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0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07화(107/218)
그렇게 위태로운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매일같이 있던 수업이 없었으며 웬일로 황비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는 황비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척했으나 평소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칼리온.”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부름에 칼리온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그가 울지 않았던 건 꾸역꾸역 참아 냈던 것이지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니었으니까.
“어머니…….”
“이리 오렴, 내 아들.”
혹여나 제가 다가가면 부담이 될까 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칼리온은 황비의 부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실라는 그런 칼리온을 마른 팔로 힘없이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안아 본 그녀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왜 이제야 일어나셨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웅얼거리듯이 들려온 어린 아들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사이에 저 벌써 역사서를 전부 읽었어요. 지금은 룬어를 배우고 있는데, 저는 마법에 재능이 없대요.”
언제 또 어미가 잠들지 몰라 칼리온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 냈다.
“어제는 벤 경과 대련을 했는데, 평소보다 오라를 더 잘 썼어요. 못된 사람이 나타나면 제가 어머니를 지켜 드릴 거예요.”
칼리온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대화한다기보다는 말을 쏟아 내는 것에 가까웠다.
아실라는 눈을 감고 그런 아들이 말을 마칠 때까지 가만가만 등을 쓸어 주었다.
제가 아니면 황궁에서 정 붙일 데 하나 없는 아이였다.
아니, 제가 없다면 입지조차 위태로운 아이였다.
증오스러운 황제는 제 핏줄에 관심이 없었고, 한때는 그녀의 친구였던 아이샤는 도리어 그녀와 칼리온을 증오했다.
“……어머니, 듣고 계시지요?”
그녀의 답이 들리지 않자 또 잠이 든 걸까 불안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든 칼리온의 얼굴에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듣고 있단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그렇다 대답을 하니 그제야 칼리온이 다시금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아실라는 단 한 사람, 희망을 걸 수 있는 이를 떠올렸다.
-아실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세르비아 크로바하츠.
언제나 다정했던 세르비아는 그녀가 원치 않는 자리에 올라야 했을 때 가장 크게 분노해 주었다.
그 상대가 제국의 황제였음에도 세르비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망할 종마 같은 새끼……. 아실라, 너 진짜 괜찮아? 너는 아이가 걱정된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더 걱정돼.
-……괜찮아, 세르비아. 나만 모른 척하면 돼. 그럼 내 아이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네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가 행복할 수 있겠어……. 차라리 나랑 같이 대공령으로 가자. 거기라면 그 새끼도 마음대로 못 올 거야.
차라리 저와 같이 대공령으로 떠나자던 다정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여리고 순한 얼굴을 하고는 항상 그 누구보다 강한 친구였다.
-대공 전하께서는 반기지 않으실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그이가 먼저 내 마음 편한 대로 하라고 했는걸. 네가 원하면 흔적까지 전부 지워 준다고 했단 말이야.
-정말?
-응, 정말로. 그러니까 대공령으로 가자. 네 아이가 태어나면 에일런이랑 친구 맺어 주면 되겠다. 안 그래도 대공령에 또래 애가 없어서 걱정이었거든. 우리 같이 그렇게 살자. 응?
아실라가 내린 결정을 이미 아는 듯이 세르비아의 말은 절박했다.
만약 아실라가 대공령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세르비아는 제 친구를 위해 기꺼이 황제와 척을 질 터였다.
제 친구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 어떤 무리한 일이라도 쉬이 해낼 사람이었으니.
세르비아를 목숨처럼 사랑하는 크로바하츠 대공 역시 아실라 그녀를 받아 줄 것이었다.
하지만 아실라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
-너도 황궁으로 가는 거 원하지 않잖아. 너 정말 거기 가서 어떡하려고 그래, 응? ……황궁에 황제만 있는 거 아니잖아.
아실라는 세르비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아이샤 레노센.
한때는 누구보다 친했으나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 옛 친구.
-……그래도 너랑 대공 전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아실라, 제발! 네가 나한테 어떻게 폐가 될 수 있어……. 네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고도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냐고! 제발 너를 먼저 생각하면 안 돼?
-미안해, 세르비아.
변하지 않는 제 결정에 결국 네 마음대로 하라며 소리치고는 이내 엉엉 울던 세르비아.
종내는 저를 꼭 안아 주며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하던 세르비아.
-대신 언제든지 힘들면 나한테 말해 줘. 혹시나 내가 없더라도 아슬란이라면 너와 네 아이를 도와줄 거야. 알았지?
-알았어. ……고마워, 세르비아.
그렇게 말한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몇 년이었다.
‘……세르비아.’
이제 와서 세르비아도 아닌 대공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염치없는 짓이라는 건 아실라도 알았다.
그녀를 사랑했던 제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으니까.
하지만 아실라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었고, 이 제국에서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크로바하츠가 유일했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아이를 지켜 줄 힘을 가진 유일한 사람.
“……칼리온.”
아실라의 부름에 갈라진 목소리로도 꿋꿋이 말을 이어 가던 칼리온이 말을 멈추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아실라의 말을 기다렸다.
아실라는 그런 칼리온을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여 이 어미가 먼저 네 곁을 떠나거든…….”
“싫어요.”
칼리온이 빠르게 아실라의 말을 끊었다.
“황자.”
아실라의 부름에도 칼리온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울음을 머금은 갈라진 미성이 잘게 떨렸다.
“어머니는 금세 일어나실 거잖아요. 제가 커서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까지 지켜봐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어른의 말을 끊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칼리온도 알았으나 어미의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가…….’
그런 아들을 보는 아실라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칼리온이 어떤 마음으로 고집스레 제 말을 끊었는지를 알기에 아실라는 그저 칼리온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직한 속삭임으로는 상처 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은 아실라 자신이 가장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루하루 숨을 쉬는 게 버거워졌고, 점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짧아졌다.
간신히 눈을 뜨고 있더라도 정신이 흐릴 때가 더 많았다.
‘……길어야 한 달을 넘지 못하겠지.’
누군가 그리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칼리온이 상처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정신이 맑은 지금 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새겨들으렴.”
“어머니…….”
“……이 어미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어.”
결국 잔인한 말을 잇는 아실라에 칼리온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알고 있지만 그랬기에 더 무시하고 싶던 사실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렴. 어미가 죽으면 크로바하츠 대공께 찾아가거라.”
“…….”
“내 장례식 날이 되면 내 시녀가 네게 편지를 하나 전해 줄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그 말을 들은 칼리온의 얼굴이 엉망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아픈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칼리온은 소리 없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
“편지에는 대공께 가는 방법이 적혀 있을 거야.”
지금 그녀의 서랍 안에 들어 있는 편지 두 개.
하나는 남겨질 아들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아들을 지켜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에게 보낼 것이었다.
“……만약에 대공께서 거절하시면요.”
작은 칼리온의 물음은 아실라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었다.
만약 크로바하츠 대공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
사실 대공에게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 저 사이에 있는 연결 고리라고는 세상을 떠난 세르비아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미약한 희망에 기댈 만큼 지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설사 칼리온이 황족의 지위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레노센은 칼리온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었다.
이름뿐인 황비라고는 하나 그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달랐다.
황제는 칼리온을 지켜 주지 않을 테고, 그녀의 아버지인 발레리아 후작은 레노센의 공작으로 힘을 전부 잃었다.
황후와 레노센의 손아귀에서 칼리온을 지킬 방법은 크로바하츠 대공이 유일했다.
아실라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녀에게는 원망스러운 현실에 좌절할 시간조차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