남은 당신이 지금처럼 슬픈 얼굴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죄 없는 자를 잡아갔다며 나를 원망할까 봐 두렵기도 했고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시안이 하는 일이니 당연히 정치적인 계산이 얽혀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슬픈 얼굴을 할까 봐 그랬다니 설마 진짜일까? 그건 너무…… 다정한 이유잖아.’
방금까지 테오도르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했던 가슴이 콩닥콩닥 간지럽게 뛰었다. 시안에게 붙잡힌 손끝이 뜨거웠다.
자신이 시안을 보며 설렌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이첼은 화들짝 놀랐다.
‘안 돼. 미쳤어, 레이첼? 지금 누구한테 설레는 거야? 이 사람은 그레이엄의 장인어른이 될 사람이라고!’
얼른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시안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미안합니다, 레이첼 백작.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테오도르를 잡아가라면 잡아갈 테고, 이대로 당신 곁을 맴돌게 두라 하면 둘 겁니다.”
“대, 대공 전하.”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제게 원하는 것을 당신 목소리로 직접 들려주십시오.”
애써 가라앉히려던 설렘이 시안의 목소리, 눈빛, 체온과 열기에 커다랗게 부풀었다.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른 입을 가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돼, 레이첼. 대공은 원래 누구에게나 상냥한 사람이야. 착각하지 마!’
“레이첼.”
“테, 테오도르를 붙잡아주세요.”
얼른 시안이 하려던 말을 끊어버렸다. 감히 대공 전하에게 하기에는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자를 동정조차 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자가 제 눈앞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길 바라요.”
“……그자의 반란 혐의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자가 저지르지 않은 짓으로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요. 괜찮지 않을 것 같으신가요?”
“예.”
단호하게 답한 시안이 제 손안에 든 레이첼의 손끝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당신 생각보다 여리고 상냥하니까. 나도 모르게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가끔은 질투가 나서 돌아버리겠다 싶을 만큼.”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잘 들리지 않았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크게 숨을 내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이 원한다면 당장 테오도르를 붙잡아 황제 폐하의 발치에 꿇어 앉히겠습니다.”
그제야 레이첼이 안도하며 어깨를 내렸다. 그녀는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무척 안심이 됩니다. 이제 테오도르 때문에 속 썩을 일은 없겠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시안이 빙그레 웃으며 붙잡은 레이첼의 손을 끌어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이 인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는 것이 시안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레이첼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 *
베아트릭스가 정원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기다리던 스테판이 활짝 웃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평소의 조카 같지 않은 바른 인사에 베아트릭스는 의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눈을 흘겼다.
“……절대 걸음 하는 법 없던 황궁에 찾아온 것도 부족해서 인사까지 깍듯하게 한다니. 이번에는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야.”
“잘못이라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스테판은 눈 밑이 조금 검었으나 즐거워 보였다.
“좋은 일이 있어 황후 폐하께 전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좋은 일?”
좋은 일이라는 말에 베아트릭스는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에게 일어날 좋은 일은 두 가지뿐이었다. 시가르가 죽거나, 시가르가 자신을 황후의 자리에서 쫓아내거나.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이상 둘 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베아트릭스는 따라온 시녀들을 물리고 스테판과 마주 앉았다.
“말해 봐라. 그 좋은 일이라는 게 뭔지.”
“부탁하신 저택을 마련했습니다. 전원생활을 즐기기 좋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길이 험해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에요. 곧 저택 풍경과 구조를 그려 올리겠습니다.”
흐리게 미소 지었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받아주는 조카에게 늘 고맙고 미안했다.
시가르의 허락 없이 황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라는 걸 알면서도 베아트릭스는 꿈을 꾸었다. 시가르에게서 도망치는 꿈.
그 잔인하고 두려운 자의 손아귀를 벗어나고 싶었다. 시가르에게 반항하는 순간 자신은 물론 이아콥스 가문 전체가 끝장인 걸 알기에 매번 꿈에 그칠 뿐이었지만.
이렇게 저택을 사들이고 그곳에 숨어 사는 상상을 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탈의 전부였다.
“고맙구나. 매번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아.”
“아직 안 끝났습니다. 오늘은 드릴 것이 하나 더 있어요.”
스테판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아콥스 가문을 수호하는 기사의 수를 적은 보고서입니다.”
“……이렇게 많은 기사를 고용했다는 말이니? 황제 폐하께서 반란을 꾸미는 게 아니냐 물으시면 어쩌려고…….”
“그래서 폐하께서 아시기 전에 먼저 보고를 올리려는 겁니다. 그동안 사 모은 저택으로 임대업을 시작할 예정이라서요. 저택을 지켜줄 기사들이 필요해졌습니다.”
“저택을 지키는 데 필요한…….”
시가르와 함께 사는 베아트릭스는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단박에 스테판의 말속에 숨은 뜻을 이해했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가 늘어났다는 것은 베아트릭스의 꿈속에서 그녀를 지켜줄 기사의 수가 늘어났다는 의미였다.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테판, 너.”
“처음에는 쓸모도 없는 저택을 늘려달라는 부탁이 싫었습니다. 귀찮았고, 유지비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번 임대업을 준비하면서 감히 황후 폐하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폐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마음만은 부디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이 되다마다.
새로운 저택이 생기면 새로운 지하실과 벽장 등 저택 구석구석에 숨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상상 속의 시가르가 자신을 찾아내기 전까지, 베아트릭스는 잠시 숨을 쉬었다.
거기에 자신을 지켜줄 상상 속 기사들이 더해졌다니 어떻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렸을 때는 이모님께서 황후 폐하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마음만이라도 폐하를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
“용서하세요. 그때 이모님의 결혼을 축복했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베아트릭스가 시가르와 결혼한 것은 스테판이 열다섯 살 때였다.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그는 제 이모의 결혼 소식에 진심이 담긴 축하를 건넸다.
시가르가 어떤 놈인지 몰랐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 아들뻘 되는 사내의 아이를 낳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면서도 늘 미안했다. 매번 베아트릭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임대업을 준비하고 기사를 고용하며 스테판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베아트릭스의 마음을 이해했다.
베아트릭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이런 이모라서. 순수했던 네 축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혼을 해야 했는데.”
“미안해하지 마세요. 제일 힘든 건 이모님이시잖아요.”
“고맙다, 스테판. 정말 고마워.”
스테판은 몸을 웅크리고 연신 감사와 사과를 쏟아내는 베아트릭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감동하실 줄은 몰랐어. 레이첼 백작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는걸. 시안이 질투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질투하는 시안의 얼굴을 떠올린 스테판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질투? 그 시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