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0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03화(103/218)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칼리온과 테인은 문제없이 얘기를 잘 나누었다.
‘잘하고 있네.’
나는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칼리온이 도착하기 전, 나는 테인에게 수인들의 뜻은 그가 직접 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아무리 내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칼리온과 만났을 때 테인은 수인 전체를 대표하는 입장이니까.
아무리 칼리온에게라도 내가 수인들의 뜻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나와 칼리온의 사이와 수인들과 칼리온의 사이는 별개였으니.
-제가 눈을 감기 전에는 수인들이 당당히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백 년도 더 전 아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 수인들.
하지만 수인들이 모습을 감추고 숨어서 살게 된 것은 그들이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해 어둡고 외진 산맥 깊은 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제가 도울게요. 제가 아는 이 황자 전하라면 절대 수인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칼리온이 그러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원작에서 이미 봤던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수인들은 아일라의 뜻대로 칼리온을 도왔고, 칼리온은 그런 수인들이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겠지.
전개가 틀어졌을지라도 내가 아는 칼리온이라면 수인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부분을 생각해서라도 수인들의 뜻을 전하는 건 내가 아니라 테인이어야 했다.
이틀 전 편지로 전해 받은 테인의 아버지, 수인들의 수장의 뜻도 그러했고.
테인의 아버지는 수인들이 좁은 둥지를 벗어나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기 위해 바델산맥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만약에 많이 힘들 것 같으면 내가 대신 전해 줘도 돼. 하지만 테인만 괜찮다면 나는 테인이 직접 전하께 수인들을 뜻을 전했으면 좋겠어.
-…….
-전하의 입장에서도 수인들의 협력은 큰 도움일 테니까 절대 거절하지 않으실 거야. 원래 어려울 때 손을 뻗은 사람만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거든.
나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 내 말에 눈동자를 떨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한번 해 보겠다던 테인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엄청 잘하는구만.’
칼리온만큼 능숙하진 않아도 테인 역시 한 무리의 대표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저런 건 타고나는 걸까.
“……자세한 사항들은 다음에 정식으로 뵙게 되었을 때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흐뭇한 표정으로 테인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얘기를 마무리한 테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언제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냐는 듯 테인의 얼굴이 다시 몽글몽글하게 풀렸다.
평소에 내게 보이던 순하디순한 얼굴이었다.
“에리타 양.”
테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옅게 웃던 나를 칼리온이 불렀다.
“네, 전하.”
“좋은 자리를 만들어 주어 고맙습니다. 그대 덕분에 수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군요.”
칼리온이 눈꼬리를 나붓이 휘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본 눈웃음은 여전히 예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수려했다.
잠시 넋을 놓을 만큼이나 그린 듯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조금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아녜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구요.”
내가 다리를 놔 준 건 맞지만 어차피 앞으로 수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칼리온과 테인에게 달린 거였다.
지금 테인과 칼리온이 만난 건 앞으로 있을 일의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런 부분까지 내가 손을 뻗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수인들의 힘을 필요로 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수인들을 내 부하처럼 부려 먹고 마음대로 거취를 정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와 수인들도 사적인 인연을 기반으로 한 협력 관계였다.
그렇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칼리온이 테인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고 부탁했다.
“자리를…… 말입니까?”
“에리타 양과 할 얘기가 있어서. 개인적인 용건이니 양해해 주었으면 좋겠군.”
칼리온의 말에 테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곱게 깜빡이는 눈은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
“응, 전하와 나눌 얘기가 좀 있어서. 아마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오늘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면 돼. 유르젠을 만나러 가도 괜찮고.”
그런 내 대답에 테인의 얼굴에 시무룩한 기색이 어렸다.
“그럼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을게요.”
귀가 나와 있었다면 축 늘어뜨리고 있었을 테인이 선택한 건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것이었다.
결국 순한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간 테인이 조용한 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테인을 쫓아내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그대는 항상 저를 놀라게 하는군요.”
잠시 테인이 나간 곳을 바라보던 내 귀에 칼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게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아 눈을 깜빡이자 칼리온이 작게 웃었다.
“저번에는 라그라스 상단이며 흑마법에 관해 잘 알고 계셔서 저를 놀라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이번에는 수백 년 전 스스로 존재를 숨겼던 수인들을 제게 데려다주셨구요.”
칼리온의 말을 들으니 그가 나를 그렇게 여길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간격으로 대형 소식을 뻥뻥 터뜨린 꼴이었으니까.
“하하……,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는 칼리온에 나는 볼을 문지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기가 막힌 눈빛을 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도 아니고.
내가 알린 게 전부 좋은 소식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조금 민망했다.
무언가 말을 돌릴 게 없나 생각하던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오늘의 용건이었다.
“아, 잠시만요.”
잠시 양해를 구한 나는 작업대 위에 놓아두었던 보석함을 챙겨 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칼리온과의 자리를 마련한 건 못다 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저 아티팩트를 주기 위한 이유의 비중이 더 컸다.
나는 손바닥만 한 보석함을 소파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건 보석함이 아닙니까.”
그걸 본 칼리온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가늘어진 눈을 보니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보석함을 가져온 내 의중을 헤아리고 있는 듯싶었다.
“저번에 제가 전하에게 걸려 있는 저주를 파훼하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잊을 수가 없지요.
칼리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얼굴에는 큰 기대가 엿보이지는 않았다.
그 얼굴에 서린 감정은 애써 기대를 억누르는, 체념이라는 것을 닮아 있었다.
‘……망할 황후 같으니.’
속으로 황후를 잘근잘근 씹은 나는 뜸 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전하에게 걸려 있는 흑마법을 파훼할 수는 없어요.”
아직 술식이 불안정하며 필요한 재료도 전부 구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칼리온은 내 말에 별다른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쩐지 그런 표정이 안타까워 나는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주의 효과를 어느 정도 상쇄하는 건 가능해요.”
“……상쇄라니.”
담담하던 칼리온의 벽안이 크게 뜨였다.
나는 곧장 놓아두었던 보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반지 하나와 팔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온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손보았던 아티팩트 두 개였다.
“이건 제가 만든 아티팩트예요.”
“설마…….”
칼리온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심한 두통을 느낀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나는 먼저 반지를 콕 집었다.
“이 반지는 저주의 효과를 흩어지게 해요. 정확히는 착용한 자에게 다가온 흑마력을 정화하는 역할이에요.”
그다음으로는 팔찌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팔찌는 전하에게 저주를 건 사람이 저주가 상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역할이고요.”
“그런…….”
“그래서 번거로우시더라도 항상 이 두 개를 같이 착용하고 계셔야 해요. 음, 그리고 조금 민망하지만 아예 완성작은 아니라서 가끔은 제가 마력을 충전하기도 해야 하구요.”
말을 마친 나는 보석함 뚜껑을 연 채로 칼리온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보석함을 내려다보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 칼리온의 심정이 복잡한 상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자그마치 삼 년을 시달렸다고 했었지.’
막연히 체질 덕이라 짐작하는 이유로 인해 저주의 효과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자그마치 삼 년 동안이나 뇌를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 살아온 칼리온이다.
눈 깜빡임 한 번에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고통이라니.
그가 겪었을 과거는 상상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칼리온이 스스로 보석함에 손을 뻗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켰다.
때로는 누군가의 따뜻한 침묵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