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72)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72)화(72/151)
레이첼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숲 지기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슬프게도 시안은 레이첼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숲 지기의 목소리가 심장을 뜯어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젊은 남자가 숲 지기 숙소로 찾아왔소. 숲속 깊은 곳에 뭘 버려야 하니 안내해달라더군. 수레에 짐을 싣고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누가 봐도 실린 짐이 사람 같았지.”
“그래서 나중에 신원을 확인해 본 겁니까?”
시안의 질문에 숲 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프람 저택에서 일한 적이 있었거든. 남자가 돌아간 뒤 얼굴을 확인했는데 그분이셨던 거야. 그날 어찌나 울었는지. 다른 숲 지기들을 불러 이렇게나마 무덤을 만들었지.”
“성과 영지의 주인이 아니었습니까. 어쩌다 이런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십니까?”
“우리 같은 숲 지기가 무얼 알겠소. 그날 수레를 끌고 온 남자가 누군지도 모른다오. 그저 안타깝구려, 안타깝구려, 하면서 숲 지기의 방식으로 예를 다할 뿐이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흘끗 시안과 레이첼을 살핀 숲 지기가 말을 이었다.
“그쪽은 여기를 왜 찾았던 거요? 여기를 찾아오고 싶어 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통에 반가워서 냉큼 안내하겠다고는 했지만 궁금해서 말이지.”
“예전에 프람 백작님께 은혜를 입은 일이 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싶어 찾아 헤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무덤에 해코지하려는 건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역시 예를 올리러 왔을 뿐입니다. 필요하다면 두 분을 좀 더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묻어드릴 생각이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숲 지기가 안심한 듯 뒤돌아 무덤에 예를 갖췄다.
“백작님은 호인이셨지. 좋은 것이 생기면 무엇이든 성의 일꾼들이나 영지민들과 나누셨어. 프람 백작이 살아계실 적에 여기 살았던 자들은 모두 그분을 그리워한다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레이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무덤 앞에 서서 라일러스에게 받은 물건을 꺼냈다. 예니스 교에서 장례를 치를 때 쓰는 은빛 초였다.
촛불은 곧 스스로 밝은 은색 빛을 내며 타올랐다.
신성한 여신 예니스의 은빛 연기 속에서 레이첼은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기도가 끝난 뒤 시안은 숲 지기를 먼저 돌려보냈다.
숲 지기가 영지까지 찾아올 수 있겠냐며 걱정했지만 시안은 오는 길을 봐두어 괜찮다고 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레이첼은 시안과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가슴이, 왜 이러지?’
명치가 답답하고 머리가 멍했다.
햇볕이 쨍쨍한데 당장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코 레이첼을 지켜보던 시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울어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 무엇도 밖에서 얘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울고 싶지 않아요.”
“내게 거짓말을 하는군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
“레이첼 백작.”
시안이 레이첼을 부르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낯선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그의 체향이 반갑게 느껴졌다. 울컥 코끝이 찡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시안이 속삭였다.
“아까 숲 지기에게도 얘기했지만 사람을 시켜서 무덤을 좀 더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드릴 생각입니다. 라일러스 주교님과 함께 추모식도 치르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데 대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일을 겪고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무슨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시안 역시 그랬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시안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테오도르는 어떤 형식으로든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레이첼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안은 단단하고 힘 있는 말로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레이첼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시안은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늘 그렇게 해주었다.
결혼 무효 신청을 통과시켜 주겠다고 할 때도, 지금도.
스테판은 시안을 ‘인류애가 넘치는 자식’이라고 표현했었다. 맞다. 시안은 레이첼이 아는 누구보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안전하게 감싸주는 거대한 울타리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배려에 마음을 붙잡았던 이성이 툭 끊어지며 눈물이 터졌다.
“흑.”
울지 않을 줄 알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나 마음이 아플 줄은 몰랐다.
하지만 레이첼은 ‘레이첼’이었다.
가슴에 새겨진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기억을 넘어 레이첼을 슬프게 했다. 죄책감과 안타까움, 테오도르를 향한 원망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
시안은 오열하는 레이첼의 몸을 당겨 살포시 품에 안아 주었다.
* * *
테오도르는 시가르의 발치에 꿇어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시가르가 오만한 얼굴로 테오도르를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놈을 툭툭 건드렸다.
“감히 반란을 꾀하고도 쥐새끼처럼 숨어다닌 자가 드디어 내 눈앞에 꿇어앉았군. 그래. 붙잡힌 소감은 어떠한가.”
“화, 황제 폐하. 저는 반란을 꾸민 적이…….”
“건방지게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뻐억!
발로 테오도르를 걷어찬 시가르는 더러운 것을 밟은 사람처럼 융단에 신발 끝을 비볐다.
“네 놈은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서서히 없애버릴 거야.”
“크흡.”
아니라고, 오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열어봐야 얻어맞을 뿐이라는 걸 아는 테오도르는 입을 꾹 다문 채 끅끅거리기만 했다.
비굴한 모습, 절망 어린 눈동자.
시가르가 아주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난 관대하니까 죽이기 전에 유언 정도는 들어주마.”
“흑. 흐흑.”
반역 혹은 황제 모욕죄로 이 자리에 끌려온 자들은 유언을 말하라 하면 대개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달라 빌었고, 잘못을 인정하며 선처를 구했다.
때때로 남은 가족에게 뭔가를 전해달라며 위선을 떠는 자도 있었다. 그런 역겨운 자에게 시가르는 훨씬 더 잔인하게 굴었다.
‘오랜만에 끌려오는 죄인이라 기대가 되는군. 부디 흡족할 만큼 비굴하게 굴어주었으면 좋겠어.’
테오도르가 훌쩍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죽을 목숨입니까?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까?”
“귀가 먹은 자로군.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 줄 수도 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흑흑. 유언 남기겠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할 수 있다면 저는, 저는…….”
시가르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 차올랐다.
테오도르는 어엉, 눈물과 함께 토해내듯 말했다.
“저를 두고 바람을 피운 레이첼을 저주하겠습니다. 제게서 레이첼을 빼앗아 간 대공에게도 저주를 퍼붓겠습니다! 대공! 망할 대공!”
“뭐라고?”
뾰족한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테오도르의 목은 잘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테오도르가 눈을 떠 시가르의 눈치를 살폈다.
테오도르를 내려다보는 시가르의 표정이 기묘했다.
“……경비병. 이 자를 다시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예? 화, 황제 폐하. 저를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폐하! 폐하!”
끌려가는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시가르가 턱을 매만졌다.
“대공에게 저주를 퍼붓겠다, 라. 이토록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자는 처음이야. 이런 자를 아깝게 그냥 죽여버릴 수야 없지.”
시가르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 * *
레이첼과 시안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숲을 빠져나와 프람 성으로 돌아왔다.
시안이 응접실에서 레이첼을 맞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꽤 먼 길이었는데 부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숲속에서 운 일이 떠올랐는지 레이첼이 뺨을 붉혔다.
시안은 레이첼의 퉁퉁 부은 눈과 붉어진 뺨이 무척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비틀거리는 레이첼을 부축해서 숲을 빠져나오는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오랜 시간 가까이 닿을 수 있어 행복했다.
시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체력이 좋은 편이라서요.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레이첼을 내내 품에 안아주었다.
이따금 불순한 욕망이 고개를 쳐들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순간은 안타까웠다. 실제로 마주하는 레이첼의 눈물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다행히 레이첼은 자신의 품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괜찮다며 눈물진 얼굴로 슬쩍 미소 짓기도 했다.
그 미소에 순간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는지.
성과 영지를 손에 넣는 일도, 프람 백작 내외의 무덤을 찾는 일도, 모두 레이첼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는데 되려 제가 더 빠져들어 버렸다.
마음이, 속절없이 깊어졌다.
짧게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시안이 탁자에 올려 두었던 종이를 레이첼 쪽으로 내밀었다.
“성과 땅문서입니다.”
레이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대공 전하.”
“아래 서명을 남기면 이 성과 영지는 예전처럼 프람 성과 프람 영지로 불리게 될 겁니다.”
“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첼의 모습에 시안이 가볍게 웃었다. 이런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그동안 성과 영지를 사려고 들인 돈과 시간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결정하신 건가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줄 것이 있다는 말에 화색을 띠는 모습이 너무도 레이첼다웠다.
시안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눈물 흘리는 레이첼을 품에 안으며 결심했었다. 그녀에게 받고 싶은 것 중 가장 사소한 것을 요구하자고.
테오도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레이첼을 괴롭게 했다.
시안은 그런 자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레이첼에게 티끌만 한 부담이나 고민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레이첼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껍게 받고 행복에 겨워 열흘 밤낮을 잠들지 못할 테니 상관없었다.
기분 좋은 상상에 시안이 슬쩍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