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화(11/218)
“저……,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에일런을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나는 조심스레 우리의 목적지를 물었다.
‘구경이라고는 했는데…….’
아까 밖에서 보았던 저택의 크기를 생각할 때 오늘 다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에일런과 함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충분히 좋았지만.
“아, 에리타가 좋아할 만한 곳이 어딘가 잠시 생각하느라…….”
내 말에 멈칫한 에일런이 걸음을 멈추고 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다리 아프면 잠시 쉬었다 갈까?”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눈꼬리에는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역시 원작은 무언가 잘못된 거 아닐까?
아버지도 그렇고 에일런 역시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악당이라니.
이상해도 아주 많이 이상했다.
“아, 아니에요. 그 정도로 약하진 않은데…….”
“음. 에리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고작 몇 분 걷고 다리가 아플 정도로 약하진 않다고 말했지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에일런은 그다지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에일런 역시 나를 무슨 솜사탕처럼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진짜예요…….”
“그래. 알았어.”
믿어 주지 않는 것이 억울해 진짜라며 웅얼거리자 웃음을 터뜨린 에일런이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래. 그럼 저 앞에 서재가 있는데 거기부터 갈까? 책밖에 없긴 해도 나름 볼만하거든.”
“서재요?”
“응. 안에 소파도 있으니까 같이 앉아서 책 보기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잠시 고민하던 에일런이 꺼내 든 해결책은 한 열 걸음만 더 걸으면 될 것 같은 저 앞의 서재였다.
소파 이야기를 하는 거로 보아 여전히 내가 다리를 아파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심통이 났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에일런의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저도 책 좋아해요.”
“그래?”
“네에. 고아원에는 책이 거의 없었지만…….”
“흐음. 그럼 가서 같이 에리타가 좋아하는 책을 찾아보자.”
괜찮지? 빙긋 웃으며 묻는 에일런의 물음에 답하려는 찰나, 내 뒤쪽에서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이쪽을 보며 눈을 빛내는 하녀들이 보였다.
“…… 님이 웃으셨어……!”
“세상에……, 근데 아가씨도 완전 귀 …….”
속닥이는 탓에 무어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우리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아 저절로 귀가 그쪽으로 향했다.
나를 바라보던 에일런 역시 내 시선을 따라 뒤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힉!”
그러자 에일런과 눈이 마주친 것인지 그들이 바짝 얼어붙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만.”
낮게 한숨을 내쉰 에일런이 저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것 같아 나는 일부러 그의 손을 꾹 붙잡았다.
에일런이 아무리 착하다고 한들 주인 일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용인들을 봐줄 만큼 무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딱히 나쁜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고개를 돌린 바람에 혼나게 된다면 조금 미안할 것 같았다.
“저는 오라버니가 가는 거 싫어요…….”
“에리타?”
“빨리 책도 보고 싶구…….”
어쩌다 보니 조르는 모양새가 되어 버려 부끄러움이 몰려왔지만 나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도 꿋꿋이 에일런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에일런이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속으로 그가 내 행동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랐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에일런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내 동생은 착하기도 하지.”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하녀들에게 그만 가 보라며 짤막하게 말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자리를 뜨는 그들의 발걸음이 조급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나는 그제야 화끈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아, 진짜…….’
오늘 하루에만 몇 번씩이고 감정이 널을 뛰었다.
“에리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갈 수가 없는데.”
그런 내 위로 웃음이 잔뜩 어린 에일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여전히 뜨거운 얼굴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마주친 에일런의 얼굴에는 여전히 예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죄송해요…….”
“응?”
“그, 제가 막았잖아요…….”
하지만 아까의 내 행동은 딱히 바른 행동이 아니었기에 나는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만약 그들이 나 때문에 혼난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를 좋아하는 에일런의 마음을 이용한, 그저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좋았는데.”
민망함도 잠시, 자책하던 나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는 에일런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네?”
“아까 에리타가 내 손을 이렇게 잡아 주면서 내가 가는 거 싫다고 했잖아.”
고운 손 안에 잡힌 내 손이 움찔거렸다.
“그건…….”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던 내 행동에도 기뻐해 주는 에일런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콕콕 저렸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에일런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입술을 꾹 짓씹었다.
탁
육중한 소리를 내며 서재 문이 닫혔다.
바닥에서 시선을 뗀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장면에 눈을 크게 떴다. 저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와아…….”
수천 권은 될 법한 책들과 높다란 천장이 웅장했다.
서재라는 말에 책장이 많은 방 정도를 떠올렸던 내 생각과는 달리, 연회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엄청 크지?”
“그냥 방일 줄 알았는데…….”
“음, 이백 년쯤 전에 책을 좋아하시던 선조께서 층을 허물어서 만드셨다나 봐.”
“와…….”
“아무래도 서재보다는 도서관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지?”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에. 책이 좋아서 서재를 이렇게나 크게 만든 거야?
그것도 층을 세 개쯤 허문 거 같은데.
“층을 세 개 허물어서 입구도 세 개야. 에리타 방이 있는 층에도 문이 있으니까 오고 싶을 때 편하게 오면 돼.”
세 개나 허문 거 맞구나.
역시 도서관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문을 열자마자 보인 소파를 지나쳐 책장 사이를 따라 깊숙이 걸음을 옮겼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워낙 넓은 터라 과장 조금 보태 여기서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일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기에 그냥 양옆으로 늘어진 책장을 구경하며 같이 걸었다.
“다 왔다.”
신기해하는 눈길로 두리번거리던 나는 에일런의 말에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도서관의 끝이었다.
평범하게 보이는 벽에는 책장 대신 포근해 보이는 소파와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조금 눈 부실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에일런의 말에 무언가 특별한 게 있나 눈을 가늘게 뜨고 벽을 쳐다보았다.
눈 부신 게 어디 있지.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흘린 에일런이 한 책장으로 다가서더니 나무로 된 옆면을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
그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경이 드러났다.
방금까지 평범한 벽이던 곳이 전부 투명한 통유리로 바뀌었다.
새하얀 햇살을 품은 빛은 눈이 부실 만큼 환했으며, 동시에 푸르렀다.
“바깥이…….”
나는 천천히 벽을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쿵쿵 뛰어 대는 심장은 내 마음일까.
바깥과 이곳은 분명 벽으로 막혀 있을 텐데.
조심스레 시원한 유리에 손을 올린 나는 멍하니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았다.
“네게 보여 주고 싶었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에일런이 있었다.
“이렇게 예쁜 정원은 처음 봐요.”
나는 다시금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책을 읽던 언젠가, 막연히 상상해 보았던 꿈의 정원이 이런 모습일까.
가슴이 먹먹해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푸른 땅 위로 그려진 다채로운 색들의 향연에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렸을 때의 너도 이곳을 좋아했어.”
“…….”
“우리 잠깐 앉을까?”
에일런이 옆에 있는 소파를 톡톡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에일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후원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서 꾸미신 거야.”
“아버지가요?”
내 물음에 에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셨거든.”
“아…….”
“정원을 직접 꾸미는 게 꿈이셨다나 봐.”
그 말을 하며 에일런이 픽 웃었다.
그럼 저 정원은 세르비아가 꾸민 건가?
“그런데 어머니가 손을 댔더니 꽃이고 풀이고 전부 시들어 버렸대.”
……응?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
흔들리는 시선으로 에일런을 바라보자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쉬며 웃었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지만 무언가를 가꾸고 돌보는 데는 재능이 없으셨거든.”
“그런…….”
“그래서 실망한 어머니 대신에 아버지께서 직접 정원을 만드신 거야. 이건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있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설치하신 마법의 일종이고.”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려하지만 단아하고,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듯한 공간.
나는 이 후원을 원작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아슬란이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던 장면,
그가 쓸쓸한 독백을 하던 곳이었다.
그게 세르비아의 정원이었구나.
어쩐지 아슬란의 비밀 한 조각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 장면은 그의 최후를 얼마 남기지 않은 때, 였지…….
원작을 떠올리자 기분이 나빠진 나는 애써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아직 원작에서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안 좋은 생각은 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살며시 옆을 바라보자 마주친 시선이 따스했다.
입술을 깨문 나는 내 옆에 놓인 에일런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왜 그래?”
의아해하는 에일런의 표정이 보였지만 나는 그냥 좋아서요…… 대답하며 작게 웃었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나는 아버지만큼이나 에일런이 좋았다.
그러니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원작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게 내가 지킬게요.
따스한 손을 붙잡고 굳게 다짐하던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에일런의 눈이 낮게 가라앉은 것을 보지 못했다.
***
“에리타.”
“네?”
“정원에 나가 볼래?”
책은 뒷전으로 하고 에일런과 이야기를 하던 나는 그의 부름에 여상히 대답했다가 뒤이어 나온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아까부터 힐끔힐끔 밖을 쳐다보고는 있었는데…….
“가고 싶어요!”
아주 찰나의 고민을 한 나는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일런이 마치 디저트를 먹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같은 웃음을 그려 냈다.
“그렇게 좋아?”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네.
부드러운 손길로 내 볼을 톡 건드리고 작게 웃는 에일런의 뒷말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무슨 애가 말을 이렇게 한담…….’
분명 커서 제국 제일가는 남자가 될 것이 분명해.
진짜 예쁘게 웃는 게 누군데.
나는 발그레해진 얼굴을 식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일런을 바라보았다.
“그럼 갈까?”
다정한 말과 함께 내게 손을 내미는 에일런의 모습이 마치 에스코트를 하는 기사처럼 단정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행복하다는 감정이 나를 가득 감쌌다.
“……네!”
나는 기쁘게 그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