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only healer in this world RAW novel - Chapter 46
47. 마침내
이미 한 번 증명된 사실을 에너지를 펑펑 써가면서 재차 검증까지 했다.
‘사실 돌다리도 이 정도 두드리면 많이 두드렸지.’
모험이기는 했지만 도박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 무모할지언정, 지는 내기는 하지 않는다.
이번만 하더라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않았던가.
같은 상황이라도 평소 같았다면.
-위험하니 모험하지 말자.
하고 넘겼겠지만… 지금은.
-좀 위험해도 모험 좀 해볼 만하지?
정도인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격을 실체화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실체화된 격을 만질 수도 있다는 소리는, 내가 그 존재의 실체에 관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디까지 가능한지가 주안점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는 소리다.
스킬을 두르는 것으로 ‘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스킬을 수십 수백 배 강화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이야.’
다만 효과가 좋은 만큼 내게 미치는 여파도 적지 않았다.
나는 뭉텅이로 뜯긴 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가호를 중첩시켜 새하얗게 빛났던 손은 어느새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읏.”
시야가 잠깐 가물거리듯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
갑자기 배 속이 텅 비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더니 눈앞이 핑 돌았다.
‘아. 이거 알아. 에너지 고갈 증상…이었던가?’
급격하게 에너지를 과도히 사용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모든 각성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위급 상태다.
‘내 스킬이랑 포션이 난리 났던 이유기도 하고.’
내성이 생기지 않는 급속충전 배터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급속충전 배터리의 원작자이다.
나는 무한 주머니 안에서 가득 쌓여있는 포션 하나를 급히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비명 같은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무슨 짓은. 뭘 보여줄 거냐면서. 그래서 보여줬는데.”
협회장의 얼굴을 가득 채우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바른대로 말하시죠.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나처럼 자신의 격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대신, 협회장은 아주 기민하게 이상을 느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선득했다.
“왜 못 믿지? 굳이 말로 풀어서 설명을 해줘야 하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격도 없는 그쪽이 함부로 탐낸 성좌의 격을 회수했을 뿐이야. 바로 이렇게 말이지.”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협회장이 분노와 부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자격? 그것을 누가 정하는 거지요? 이 세상을 만들어 냈다 하더라도 방치해 놨다면 그건 오히려 더 자격이 없는 것 아닙니까?”
희번덕.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당신의 말도 이상합니다. 격을 회수하는 일 따위가 가능할 리 없습니다. 대체 격이라는 것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손에 쥔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신이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 못 느꼈을 리가 없을 텐데? 힘이 줄어들었잖아. 안 그래?”
협회장이 내게 한 말을 인용해 덧붙였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아서 가능한 거겠지. 그렇지 않겠어?”
으드득.
분노를 못 이겨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협회장의 시선이 아주 또렷하게 느껴졌다.
만약 살의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나는 분명 형체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증오해본 적이 있던가.
증오를 넘어서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있었던가?
심지어 나는 지금 감정에 빠지는 시간도 아까워 최대한 효율을 극대화해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내 사람들이 무사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모든 것은 협회장을 처리해야만 해결이 된다.
‘그러게 나를 왜 건드렸어.’
가만히 놔두었으면 알아서 잘 살았을 것을.
물론 그쪽의 계획이 나의 행보와 겹친 것은 유감이라지만, 그건 구린 짓을 한 상대의 문제다.
그렇기에 나는 사납게 웃으며 손에 쥔 것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안 돼!”
쥐고 있다 말했을 때는 헛소리 말라 하더니 상반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
협회장의 손아귀에 잡혀 축 늘어져 있던 유한의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일순 반짝 빛을 발한 것 같았다.
반격의 시작이었다.
***
“이 지긋지긋한 이방인…! 너는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본성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꼬박꼬박 겉으로나마 높이던 말이 짧아진 지금.
예의를 내다 버린 것과 같은 그 말투는 협회장이 마침내 모든 여유를 잃어버렸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쪽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죽겠네.’
나는 쉴 새 없이 스킬을 난사했다.
가호뿐만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을 이용했다.
‘가호도 됐는데 다른 스킬은 안 될 게 뭐가 있어?’
가호는 내 손이 닿는 반경까지만 자유롭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른 스킬들은 아니었다.
수십 번 중첩시킨 스킬이 닿을 때마다 순간적으로 실체화된 격을 스태프를 휘둘러 끊어냈다. 그와 동시에 포션을 들이켰다.
챙강!
벌써 몇십 번째인지 모를 유리병이 바닥에 부딪치며 깨졌다.
성좌의 힘, 그것도 높은 격을 지닌 성좌의 힘은 이 세상의 규율에서 벗어난 존재인 나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 번, 한 번 그 격을 강제로 끊어낼 때마다 후폭풍이 장난이 아니었다.
“대체 누가 할 말을.”
수없이 들이켠 포션 때문에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고갈된 에너지를 즉각 다시 채워야만 바로 협회장의 격을 끊어낼 수 있었으니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역도 반드시 유지해야만 돼.’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은밀하게 끌어 모은 격의 일부를 고작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잃었다.
몹시 다급해진 협회장은 모든 여유를 내다 버리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캬아아악!
키에엑!
‘몬스터들은 다 처리됐던 게 아니었던가…?’
대체 어디서 또 나타났는지 모를 몬스터가 성역 밖에서 날카롭게 고함만 질러댔다.
내부로 진입하려다가도 감전되듯 그 자리에 얼어붙기를 몇 차례.
성역 밖은 몬스터 떼들로 바글바글했지만 안쪽은 그 모든 침입에서부터 자유로웠다.
다만.
“처음부터 너를 죽여 없애야만 했는데!”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런, 미친!’
나는 이글거리며 쇄도하는 불꽃을 보며 기겁하여 몸을 옆으로 던졌다.
그 바람에 무릎이 갈린 것처럼 욱신댔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곧장 엎어진 채로 후다닥 몸을 굴리자 그 자리로 수십 개의 칼날이 틀어박혔다.
‘…성역 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성역을 설치해 내 영역으로 만들어 놓은 덕에 협회장이 쓰는 스킬의 위력이 절반 이하로 반감되었기 때문이다.
이 효과를 노리고 사용한 성역이지만 완벽하게 통하니 힘든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가 비죽비죽 샘솟았다.
‘아이고. 바쁘다, 바빠.’
구르고 뒹굴고 달리고 엎어지고.
그러는 와중에도 스킬을 중첩시키고 스태프를 휘두르고.
고갈 현상에 허덕이기 전 포션을 마시고.
정말 죽겠다 싶다.
이건 줄다리기였다.
위태로운 칼날 위에서 펼쳐지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대체 왜 날 방해하는 거지? 이 세상은 유지될 가치가 없을 만큼 썩었어. 되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쾅!
콰쾅!
내 양옆의 땅이 움푹 패었다.
꼴사납기는 하지만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단 말이다! 근본이 어긋나있는데 그 위만 아무리 그럴듯하게 지어놓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지?”
그러니 모두 되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돼.
광기에 물든 목소리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내 가족은 게이트 브레이크 때마다 억지로 내몰렸다. 이유를 아나?”
붉게 충혈된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야 협회장인 내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게이트 브레이크를 우선해서 처리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내 능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내가 사람들을 도우면, 그들은 내 가족을 도우리라 여겼지. 하지만 그들이 택한 건 내 가족을 미끼처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초반의 협회장은 나름대로 사명감이 넘쳤단다.
몬스터를 제거하여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고 평온했던 삶을 되찾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랭크가 높지는 않았지만 수완은 뛰어났다.
그가 가진 스킬의 능력 덕분이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란 대단하지.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는데도 좋은 자원이 나온다는 이유로 그 죽음을 방치하더군.”
나 역시 귀한 재료가 되는 몬스터가 있는 게이트라면 일부러 게이트 브레이크를 유도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항군이 중앙을 상대로 혁명을 일으킨 이유에도 비슷한 사례가 존재했다.
“내가 이 세상을 옳게 만들려고 애쓰는 동안, 이미 세상은 썩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가족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음.
참 안타까운 이야기기는 한데.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행동을 변명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어.’
오히려 더 질이 나쁘다.
“그래서 세상을 되돌리겠다고?”
“그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로이 깨끗하게 시작하는 거다.”
“당신.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당신이 그때 그 인간들보다 더 최악이라는 생각?”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때 차라리 관련자들을 붙잡아 처벌했으면 이해를 하겠어. 근데 이게 뭐야? 당신이 더 나쁘지. 성좌들을 떨어트리고 일부러 게이트를 변이시켰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
“네가 뭘 안다고, 감히!”
“더 끔찍한 게 뭔 줄 알아? 모두 다 자기연민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거야. 복수라는 이름 아래에 더 많은 사람들을 기만해가며 죽음으로 내몰았으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속였다고? 당신은 전 세계를 속이다 못해 사기를 친 거나 마찬가지라고.”
너의 가족이 희생당한 것은 애통한 일이나 그 복수에 이용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들의 수많은 다른 가족들은?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입을 나불댈 수 있는 거겠지.”
협회장이 고개를 흔들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충혈된 눈을 들어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니 성자, 너를 죽여야겠다. 이 세상을 되돌리는 것을 방해하는 너를 치워야겠어. 나는 너무나도 오래 기다렸다. 이젠 기다리는 것도 지쳤어.”
털썩.
협회장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유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지금껏 유한의 격을 흡수하느라 가만히 서서 스킬만 사용해 나를 공격했던 협회장.
‘아직 생각만큼 다 잘라내지 못했는데!’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성역 안에서 디버프 먹은 스킬들은 어떻게 피할 수 있었다지만.
저 협회장이 직접 휘두르는 칼도 과연 나를 비껴갈까?
쾅!
콰쾅!
협회장의 스킬이 교묘하게 내 움직임을 방해했다.
‘망할!’
내가 뒹굴고 구를 때 상대는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협회장과 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진즉 이랬어야 하거늘.”
새파란 칼날이 성역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우리의 악연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바로 지척까지 죽음이 다가오는 습한 냄새가 났다.
카앙!
“…누구 마음대로?”
“어차피 죽을 목숨, 구차하게 굴지 마시고 가지 그러나.”
나동그라진 자세로 얼떨결에 스태프를 들어 칼날을 간신히 막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협회장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는 어투.
그러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화르륵!
그의 양옆으로 수십 개의 화염과 칼날이 생성되었다.
이미 나동그라진 데다 칼을 막느라 움직일 수도 없으니 온몸이 공격에 노출되어있는 상태.
이대로라면 쏟아지는 공격에 꼼짝없이 죽을 일만 남았다.
하지만.
“누가 죽을지는 대봐야 아는 거지.”
나는 비죽이 웃으며 협회장의 충혈된 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
협회장의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 가슴팍을 뚫고 나온 손을 말이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황금빛 눈동자가 내게 속삭였다.
한때의 여파가 잔뜩 묻어 피폐해 보이는 눈가를 휘며 유한이 미소 지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요?”
그와 동시에.
투둑!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며 협회장의 몸이 허물어졌다.
“당신이, 어떻게…? 내가 분명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래진 눈동자.
짧은 순간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이제는 창백하게 탈색되어버린 얼굴로 협회장이 부정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더러운 게 묻어버렸군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협회장을 뒤로한 채, 유한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뜨거운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손이 다가오다 멈칫거리며 멀어진다.
대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새하얀 손이 다가와 질척하고 뜨거운 액체가 묻은 내 뺨을 조심스럽게 훑어내었다.
협회장의 바로 앞에 서 있던 탓에 고스란히 맞게 되었던 액체가 조금씩 닦여나갔다.
“…모자랄 줄 알았어요.”
“아직 온전하지는 않습니다만… 당신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나 힘들게 방법을 찾아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유한의 뒤로 비치는 형상을 응시했다.
상실했던 격의 대다수를 회복한 모습이 찬란했다.
‘아직은 좀 더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지만.’
나는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협회장을 응시했다.
‘그건 곧 알아서 회복되겠지.’
널브러진 몸 주위로 퍼지는 붉은 액체를 따라 협회장의 눈동자에서 생명력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심장을 잃어서일까.
협회장이 억지로 갈취하여 옭아맸던 격의 잔재들이 점차 하나둘씩 희미해지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역시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거려나…?’
속박에서 풀려난 힘이 어디로 향하는지 직접 보았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어째서…. 어떻게…….”
숨이 넘어갈 것처럼 그르륵 대면서도 협회장은 마지막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일 터.
‘뭐, 나도 모험이기는 했지. 훌륭하게 성공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간단한 도식이다.
애초에 협회장이 강탈한 격의 주인은 유한이다.
만약 내가 협회장에게서 격을 제거한다면….
그 격이 원주인인 유한에게로 돌아가지 않을까?
‘해보자.’
그래서 가호를 수십 번 중첩시킨 뒤, 처음으로 뜯어낸 타래를 던져주었다.
누구에게?
유한에게.
끊어진 타래들은 마치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한다는 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사실 내 목표는 유한의 회복보다는 협회장의 몰락에 더 가깝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어쨌거나 유한이 회복하는 모습을 보고 바로 즉석에서 추가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려 전투의 방향을 튼 보람이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발밑에 처절하고 참혹하다 못해 끔찍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모든 것이 눈앞이었거늘…. 곧… 모든 것이…….”
“…….”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까지도 협회장은 의문을 드러냈지만, 당연히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왜 안 죽는 거죠?”
심장이 뽑혔는데.
혹시 이러다가 살아나는 거 아냐?
“불멸을 담았던 잔재가 남아서 그렇습니다. 깨진 그릇이니 얼마 가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 하하…. 쿨럭!”
유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협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결국 죽는 거군.”
허무함이 깃든 것 같은 목소리.
그러나 그 끝에 기이한 열망이 어렸다.
“하지만… 어차피 이 세상은 또다시 반복되겠지.”
흐릿한 두 눈이 허공을 바라본다.
초점 따위 맞지 않았지만 무언가 응시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이 다음의 나는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조금 더 치밀하게 이 세상을 삼킬 수 있겠지…….”
막연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는 피가 그륵그륵 끓어올라 숨쉬기가 힘든 와중에도 읊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쉽군. 아쉬워. 다음에는… 꼭…….”
허공을 부유하던 시선이 천천히 멎었다.
“기다려요. 기다려주렴…. 나의…….”
누구에게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간 텅 빈 동공.
그리고 마지막 숨결까지 모두 흩어진 육신.
그제야 나는 협회장의 죽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이 사람도 달라졌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답은 금방 나왔다.
같은 문제를 놓고도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해결 방안을 내놓기 마련이다.
협회장은 최악에 최악을 거듭한 끔찍한 방식을 선택했고, 그건 내가 조금 더 일찍 그를 만난다 해서 바뀌지 않을 종류의 것이었다.
내 도움이 한 사람의 본질마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크나큰 오만일 테니까.
나는 오랜 시간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인물의 최후를 짧게 일별했다.
더 이상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내게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
길고 험난했던 전투가 비로소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밑바닥까지 에너지를 닥닥 긁어 쓰고 채워 넣기를 반복하며 나 자신을 극한으로 혹사했기 때문일까.
‘죽겠네.’
긴장이 풀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스태프로 후들후들 떨리는 걸음을 다독거리며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정말로 죽겠다.
딱 이대로 쓰러져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보고 싶어.’
나를 지난한 꿈에서 깨우고.
한때는 버리고자 했던 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 그들의 얼굴을.
나는 보고 싶었다.
그들이 무사한지, 멀쩡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모든 일을 빨리 매듭짓고자 했다.
피를 토하든, 내장이 상하든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인데 고작 이 정도 고통이 뭐가 대수라고.’
형편없는 몸에 치유라도 쓰고 싶었지만 참았다.
조금이라도 아껴두어야 하는 힘이었다.
나를 위해서 쓸 힘이 아니었다.
“아…….”
마침내 고대하던 이들을 확인한 내 목에서 꽉 잠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으로 온갖 신을 찾아가며 협박 어린 기도를 올린 보람이 있는지 천만다행으로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내가 꼭 멀쩡하게 되돌려 놓을게요. 치유해줄게요. 알죠? 내 실력.”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지금 울어봤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 나는 울 시간도 아껴 에너지를 쥐어짰다.
“윽….”
진작 바닥이 드러나 메말라 갈라진 탓일까.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 되었다.
‘괜찮아. 이 정도 고통쯤은. 조금만 버티면 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
입 안으로 차오르는 비릿함을 애써 되삼키며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아-
빛무리가 터지고 더 이상 아무런 제약이 없을 이들의 육신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
뭔가 이상했다.
내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가셨다.
“유한 씨.”
차분하려 애쓰지만 끝이 이상하게 떨려 나가는 목소리가 유한을 불렀다.
“이상해요. 왜… 왜 치유가 안 되죠?”
또 한 번 울컥 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켜 누르며 치유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거의 절단되다시피 한 최유성의 한쪽 어깨라든가.
넝마가 되어있는 도원재의 복부.
그리고 석상처럼 굳어있는 하태겸까지.
모두 아무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크루세이더들과 저항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포션… 포션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드러낸 병을 기울여 몇 방울 남지 않은 액체를 갈급하게 마셨다.
아주 조금, 힘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것은 즉시 스킬이 되어 나를 떠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유한 씨. 왜, 왜 이러는 거예요? 분명히 협회장은 죽었는데? 당신도 격을 회복했잖아요…?”
언제부터인지 유한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묵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잖습니까.”
“…뭐가요?”
“협회장의 잔재 말입니다.”
그가 자신을 가리켰다.
“잠깐. 잠깐만요. 유한 씨의 격이… 왜 협회장의 잔재예요? 원래 유한 씨의 소유잖아요?”
“그들을 속박했던 성좌의 힘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해가 되면서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고 싶지 않은 쪽에 더 가까웠다.
“이 세상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테고요.”
무한히 반복된다는, 닫혀있는 세계.
나는 그것이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함만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고여있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꼽자면 나를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바로 이 세상을 이루는 구심점이니까요.”
“…요지가 뭔가요?”
“간단하게 말해서 내 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흐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유한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흐름이란 다시 말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치유’는 그 가능성에서 배제되었다고 말이다.
그 모든 말을 끝낸 유한이 나를 응시했다.
“당신을 독점하고 싶다가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싫으니 내가 생각해도 중증 같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유한이 말했다.
“나를 죽여요.”
내 뺨을 쓸어내렸던 손이 내 손끝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제 가슴 위에 얹고 움직이지 못하게 그 위를 덮는다.
“내 가슴을 갈라 심장을 파괴하면 됩니다. 그자에게 한 것처럼요.”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한 어투로 유한이 말했다.
“나를 죽여요, 나의 성자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서해인. 나의 성자님. 나를 죽여야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이 살 수 있습니다. 모르지 않을 텐데요?”
유한의 목소리가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몰라서 되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저자들을 포기할 생각입니까?”
내가 망설이자 유한이 물었다.
그 질문이 혼란스럽던 내게 불을 붙였다.
“아뇨?! 포기 안 할 건데요?”
오기가 섞인 내 대답에 유한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습니다. 어차피 고여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한하게 되풀이되는 굴레는 이제 벗어던질 때도 되었지요.”
스스로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며 유한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저 작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이유도 없고요.”
닫혀있던 세상을 연다는 의미는 인위적으로 끊긴 시간선이 다시 연결된다는 뜻이다.
고여있던 시간이 흐르면 과거가 되풀이되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사라지게 될 터.
“가장 온건한 시간선을 찾아 연결할 겁니다. 그래도 뭐가 기다릴지는 알 수 없어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까.”
“…그게 본래 미래라는 거니까요.”
“맞아요. 그걸 내가 너무 오래 모르고 있었죠.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결정에 대해 내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그것이 고립일지라도 말이다.
“아. 닫힌 세상을 열고 시간이 흐르게 되면… 나의 성자님. 당신도 더 이상 이방인이라고 불리지 않게 될 겁니다.”
고여있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했다.
“당신이 매번 행복하기를 바랐었는데. 미련하고 또 미련해서 이제야 그 희망을 이루게 되는군요.”
희미한 미소 위에 후련함이 덧씌워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게 무슨 짓이에요!”
유한의 가슴 위에 포개져 있던 내 손바닥 안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하하…. 음. 당신은 너무 상냥해서, 내가 직접 꺼내줄 수밖에요.”
가볍게 웃고 있지만 나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언제 이런 짓 하라고 했어요!”
눈앞이 아득했다.
어째서지?
‘이 사람들은 어째서 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고만 드는 거지?’
나는 상처 입고 쓰러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거리낌 없이 내던졌던 사람들.
그리고 또 한 명.
대수롭지 않다는 웃음과 함께 제 목숨을 내놓은 이가 지금 내 앞에 또 한 명 있다.
“왜, 쿨럭, 그런 표정입니까?”
“당신이 이딴 짓을 했으니까 그렇지!”
누가 심장 쥐여달랬어?!
“저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건 맞지만 그게 당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건 좀 다른 얘기라고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괜찮…습니다. 당신이 살아갈…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면. 내 죽음 따위는, 큼, 싸게 먹히는 대가 같은데요.”
심장을 내게 쥐여주고도 멀쩡한 사람처럼 서 있던 유한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고개가 힘없이 내 어깨에 닿았다.
“정신차려 봐요. 유한 씨. 이봐요! 죽으면 안 돼요. 이거 다시 넣어봐요!”
“당신만이 내 유일한 구원이었, 습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지 말아요. 더 힘 빠지잖아!”
“유일하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그렇기에 변칙적인, 그렇기에… 나를 구원해 준….”
유한의 목소리가 점차 꺼져갔다.
내게 기대어 있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안 돼! 나는 욕심쟁이라 그런 거 몰라! 아무도 안 죽게 할 거야. 다 살리고 말 거라고!”
이 세상의 유일한 힐러면 뭐 하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무력했다.
‘나를 구원이라 말하는 사람들인데도 정작 나는 이 사람들을 살릴 수가 없어.’
정말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얻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려 있었다.
손안에 들려 있는 유한의 심장과 죽어가는 나의 사람들.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결정할 시간이었다.
***
수없이 많은 가능성과 가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이 과연 존재할까?
‘아냐. 의심하면 안 돼.’
없더라도 찾아내야만 한다.
유한에게 말했듯, 나는 욕심쟁이다.
‘분명히 존재할 거야. 누구 하나 잃지 않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 나는 이 세계의 유일한 힐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왜 불려오게 되었는지 한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린 답은 이렇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 세상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치유한다.
그리고 지금.
누가 날 이곳으로 불렀는지 알 것 같기에 나는 더더욱 모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썩은 부분을 들어냈으니 이제 치유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의 본분이자 의무였으며.
구원을 바라는 이를 향한 나의 사명이었다.
1초가 마치 1년처럼 흘러가는 듯했다.
끊임없이 떠올리고 검증하며 생각하고 집중하는 머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아!’
순간, 나는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스태프….”
성좌의 격을 입은 협회장의 스킬을 부술 때.
스태프가 최종 각성을 이루었다는 알림이 떴었다.
‘그때는 확인해 볼 겨를도 없었지.’
나는 한쪽 손을 뻗어 바닥에 나뒹구는 스태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애매한 소리를 토해냈다.
자신을 소모하여 사용자의 의지를 실현한다.
별의 파편이 박혔다는 스태프.
각성을 할 때마다 아이템이면서 묘하게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생동감 넘치는 설명문을 달았던 내 지팡이.
“아, 맙소사.”
이 세상을 누가 지탱하고 있는지 알게 된 지금.
나는 아이템 하나에까지 섬세하게 부여된 능력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것일까.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그는 얼마나 ‘나’를 봐왔던 것일까.
‘나를 위한 안배겠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걸 당신들을 위해 사용할 거야.’
누군가가 말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정답은 내 손안에 있었다.
나는 눈부시게 성장한 스태프를 힘주어 붙잡았다.
부르르!
자신을 알아봐주어 기쁘다는 듯 떨어대는 스태프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줄 수 있겠니?”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스태프가 또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좋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좌의 파편 정도로는 내가 바라는 경지에 못 미쳐. 분명히 모자랄 거야.’
내게 남은 것은 얼마 없었다.
이미 바닥이 보인 에너지.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스킬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게 꼭 그 두 가지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생명에는 생명을 걸면 어떨까?
내 생명의 일부를 불살라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이다.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내 욕심.
“자, 그럼 빨리 해볼까?”
꾸욱.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파아앗!
흰 빛이 터져나가며 시야가 환하게 물들었다.
희망으로 향하는 길.
그 첫발자국을 내딛는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