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8)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8)화(8/151)
베렝겔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 공연한 말로 백작을 모함하지 마십시오.”
“모함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세요.”
레이첼이 들고 있던 장부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서 받아 가라는 뜻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듯, 믿기지 않는 듯 베렝겔라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레이첼이 내민 장부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투욱, 장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남편의 비자금과 탈세를 밝힌 장부라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서요.”
“……만일 자료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부인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얼마든지요.”
“피넛.”
뒤쪽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던 시녀 하나가 부름에 후다닥 달려왔다. 시녀는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주워 베렝겔라에게 건넸고, 레이첼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아 응접실을 벗어났다.
베렝겔라는 한참이나 응접실에 앉아 레이첼이 건넨 장부를 살폈다.
테오도르는 베렝겔라가 장부를 모두 읽은 뒤에야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헐레벌떡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 어머니! 요즘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음식을 모조리 사 왔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
“……백작. 내가 백작을 이렇게 키웠습니까?”
“예?”
짜악!
엘로사 저택에는 늦은 시간까지 베렝겔라가 아들을 체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늦은 밤, 디카르시냐크 대공 저택 집무실에서는 규칙적으로 귀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탱그랑, 맑은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다시 탱그랑, 맑은소리가 났다.
집무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시안이 허공에서 자그마한 물건을 낚아채 달빛에 비춰보았다. 연한 분홍빛 다이아몬드가 박힌 아름다운 커프스단추였다.
레이첼은 사랑의 증표가 될 만한 선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요즘 사교계에서 화제인 분홍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는 그녀의 요구에 딱 맞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의뢰를 마치고서도 결과를 보고하지 않고 며칠째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핑크빛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귀하기도 귀했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에서였다.
제국에 하나뿐인 대공이면서 길드의 정보원인 시안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엘로사 저택 한 채와 맞먹는 가격도 그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이 귀한 것이 테오도르의 물건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불쾌했다.
으슥한 뒷골목에서 내연녀 제인을 함부로 만져대던 테오도르의 손을 떠올렸다. 그의 셔츠 끝에 이 분홍색 커프스단추가 달린다고 생각하니 비위에 거슬렸다. 가져다주고 싶지 않았다.
물건을 준비하고서도 보고를 미루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레이첼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그녀를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알아내기 어려운 사람은 없었어.’
황제 시가르나 대성자 티티예니스에 대한 것조차 모두 알고 있는 시안에게는 정말 낯선 일이었다.
사교계에서 레이첼은 남편을 애틋하게 여기고 소문에 둔하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친구도 적었다. 여기저기 그녀가 남겨온 실수의 흔적이 가득했다.
‘예니스 교단의 라일러스 반 주교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지만……. 이건 그냥 레이첼 아버지의 개인적인 친분이었을 뿐인 것 같고.’
레이첼 엘로사가 똑똑하고 현명하고 용의주도한 여자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20년 넘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전혀.
시안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원로회의 의심을 읽을 만큼 영리한데 겉으로는 바보인 척한다고? 얼마나 치밀해야 가능한 일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제국에 존재하는 유능한 인재는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했군.’
탱그랑, 다시 커프스단추를 튕겨 올렸다가 낚아채 꽉 쥐었다.
레이첼을 손에 쥔 것처럼 등줄기에 쾌감이 일었다.
‘붙잡고 싶다.’
휘지우스를 길드장으로 둬서 정보를 얻고, 스테판에게 상단을 맡겨 돈을 벌었고, 닉을 보좌관으로 임명해 가장 가까이에서 일을 돕게 했다.
레이첼에게는 어떤 일을 맡기면 좋을까 고민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때는 이런 욕구가 황제가 되기에 꼭 필요한 덕목이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시안의 형인 시가르가 황좌를 물려받았으니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가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허락 없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딸인 돌로라사였다.
“……돌리. 아직 안 잤어?”
“화장실 가려다가 와봤어요. 아빠는 왜 안 자요?”
올해 일곱 살인 돌로라사는 또래보다 맑고, 또래보다 성숙했다. 시안은 그것이 고맙고 때로 아팠다.
아이는 제 엄마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물어도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아는 눈치였다. 어쩌면 시안이 친아빠가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을지 몰랐다.
조그마한 토끼 모양 슬리퍼가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가까워졌다.
“늦게 자면 건강에 안 좋아요. 돌리는 아빠가 아픈 거 싫어요.”
“아빠가 걱정 끼쳤구나. 미안해. 이제 자러 갈게.”
“응. 잘 자요, 아빠. 저도 다시 자러 갈게요. 너무 졸려요.”
“잘 자렴. 사랑해, 돌리.”
“저도 사랑해요.”
집무실에 혼자 남은 시안이 자신의 셔츠 커프스에 커프스단추를 가져다 댔다. 사랑의 상징이라는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붙잡아서 뭘 할지는 붙잡고서 생각해도 충분했다.
레이첼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테오도르는 황궁에 일하러 가지 못했다. 베렝겔라에게 맞은 얼굴과 종아리가 퉁퉁 부은 탓이었다.
아침 식사 시간, 베렝겔라는 당장이라도 다시 화를 낼 듯 무시무시한 얼굴이었고 테오도르는 바람에 떠는 풀잎처럼 처량했다.
그 사이에서 레이첼과 그레이엄만 화기애애했다.
“자, 그레이엄.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야. 엄마가 썰어줄게.”
“엄마도 드셔야죠. 한 개만 제가 먹고 나머지는 엄마가 드세요.”
“엄마는 다 커서 많이 안 먹어도 돼. 그레이엄은 쑥쑥 클 나이니까 많이 먹어야지.”
“음……. 그럼 제가 두 개 먹고 쑥쑥 커져서 엄마 지켜줄게요.”
귀여워……!
레이첼은 곁에 앉은 그레이엄의 뺨에 뺨을 비볐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베렝겔라는 결국 식사를 반도 마치지 않고 들었던 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쨍그랑!
“저택 주방장의 음식 솜씨가 형편없군요. 음식에서 썩은 내가 진동해서 역겨울 지경입니다. 당장 해고하세요.”
“예, 예에. 어머니. 당장 해고하고 솜씨 좋은 주방장으로 제가 다시…….”
양 뺨이 퉁퉁 부은 테오도르가 어쩔 줄 모르고 굽신댔다.
베렝겔라는 그런 아들을 한심하다는 눈길로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조찬실을 나섰다.
타악, 문 닫는 소리가 나자마자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쨍그랑! 식탁이 출렁이며 식기와 접시가 요란스레 부딪쳤다.
“레이첼. 당신 진짜 미쳤어? 요즘 왜 이래?”
베렝겔라가 있을 때는 찍소리도 못했으면서 부인하고 아들에게는 식식거리며 화내는 꼴이 웃겼다.
레이첼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레이엄을 등 뒤에 숨겼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식사 중이에요.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얘기해요.”
“밥이 넘어가게 생겼어, 지금?”
밥이 안 넘어갈 것처럼 생기기는 했다. 테오도르는 양 뺨이 퉁퉁 부어서 뭘 씹는 게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그래도 기다리세요. 저랑 그레이엄은 아직 다 못 먹었어요.”
“지난번에 내가 제인 데려왔을 땐 그렇게 사람을 무안 주더니, 이번에는 말도 안 되는 장부를 어머니께 가져다드려? 대체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 없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제인은 먼저 예의 없이 굴었고, 장부를 어머님께 드린 건 어머님이 백작 가문의 큰 어른이시기 때문이에요. 가장 높은 분이 백작 가문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뭘 잘했다고 말대답이야! 당신 때문에 내가 지난밤에 어머니께 얼마나……!”
“애당초 문제를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예의범절도 모르는 여자를 집에 초대하고, 가문 재정 상태에 구멍을 내고, 탈세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아내는 쳐다도 안 보고, 대놓고 바람이나 피고.
맞아서 빨갛게 부풀었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이번에는 분노로 벌게졌다.
“닥쳐!”
눈이 뒤집힌 테오도르가 물이 든 은잔을 집어 던졌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레이첼은 제게 날아오는 은잔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굳어졌다.
얼굴에 은잔이 날아들 거라 예상했던 순간.
채앵!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은잔이 조찬실 바닥을 뒹굴었다.
레이첼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등 뒤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던 그레이엄이 식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손에는 소고기를 썰던 은제 나이프를 들고서.
“그, 그레이엄?”
“아빠 나빠!”
그레이엄이 한 뼘 길이의 나이프를 테오도르 쪽으로 뻗었다. 아이의 파란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은제 나이프가 위협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테오도르는 주춤 물러섰다.
“그레이엄. 당장 그거 내려놔라.”
“시, 싫어요.”
“그레이엄.”
“사람한테 물건을 던지는 건 나쁜 행동이야! 아빠는 아빠 엄마한테 그런 것도 안 배웠어요?”
그레이엄은 베렝겔라가 테오도르의 엄마라는 걸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나쁜 짓 하면 혼나야 해! 아빠가 나쁜 짓 하면 나도 아빠 맴매할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귀여운 협박이었지만 분위기는 살벌했다. 작고 여린 몸이 내뿜는 살기에 레이첼조차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원작에서 그레이엄이 살인귀가 되는 건 레이첼이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레이엄은 아무나 따라오지 못할 동체 시력과 운동 신경, 힘, 마주친 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살의 같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났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레이엄의 재능들이 엄마인 레이첼의 위험 앞에서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