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0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01화(101/218)
하아, 하아-
흙바닥에 주저앉은 이에게서 가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대비되게도 맞은편에 선 상대방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군.”
“……그럼 시험은 통과입니까?”
무심하게 중얼거린 아슬란의 말에 숨을 가다듬은 테인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슬란은 오묘한 표정으로 그런 테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건을 충족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아슬란의 볼에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실금 같은 상처가 하나 생겨 있었다.
그가 마지막에 일부러 힘을 뺐기에 생긴 상처였지만 아슬란은 구태여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아슬란의 대답에 테인이 안심한 얼굴로 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테인!”
멀리 떨어져 있던 에리타가 뛰다시피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자 테인의 얼굴은 활짝 펴졌고 아슬란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정말 너무하세요! 제가 그렇게 살살 해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아, 아가…….”
아슬란은 에리타의 원망스러워하는 눈빛에 쩔쩔매며 뒤늦은 변명을 하려 했지만 매몰차게 무시당했다.
에리타는 곧바로 울상이 되어 테인을 돌아보았다.
“테인, 괜찮아? 많이 아프지…….”
늑대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에리타는 제 아비의 얼굴에 난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냥 보기에는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상처였지만 아슬란은 쓰린 속을 애써 달래야 했다.
괜스레 흠흠, 소리를 내 보았지만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 한 자락도 얻지 못했다.
애초에 룰은 한쪽이 항복을 외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을 때 대련을 종료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아슬란의 잘못은 아니었다.
끝까지 항복을 외치지 않은 것은 저 늑대였으니.
게다가 저 늑대의 부상은 보이는 것처럼 심하지 않았다.
늑대의 실력이 꽤 괜찮기도 했고, 에리타의 생각과 달리 아슬란은 딸이 아끼는 것이 뻔히 보이는 늑대를 심하게 대할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그 말을 딸 앞에서 꺼낼 수 없었다.
잔뜩 심통이 난 에리타에게 변명을 해 봐야 그래도 적당히 하셨어야죠! 하며 원망 어린 눈빛만 더 받을 것이 분명했다.
“얼른 가자. 내가 치료해 줄게.”
“별로 안 아픈데……. 걱정하지 마세요, 에리타 님.”
쥐어 터진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며 배시시 웃으면 에리타가 더 마음을 쓰리라는 걸 저 늑대는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저 행동이 에리타의 마음을 사기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는 건 한눈에 보였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저 오늘은 저녁 방에서 먹을게요.”
다 지난 겨울이 다시금 찾아왔다고 생각할 만큼이나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였다.
“…….”
“…….”
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늑대를 부축한 에리타가 원망이 잔뜩 묻은 눈빛을 남기고 자리를 뜬 연무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하…….”
테인이 얻어맞는 걸 방관했다는 죄로 같이 덤터기를 쓴 에일런이 짜증스럽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에리타가 들인 게 늑대가 아니라 여우인 것 같은데.”
조금 전 에리타의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아슬란이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에리타가 약한 이들에게 유난히 무르게 구는 건 알고 계셨잖아요.”
“적당히 했다. 겉으로 보기에만 심해 보이는 게야.”
“그러니까 겉으로 안 보이게 하셨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미미하게 짜증이 묻어나는 심드렁한 아들의 대꾸에 아슬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다음에는 네가 직접 나서려무나.”
“저는 굳이 사서 에리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습니다만.”
“……됐다.”
제 아들이지만, 아니, 제 아들이라 그런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속을 긁는 데에 재능이 있는 에일런에 아슬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에리타가 심통이 난 대상은 자신이었으니.
“…….”
옆에서 아슬란이 에리타의 화를 풀어 줄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에일런은 묘한 눈길로 에리타와 테인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늑대가 제 동생을 바라보던 눈빛에 담긴 감정의 결은 알아보기가 쉬웠다.
그런 쪽으로는 지지리도 눈치가 없는 그의 아버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분발하셔야겠습니다, 전하.”
잠시 누군가를 떠올렸던 에일런은 이내 픽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
테인을 데리고 방으로 온 나는 메리에게 상처를 치료할 것들을 부탁했다.
“아가씨, 바깥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응, 알았어. 고마워, 메리.”
깨끗한 수건과 물그릇, 그리고 소독약과 연고 등을 옆에 놓아둔 메리가 테인을 힐끔 보고는 방을 나섰다.
테인은 내가 앉혀 둔 그대로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으음, 일단 상처부터 닦아야겠다.”
“제, 제가 하면 돼요, 에리타 님.”
내가 직접 수건에 물을 적셔 짜내자 테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동동거렸다.
그러면서도 앉아 있으라는 내 말을 어기지 않으려는 듯 일어서지는 않았다.
“아냐, 내가 해 줄게. 눈 좀 감아 볼래?”
아버지의 검 손잡이에 얻어맞은 테인의 눈두덩이는 벌써부터 불그스름하게 부은 게, 내일이 되면 시퍼런 멍으로 변할 기세였다.
여전히 어색하게 몸을 가만두지 못하던 테인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눈을 살포시 감았다.
“정말 제가 해도 되는데…….”
“아프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이래 봬도 나 나름 손재주 좋아.”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에리타 님이 하시기에는 너무 하찮은 일이라서…….”
눈을 감고도 강한 부정을 표한 테인의 잿빛 머리칼에서 회색 늑대 귀가 퐁 튀어나왔다.
나와 둘뿐인 공간이라 편하게 꺼낸 모양이었다.
“……어휴, 잘생긴 얼굴에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속상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 냈다.
보들보들한 수건이긴 하지만 까지고 긁힌 상처에 닿자 따가운 건지 테인의 귀가 움찔거렸다.
뽀얀 얼굴에 난 상처를 보자 마음이 쓰리면서도 다시금 화가 났다.
‘내가 그렇게 살살 해 달라고 했는데! 애초에 순혈 늑대 수인의 실력이면 우리 가문 기사단에서도 최상위 수준인 걸 아버지가 모르지는 않으셨을 테고.’
걱정했던 것만큼 테인의 상처가 심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야속한 건 야속한 거였다.
“저, 에리타 님, 저 정말 괜찮아요.”
얌전히 소파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던 테인이 살짝 눈을 뜨고 순한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멈춘 내 손길과 사나워진 내 얼굴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괜찮기는.”
심하지는 않아도 아마 벗겨 보면 여기저기 멍투성이일 것이다.
우선 드러난 상처 전부에 꼼꼼히 소독약을 바르고 특제 연고를 발랐다.
마법으로 치료를 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의학 부분에 있어서 신성력과 달리 마법은 만능이 아니었다.
마력으로 인한 치료는 자가 치료 능력을 떨어뜨린다나.
“음, 일단 보이는 곳은 전부 약을 발라 뒀어.”
“……감사합니다.”
연고 뚜껑을 닫으며 말하자 소파 위에 늘어진 테인의 꼬리가 작게 흔들렸다.
나는 메리가 놓아두고 간 것 중에서 내 손바닥만 한 동그란 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자, 이건 기사단원들이 애용하는 건데, 멍 든 데에 바르면 효과가 그렇게 좋대.”
테인이 내가 내민 통을 받아 들었다.
“내가 발라 주긴 조금 그러니까 이따가 목욕하고 멍 든 데에 바르면 돼. 저번처럼 또 까먹지 말고. 알았지?”
“그럴게요, 에리타 님.”
여기저기 두들긴 게 내 아버지였음에도 테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실배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테인은 너무 착하다니까.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 아닐까 싶었다.
‘이상한 설문 조사 같은 거 요청하면 쩔쩔매면서도 거절은 못 할 것 같단 말이야.’
그에 비하면 어쩐지 칼리온은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에일런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상상을 하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에리타 님……?”
“아,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한다고.”
혼자 실실 웃는 내 모습에 테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낸 나는 다 쓴 수건과 약들을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은 뒤 테인의 옆에 앉았다.
“음, 일단 테인이 내 호위를 한다고 했으니까…….”
지금이야 수준급 마법사니 호위가 필요 없다지만 어릴 때는 나도 호위가 있었다.
아버지와 에일런이 위험하다고 부득불 우기며 밀어붙인 탓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게 붙었던 호위는 거의 하루 종일 내 뒤를 따라다녔다.
정원에서 산책을 할 때마저 따라붙는 탓에 굉장히 싫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 드릴게요.”
굳이 나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나는 진지한 얼굴의 테인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어, 어?”
“예전에 유르젠 님에게 귀족의 호위는 무슨 일을 하는지 배웠어요. 그러니까 저 잘할 수 있어요.”
테인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아주 비장하게 말했다.
기세만 본다면 황제의 호위 못지않았다.
그런 테인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하하, 그런 것도 배웠어?”
“……에리타 님이 불편하시면 안 되니까요. 유르젠 님이 저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눈꼬리를 길게 휘며 묻자 살짝 고개를 끄덕인 테인이 수줍게 대답했다.
“응, 그럼 믿고 맡길게.”
결국 나는 명목만 호위로 하고 편히 지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렇게 준비까지 잔뜩 해 왔다는데 괜히 초를 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
테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저택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자 시간은 금방 흘렀다.
아까 연무장에서 말한 대로 저녁은 내 방에서 테인과 둘이 같이 먹었다.
“테인, 정말 괜찮겠어? 집에서 왔다 갔다 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저 여기서 에리타 님이랑 같이 지내고 싶어요.”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테인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상단 건물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저택에서 유르젠과 둘이 사는 테인인지라 출퇴근을 권유했지만 테인은 거절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나는 테인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 테인 네가 원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아까 안내해 줬던 방까지 가는 길은 기억해?”
“네, 기억하고 있어요.”
내 물음에 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행이다. 앞으로 쉬고 싶을 때나 밤에 잘 때는 거기로 가면 돼.”
내가 테인에게 내준 방은 에일런의 방이 있는 층에 위치한 손님용 방이었다.
손님용이라고 해도 커다란 침대와 옷장, 그리고 화장대와 책상 등은 옵션으로 딸린 곳이니 당장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음, 그럼 테인, 내일 보자. 밤에는 방 밖에 서 있지 말고. 알았지?”
“……네에.”
밤에는 밖에 서 있지 말라는 말에 조금 시무룩해진 테인이었으나 금세 알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테인을 배웅한 뒤.
나는 곧장 책상에 앉아 만년필을 움직였다.
-전하, 시간 괜찮으실 때 답장 남겨 주세요!
물론 대상은 아까 전 떠올렸던 칼리온이었다.
내가 글을 남기고 이삼 분이 지났을 즈음.
[마침 지금 시간이 나네요. 저녁은 드셨습니까.]내 글씨 밑으로 칼리온의 대답이 생겨났다.
오늘 먹은 저녁 메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짧게 필담을 나눈 후, 나는 본론을 적어 내렸다.
-혹시 내일 잠깐 만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