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73)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73)화(73/151)
“며칠 뒤에 열리는 이아콥스 가문의 연회에서 제 파트너가 되어주십시오.”
“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레이첼을 보며 시안이 맑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시안의 말이 더 이어지지 않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공 전하? 왜 더 말씀하지 않으시는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아콥스 가문의 연회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요. 그것을 부탁하고 싶어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하신 게 아닌가요?”
시안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무래도 레이첼은 시안이 연회에 참석하는 데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다운 짐작이었다.
“할 일이라, 제 파트너가 되어 연회를 즐기는 것 정도일까요. 원래 백작이 의도했던 일이 있다면 하셔도 좋고, 없다면 그저 제 곁에 머물러 주셔도 좋습니다.”
이해가 잘되지 않는지 레이첼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분홍색 속눈썹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시안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제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것 외에는 더 부탁할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레이첼의 시선이 탁자에 놓인 서류로 향했다. 그녀는 서류의 내용을 살피고 눈을 들어 시안을 보았다가 다시 서류를 살폈다.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 같았지만 시안의 눈에는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레이첼의 속마음이 모두 들여다보였다. 레이첼이 작은 다람쥐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레이첼이 말했다.
“성과 영지를 제게 선물해 주시는 대가로 제가 해드릴 것이 연회에서 대공 전하의 파트너가 되는 것뿐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다지 값비싼 지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과 영지입니다. 제게는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런 것을 선물 받고 겨우 연회 파트너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제가 보기보다 꽤 부자라서, 가격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게다가 ‘겨우’ 연회 파트너라니요. 제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아.”
시안이 연회에서 레이첼의 파트너가 되면 남자들이 함부로 그녀의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손을 잡고, 곁에 머무르고, 운이 좋다면 춤도 출 것이다. 그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시안을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고, 황홀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시안이 살아온 날 중 가장 빛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레이첼이 시안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레이첼은 얼른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죄송합니다. 제가 짧은 생각으로 무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백작처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요.”
잠시 우물거리던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받은 것에 비해 너무 작은 요구인 것 같습니다. 연회의 파트너가 되어 드리는 것 정도는 성과 영지를 선물 받지 않았더라도 얼마든 해드렸을 거예요.”
이번에는 시안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대가가 없어도 얼마든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니.
그 말이 시안을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레이첼은 알까.
늦은 밤, 낯선 응접실이 온통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입술이 떨렸다.
“레이첼 백작. 지금 한 이야기, 정말입니까?”
“물론이지요. 대공 전하께 중요한 일이라면 대가 없이도 얼마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레이첼의 목소리는 조금 토라진 것처럼 들렸다. 우리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이 아닌가요?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시안은 당장 저 사랑스러운 레이첼을 끌어당겨 품에 안으라고 충동질하는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미치겠군. 이러려던 게 아닌데.’
레이첼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귀한 것을 받았으니 저도 귀한 것으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다른 요구사항을 고려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이대로는 제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그 한 마디에 시안의 결심이 무너졌다.
레이첼의 부탁은 그녀에게 부담이나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던 결심보다도, 테오도르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보다도 중요했으니까.
‘너 진짜 중증이구나.’
스테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의 마음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다른 요구사항을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안도한 듯 어깨를 내리는 레이첼을 보며 시안은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눈앞에 앉은 여성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는 것을. 그녀의 앞에서 자신의 이성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레이첼을 향한 숨 막히는 애정 속에서 시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날, 레이첼과 시안은 수도로 향했다. 출발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두 사람이 함께 마차에 탔다.
덜컹, 마차가 흔들리자 레이첼의 무릎을 덮었던 얇은 담요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시안은 몸을 굽혀 담요를 주워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제 마차보다 대공 가문의 마차가 더 편하실 것 같은데요. 괜히 흔들리는 마차에 타서 불편하실까 걱정입니다.”
“제 마차도 돌부리에 걸리면 흔들리는 건 똑같습니다. 기왕 똑같이 흔들리면서 갈 길이라면 함께 마차를 타는 편이 덜 심심하지 않겠습니까.”
심심해서 레이첼의 마차에 탔다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시안이 자신을 위해 마차에 함께 타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내 그녀를 배려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레이첼이 담요 귀퉁이를 꼭 쥐었다.
‘내 기분이 울적할까 봐.’
시안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덜 우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수도로 돌아가는 여드레 내내 무덤을 떠올리며 슬퍼했을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코끝이 찡했다.
‘……조금만 의지하자. 수도로 돌아가면 일하느라 슬퍼할 틈이 없을 테니까. 조금만. 수도로 돌아가는 동안에만.’
얼른 눈물을 삼키고서 생긋 웃었다.
“그건 그렇지요. 저도 프람 영지로 갈 때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느라 무척 심심했답니다. 마차가 흔들려서 서류나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어찌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저도 그렇습니다. 혼자 있으니 잡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쉽게 가라앉더군요.”
“대공 전하께서 마음이 가라앉았다고 표현을 하시니 이상하네요. 늘 한결같이 여유롭고 평온하신 분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보였습니까.”
부드럽게 미소 짓는 시안을 보자 가슴이 콩닥콩닥 간지럽게 뛰었다.
레이첼은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대공 전하.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돕겠습니다.”
“사람을 찾고 싶어요.”
“사람……. 혹시 테오도르의 심부름꾼을 찾으시려는 겁니까?”
“네. 시신을 수레에 싣고 왔다던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여길 찾아내신 대공 전하라면 그 사람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시안이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실패하면 안 되겠군요.”
“제가 부담스럽게 해드렸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도를 출발하기 전에 미리 휘지우스에게 말씀하신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해 두었으니 곧 결과가 도착할 겁니다.”
“휘지우스라면 정보 길드의 길드 장 말씀이신가요?”
“네. 길드의 장을 맡을 만큼 실력자라 아마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저만큼,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실력이 좋거든요. 제 직장 상사이니 그래야 마땅하지만요.”
“대공 전하의 직장 상사라고요? 아하하.”
가벼운 농담에 레이첼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겁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테오도르가 벌인 끔찍한 짓을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 그를 찾으면 놈을 단죄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레이첼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우울과 죄책감을 벗어던지고 서늘한 이성을 되찾았다.
집무실에 찾아온 케이티가 레이첼을 보고 잠시 움찔했다.
“……레이첼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은 잘 해결되셨는지요.”
“잘…… 해결되었다고 해야 할까? 몰랐는데 테오도르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숲속에 버려뒀더라고.”
“예?”
케이티의 표정이 레이첼 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떻, 어떻게 그런 짓을……. 망할 불륜남 자식. 저지른 잘못이 한두 개가 아니군요.”
“그러게. 설마 이렇게까지 했을 줄은 몰랐어. 짐승도 이렇게 몹쓸 짓을 하진 않을 텐데. 다행히 숲 지기들이 무덤을 만들어서 그동안 돌봐줬더라.”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게 왜 케이티가 죄송할 일이야. 내 잘못이었어. 내가 챙겼어야 해.”
“힘드셨잖아요. 망할 자식한테 시달리면서 그런 것까지 어떻게 생각하셨겠어요. 지금까지 버티신 거, 놈한테 벗어난 것만으로도 잘하신 거예요.”
진심이 담긴 위로였다.
레이첼이 당한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함께 화내고 걱정하고 슬퍼해 주는 케이티의 다정함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레이첼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위로해 줘서 고마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시 제대로 모셔야지.”
“이장하실 계획이신가요?”
“맞아. 아빠한테 얘기해서 추모식도 치를 생각이야. 아빠한테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이장을 맡아줄래? 프람 성안에 양지바른 곳으로 모셔줘.”
“얼마든 맡겨 주세요.”
“고마워. 그리고 도와줬으면 하는 게 하나 더 있는데.”
“어떤 건가요?”
“테오도르가 살았던 타운 하우스랑 제인이 살던 집, 아직 그대로지?”
“네. 출발하기 전에 부탁하신 대로 테오도르가 살던 타운 하우스의 밀린 월세를 대신 내두었습니다.”
“좋아.”
혹시 몰라서 테오도르가 잡혀간 뒤에도 놈이 살던 거처를 정리하지 못하게 막아두었다.
거기서 뭔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람을 시켜서 테오도르가 살던 집을 좀 뒤져줘. 수상한 물건이나 서류가 나오면 뭐든 가져오게 하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테오도르는 이미 반란 혐의로 잡혀갔는데요. 거기서 뭔가 발견하는 게 의미가 있나요?”
“혹시 모르잖아. 그런 못된 애들은 꼭 이상하게 운이 좋더라고. 반란 혐의가 오해였다는 게 밝혀져서 처형당하지 않으면 그때 쓸모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샅샅이 뒤져볼게요.”
“고마워.”
보고를 마친 케이티가 예를 갖춘 뒤 집무실을 나갔고, 혼자 남은 레이첼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못된 애들은 이상하게 운이 좋다’는 말이 그저 농담이나 비유가 아니길 바랐다.
재산을 갈취하려고 아내의 부모님에게 독을 보낸 죄.
그들의 시신을 숲속에 아무렇게나 방치시킨 죄.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그 자식의 죄를 밝히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
부디 갈대처럼 제 결정을 바꿔대는 황제가 테오도르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두기를, 레이첼은 그 어느 때 보다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