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87)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87)화(87/151)
아트레이유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뭐, 뭐, 뭐, 뭐야? 왜 호들갑인데?”
“그야 황태자 전하께서 귀에 이렇게나 큰 반창고를 붙이고 계시니까 그렇지요. 피가 나신 거예요? 다치신 건가요? 아니면 저 때문인가요? 설마 황제 폐하께서…….”
레이첼이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듯 속상한 얼굴을 하자 아트레이유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무슨 소리야? 이거 내가 나뭇가지로 귀 파다가 피 난 거라고! 레이첼 백작이 뭐, 아빠가 뭐! 그런 거 아니거든?”
“정말인가요?”
“정말이지, 그럼. 나 거짓말쟁이 황태자 아니라고!”
익숙하지 않은 거짓말을 했더니 누군가 나뭇가지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레이첼은 여전히 울상이었지만 다행히 어깨를 내리며 긴장을 풀었다. 그것만으로도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이 제법 많이 사라졌다.
뒤쪽에 서 있던 돌로라사와 그레이엄이 뒤늦게 곁으로 모여들었다. 조그만 녀석들은 레이첼보다 더 난리를 피웠다.
“꺅! 어쩌면 좋아! 황태자 전하, 다치신 거예요?”
“피, 피나셨나 봐! 옷에 피가 묻었어요!”
“아아, 어떻게 해. 괜찮으세요? 아프시죠? 의사를 부를까요? 약은 드셨어요?”
“케이티! 케이티! 의사 불러줘!”
아트레이유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제게 매달리는 꼬맹이들을 떼어냈다.
“야, 야. 치료 다 했어. 치료했으니까 이렇게 대빵 큰 반창고도 붙였지.”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혼자 붙이셨다기에는 반창고가 깔끔하네요.”
“그럼 이제 안 아프세요?”
“아프긴 한데, 난 용감한 황태자 아트레이유니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안도하는 돌로라사와 그레이엄의 모습에 아트레이유의 코끝이 찡했다.
‘우씨. 쪼끄만 애들이 왜 이렇게 착해?’
콧물을 훌쩍이고서 손가락으로 코 밑을 문질렀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해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체온이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는 것만 같았다.
‘……헤헤. 좋다.’
시가르에게 혼나고 베아트릭스에게 사랑받지 못해 슬펐던 기분이 조금씩 녹아 사라졌다.
아트레이유의 얼굴에 아까와는 다른 자연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뺨과 귓가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런 아트레이유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첼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아이의 귀를 감싼 커다란 반창고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정리해 주었다.
아트레이유는 흠칫 놀랐으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눈동자에 레이첼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놀다가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몸조심하세요. 할 수 있다면 다치지 마시고, 아프지 마시고요.”
“……놀다가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럼요. 노는 건 재미있잖아요.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고요. 저도 어렸을 때 그랬는걸요.”
“그, 그랬어? 백작도 어렸을 때 말썽꾸러기였구나. 헤헤.”
“의자 여러 개를 징검다리처럼 놓고 그 위에서 왔다 갔다 뛰어다니다가 떨어져서 구른 적도 있어요.”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그레이엄이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 엄마도 했어요? 저도 어제 할아버지랑 둘이서 그거 했어요! 의자에서 떨어지면 용암에 빠지는 거라서 으아아악! 소리도 질렀어요.”
아트레이유도 같은 놀이를 하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날 시가르에게 어찌나 혼이 났었는지.
황태자라면 황태자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라고, 너처럼 철딱서니 없는 놈이 대체 어떻게 황제가 되겠다는 거냐고 혼이 났었다.
황태자 따위,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었는데.
내내 자신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다. 얌전한 돌로라사 외에는 또래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었으니까, 다른 꼬맹이들은 이런 장난 같은 거 치지 않는 줄 알았다.
자신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안도감, 자신을 걱정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반가움.
아트레이유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씩 웃었다.
* * *
며칠 뒤, 레이첼은 저택 앞에서 시안을 맞았다. 마차에서 내려 레이첼의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주는 그는 평소보다 더 말끔한 차림이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레이첼 백작은,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무척 아름답군요.”
“대공 전하야말로 언제나 멋지지만 오늘은 더 멋지세요.”
“그래야 하는 날이니까요.”
레이첼이 꽃향기를 한껏 들이마시더니 맑게 웃었다.
“와아. 향기가 정말 좋아요.”
“정원사에게 신경 써서 관리하라 일러둔 보람이 있군요.”
“매번 방문하실 때마다 이렇게 큰 꽃다발을 선물로 주시다니, 디카르시냐크 저택 정원이 저 때문에 휑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걱정 어린 레이첼의 농담에 시안이 가볍게 웃었다.
“다음에 저택 뒤쪽 후원을 보여드려야겠군요. 거길 보고 나면 꽃다발 몇 개로 휑해질 만큼 디카르시냐크 저택 정원이 작지 않다는 걸 알게 되실 테니까요.”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레이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안은 레이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주변에서 사용인들이 넋 놓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시안은 정말이지, 훌륭하게 사랑에 빠진 약혼자 역할을 해냈다. 사교계 귀족들은 물론 가까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용인들과 레이첼까지 깜빡 속을 정도였다.
설레서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하루하루가 기대 이상이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꽃향기만큼 레이첼의 마음도 살랑거렸다.
‘좋다……. 행복해.’
언젠가 이 약혼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후우, 짧은 한숨으로 아쉬운 마음을 털어낸 레이첼이 시안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대공 전하.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아빠가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약혼식을 준비하기 전에 정식으로 라일러스에게 약혼 허락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사실 라일러스는 레이첼과 시안이 왜 약혼을 하려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따로 약혼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레이첼과 시안을 지켜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남색인가 싶을 만큼 여성을 멀리하던 시안과 불륜 사건에 휘말렸던 레이첼의 연애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약혼이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더 절차에 신경 써야 했다.
더불어 시안은 ‘주교님의 어여쁜 따님을 허락도 없이 도둑질하다가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도둑질하고 싶지 않다니. 어차피 기간 한정 약혼인데 그런 표현을 쓸 필요가 있나? 상대가 아빠라서……? 흐음.’
곰곰이 생각하니 시안의 말이 이해되기도 했다.
레이첼을 향한 라일러스의 애정은 종잡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으니까. 라일러스라면 하루든 일주일이든 레이첼과 약혼하는 시안을 도둑놈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라일러스는 크고 화려한 응접실에서 시안과 레이첼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은 황실 예법대로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예니스 님의 왼손이자 레이첼 백작의 대부이신 라일러스 주교님을 뵙습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앉으십시오.”
레이첼과 시안에게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권한 라일러스가 껄껄 웃었다.
“이것 참. 대공 전하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많이 긴장하신 모양이군요.”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주교님의 눈썰미는 당해낼 수가 없군요.”
레이첼이 시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 전하, 긴장하셨어요?”
“당연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대부님께 약혼 허락을 받으러 왔는데 긴장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 사랑하는 사람이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는데 시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랑하는 사람이요.”
레이첼의 분홍색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여긴 저택 입구처럼 사용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저런 표현을 쓰시는 거지?’
궁금했지만 시안은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뿐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라일러스는 시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큰일이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레이첼이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사이 응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떴던 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단단한 기운을 띠며 반짝였고, 목소리는 낮고 느리고 또박또박하며 또한 진중했다.
“라일러스 주교님. 대녀인 레이첼 백작과 약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순간 레이첼은 모든 생각을 잊었다.
심장이 쿠웅, 쿠웅 거대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시안의 말이 임시 거짓 약혼을 위한 연기임을 알면서도 설레서 숨이 막혔다.
‘……진심으로 나랑 약혼하고 싶어 하시는 거 같아.’
그리고 라일러스는 기다렸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요. 하나뿐인 친구의 하나뿐인 딸이자 제가 제 목숨보다 예니스 님보다 소중히 여기는 제 대녀와 약혼하고 싶으시다니, 무척 곤란하군요.”
“……! 아빠! 무슨 말씀이세요?”
예상하지 못한 반대에 레이첼이 화들짝 놀랐다.
사정을 전부 알고 있으니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레이첼이 놀랐거나 말았거나, 라일러스는 태평했다.
“무슨 말씀이냐니. 나는 네 아빠로서 너를 보쌈하러 온 괘씸한 놈을 혹독하게 반대하는 중이란다. 원래 아빠들은 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빠가 우리 약혼을 반대하시면 안 된다고요!”
“왜?”
“사교계에 약혼하겠다고 소문을 다 냈잖아요. 추모식에서 대공 전하가 제 곁을 지켜주실 때도 아무 말씀 안 하셔 놓고 이제 와서 반대하시면 어떻게 해요!”
“흥. 겨우 그런 이유로? 나 원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늙은이라 상관없어.”
“맙소사.”
레이첼이 현기증을 느끼며 시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빠라면 이상한 소리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설마 사정을 다 알면서 이렇게 나오실 줄은 몰랐어.’
지금 와서 라일러스가 레이첼과 시안의 약혼을 반대해 버리면 일이 복잡해진다.
테오도르와 시가르를 경계하기에도 바쁜 시간을 라일러스를 설득하며 쓸 수는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레이첼은 한 번도 쓴 적 없던 비장의 기술을 쓰기로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라일러스를 향해 눈을 치떴다.
“……아빠. 약혼 허락해 주세요.”
“싫다면?”
“약혼 허락 안 해주시면……. 아빠 미워할 거예요.”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리는 레이첼의 모습에 라일러스가 껄껄,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런. 예쁜 딸에게 미움받는 아빠는 싫으니 아무래도 약혼 반대는 여기서 그만둬야겠구나.”
“……? 정말요?”
“그럼. 라일러스의 이름으로는 축하를, 예니스의 이름으로는 축복을 해주마.”
너무도 쉽게 떨어진 허락에 레이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소 하지 않던 애교를 부린 탓에 부끄러워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옆에 있는 시안도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아빠. 처음부터 허락할 생각이셨죠?”
“하하하! 미안하구나. 레이첼 네 입으로 약혼 허락해 달라는 말이 듣고 싶었거든. 설마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애교를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야.”
“상이라니요! 전 부끄러워서 숨고 싶다고요!”
“그래, 그래. 아빠가 잘못했다. 앞으로는 이러지 않으마.”
“치이.”
레이첼이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고 라일러스가 싱긋 웃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약혼 얘기를 시작해 볼까?”
“좋아요.”
“그 전에, 레이첼.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니?”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