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Mother Of the Male Lead Who Lives With An Ad**terous Man RAW novel - chapter (88)
불륜남과 사는 남주 엄마가 되었다 (88)화(88/151)
레이첼은 갑자기 나가 있으라는 말에 당황한 듯했지만 토 달지 않고 자리를 비켰다.
응접실에 라일러스와 둘만 남게 되자 시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주교님께서 끝까지 약혼을 반대하실 줄 알았습니다.”
“레이첼이 약혼 허락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반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이첼이 반대하지 말라 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주교님의 반대에 맞서지 않고 약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라일러스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반대하더라도 기어이 약혼하셨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예.”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저 역시 레이첼과 약혼하시겠다는 대공 전하의 뜻에 반대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대공과 주교가 대립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것이 지독하게 레이첼을 원하는 시안과 제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레이첼을 아끼는 라일러스의 대립이었다면 더욱더.
레이첼 본인은 부끄러워했지만 사실 ‘약혼 허락해 주세요’라는 말은 정치와 종교, 권력과 권력의 싸움을 막는 평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라일러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응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실 오늘 시안은 ‘임시 거짓 약혼’ 허락을 받으려고 라일러스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보는 라일러스는 아마도 시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을 테고, 그것을 위해 레이첼을 내보내 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대답 역시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시안은 꼭 말해야 했다.
차분하게 말을 고른 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교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시가르와 테오도르로부터 레이첼 백작을 지키기 위해 거짓 약혼을 제안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약혼을 파혼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습니다.”
시안의 목소리는 처음 약혼 허락을 구할 때만큼이나 강하고 또렷했다.
“일단 약혼을 하고 나면 저는 레이첼 백작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저는 임시 거짓 약혼이 아니라 진짜 약혼을 하고 싶으니까요.”
“그러십니까.”
“약혼식에서 제국과 여신의 이름으로 사랑을 맹세할 때도 진심을 다할 생각입니다.”
라일러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이 늙은이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허락해 주십시오. 미래를 보는 예니스의 주교가 아닌 레이첼 백작의 아버지로서.”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보는 라일러스는 시안이 끝까지 레이첼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혼을 허락했을 테니까.
하지만 시안은 확인받고 싶었다. 레이첼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녀의 짝으로 인정해 주길 바랐다.
라일러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예니스의 주교가 아닌 레이첼의 아빠로서, 라.”
짧게 중얼거린 라일러스가 생각에 잠겼다.
시안은 라일러스의 대답을 기다리며 약혼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레이첼이 보인 반응을 떠올렸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임시 거짓 약혼이라는 말에 어깨를 내리며 안도하던 모습을 본 후, 시안은 전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운 채 레이첼을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레이첼은 가짜 약혼 행세를 하는 동안 시안의 곁에서 무척 즐거워했다. 시안과 약혼한 것이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오늘.
‘……약혼 허락해 주세요.’
레이첼이 수줍어하며 약혼 허락을 구하는 순간 시안은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황홀했고, 무엇보다 단단하게 자신의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레이첼은 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분명 시안을 향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사실이 존재할까.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라일러스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레이첼은 강해 보여도 속은 여린 아이입니다. 부디 대공께서 흔들리지 말고 그 아이의 곁에 머물러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명백한 허락이었다.
시안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주교님은 레이첼 백작이 약혼 앞에서 멈칫한 이유를 알고 있겠지. 그러니 흔들리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는 걸 테고.’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알아낼 테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알아내서 깨부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레이첼을 제 품에 안고 말겠다.
다짐하는 시안의 황금색 눈동자가 화려하게 빛났다.
* * *
사교계는 레이첼과 시안이 라일러스에게 약혼 허락을 받았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레이첼은 이아콥스 저택에서 열린 연회 이후 귀족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지만 저택에 머무르면서도 사교계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밀려드는 선물 때문이었다. 별생각 없이 선물을 놓아두기 시작했던 작은 응접실 하나가 선물로 가득 찼을 정도였다.
마차 몇 대가 한바탕 다녀가는 것 같더니 곧이어 케이티가 수레에 선물을 잔뜩 싣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응접실에 앉아서 선물과 함께 온 약혼 축하 서신을 읽던 레이첼이 케이티의 등장에 눈을 크게 떴다.
“……또야?”
“네! 어마어마하지요?”
케이티는 끝도 없는 선물 나르기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수레를 한쪽에 세워두고 레이첼에게 서신을 전해주었다.
“슬슬 지방에서도 선물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온 제국이 다 떠들썩한 모양이에요.”
“떠들썩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 대공 전하와 약혼하신 게 하필 레이첼 백작님이시니까요.”
레이첼도 알고는 있었다.
선물이 이토록 밀려드는 이유는 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대공의 짝이 하필 ‘레이첼 프람 백작’이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데다 특정 파벌에 속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은 명예와 돈을 위해 더 높은 지위의 귀족과 인연을 만들고 싶어 했고, 파벌이나 다른 가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레이첼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 깨질 약혼인 줄도 모르고서…….’
응접실을 가득 채운 선물을 보며 레이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검술 연습을 마친 그레이엄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우와, 산이 더 높아졌네! 우리 엄마 선물 진짜 많이 받았다!”
“어서 오렴, 그레이엄. 연습은 즐거웠니?”
“네! 새로 배운 동작인데, 내일 스승님 오시면 보여드리려고 연습했어요! 앗, 엄마. 케이티가 가져온 거, 새로운 선물이에요?”
“응. 방금 도착한 선물이래.”
“와앗! 저 저거 쌓을래요!”
그러고는 케이티가 수레에 싣고 온 선물을 바닥에 내려 차곡차곡 쌓았다.
“완서엉! 여기는 그레이엄이 만든 선물 산! 엄마, 무너트리면 안 돼요!”
“응응. 조심할게.”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양으로 자그마한 선물 탑을 쌓은 그레이엄이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레이첼은 저 모습을 보려고 이 많은 선물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마주 웃었다.
* * *
레이첼의 저택에 선물이 밀려든다는 소식은 디카르시냐크 저택에 틀어박힌 돌로라사의 귀에도 전해졌다.
돌로라사는 자기 방 창가에 앉아 며칠째 실과 바늘을 들고 끙끙대는 중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아이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유모가 걱정스레 물었다.
“공녀님, 제가 대신해드릴까요?”
“응? 아…….”
유모는 본래 은근히 돌로라사를 무시하던 사람이었다. 돌로라사의 어미가 천한 신분일 거라는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돌로라사가 사실은 황제의 핏줄이고 원한다면 언제든 황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그녀는 세상 둘도 없이 상냥한 유모가 되었다.
전보다 돌로라사를 살뜰하게 챙겼고, 무엇보다 늘 미소 지었다.
돌로라사는 그런 유모의 반응이 무섭고 낯설었다. 아이는 몸을 움츠리며 손에 쥐고 있던 수틀을 등 뒤로 감췄다.
“괜찮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혼자서 하시긴요. 삐뚤빼뚤하던데요? 그런 손수건을 선물하시려고요?”
비웃는 듯한 말투에 속이 상했지만 제가 봐도 삐뚠 건 사실이었다.
돌로라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하면 돼. 다시 하면 더 잘할 거야.”
“아유, 우리 공녀님은 참 고집이 세셔. 그래서 약혼식까지 완성하시겠어요?”
“괜찮아. 약혼식까지 다 못하면 결혼할 때 선물하면 되니까.”
“참 긍정적이시네요.”
분명 상냥한 말투인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돌로라사는 결국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미안한데 방해하지 말고 나가 줄래? 혼자 하고 싶어.”
“알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돌로라사가 직접 종을 울려 유모나 시녀를 부르는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모는 그 말을 빼먹지 않았다.
유모가 밖으로 나가고 방에 혼자 남게 되자 돌로라사가 동글게 말았던 어깨를 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역시 아빠 없는 저택은 불편해.”
원래도 바쁜 시안이었지만 약혼식 준비가 시작된 후에는 식사 때가 아니면 마주치지도 못했다. 덕분에 한동안 깍듯하던 유모의 빈정거림이 또 시작되어 버렸다.
다른 때라면 유모나 사용인을 피해 레이첼 백작의 저택으로 놀러 갔겠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줄 선물을 만들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돌로라사가 감췄던 수틀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꽃과 하트 사이에 시안, 레이첼의 이름이 수 놓인 손수건이었다.
“이번엔 잘한 거 같았는데……. 으음, 역시 삐뚤삐뚤한가?”
유모의 모난 말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확실히 도움이 됐다. 레이첼에게 엉망으로 수 놓은 손수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위로 실을 잘라 풀던 돌로라사가 헤헷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 받으면 레이첼 백작이 기뻐하겠지?”
꿈꾸듯 어른어른 흔들리는 금빛 눈동자가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프람 저택을 향했다.
“아빠랑 레이첼 백작이 결혼하면 우리는 가족이 되는 거야. 같은 저택에 살면서 매일매일 만나고,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고.”
돌로라사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그레이엄한테 하듯이 매일 나를 안아줄지도 몰라. 이름도 같아질 거야. 돌로라사 디캬르시냐크, 레이첼 디카르시냐크……. 아, 그럼 얼마나 행복할까!”
아이는 수틀을 품에 꼭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그리고…… 레이첼 백작을 엄마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차마 내뱉지 못하고 한참이나 고민하며 머뭇거리던 돌로라사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어, 엄, 엄마……. 꺅! 어떡해!”
부끄러워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돌로라사는 얼른 탁자에 엎드려 얼굴을 감췄다.
태어나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호칭으로, 그 특별한 호칭으로 자신이 정말 정말 좋아하는 레이첼을 부르게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 왜 약혼 같은 걸 해야 하는 걸까? 약혼 같은 거 안 하고 바로 결혼하면 정말 좋을 텐데…….’
약혼식까지 앞으로 일주일.
돌로라사는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라며 다시 자수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