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3화(113/218)
그 후 칼리온에게 그가 전쟁터에서 지냈던 약 사 년간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칼리온은 전쟁 영웅이었고, 따라서 그의 행보는 대부분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유르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상단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나도 대륙 정세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했으므로 칼리온에 대한 정보 역시 전부 받아 보고 있었다.
‘다행히 흑마법에 대해서는 딱히 특별한 얘기가 없었고.’
저주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알고 있는 증상과 다른 점이 없었다.
두통과 악몽, 그리고 페른이 확인했던 흑마법의 흔적.
어째서 그에게 저주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것저것 책을 뒤져 보아도 그에 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다.
황실의 피에 무언가 있나 싶어도 칼리온 자신이 모르니 나도 알 수 없었고.
“음, 어쨌든 저주를 파훼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만한 건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그렇습니까?”
“네에, 한 달 안으로는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페른 경이랑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나는 다부지게 손을 꾹 쥐며 자신 있게 말했다.
술식을 보완하는 건 거의 마무리 단계니 남은 건 재료 수급뿐이었다.
그때 칼리온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페른 경에게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여럿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용 청구는 제 보좌관 앞으로 하라고 얘기해 두었는데, 그대가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칼리온의 말에 내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안 그래도 페른에게서 칼리온이 비용은 자기 앞으로 달아 두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그런데…….
나는 신중히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음, 전하.”
“네, 에리타 양.”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돈이 없는 편은 아니에요. 조금 재수 없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차고 넘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내 말에 칼리온이 다감한 눈을 깜빡였다.
나는 칼리온에게 비용을 청구할 생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순전히 내가 돕고 싶어서 하는 거였다.
그럴 능력도 충분히 있고.
애초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 줄 때 재고 따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에리타 양.”
칼리온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음, 전하, 이런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내 물음에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친한 사람끼리 돈이 오가기 시작하면 사이가 틀어진대요.”
내 말을 들은 칼리온의 얼굴에 잠시 당황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아니, 황당인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생긋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랑 틀어지고 싶지 않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돈이 오가는 게 아니라 재료비를 청구하라는 거였지만, 이거나 그거나 똑같지, 뭐.
하지만 칼리온의 표정은 여전히 미묘했다.
“음, 그럼 전하께서 저한테 주신 노트로 퉁치는 걸로 해요.”
“……노트?”
“네, 노트.”
나는 손가락을 튕겨 작업대 위에 있던 노트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칼리온의 앞에 살포시 놓아두었다.
“이것도 보통 아티팩트는 아니잖아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닌가요?”
노트 위를 톡톡 두드린 나는 씩 웃으며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정말 그대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칼리온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밀어붙이는 나를 이기지 못한 건 칼리온이었다.
그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대신 어떤 재료가 필요한지 정도는 제게도 알려 주세요. 저도 같이 구해 보겠습니다.”
“음……, 그럼 필요한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해서 보내 드릴게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싫다고 하면 칼리온의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뭐, 전부 다 적진 않을 거지만.’
적당히 칼리온이 구할 수 있을 것들로 부탁할 예정이었다.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말하기를 잠시.
“전하,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는데요…….”
“편히 물어보세요.”
나는 조금 망설였다.
그럴 확률은 매우 적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칼리온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괜히 나만 민망할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 묻지 않으면 계속 궁금하겠지.
결국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전하와 황궁이 아닌 곳에서 만난 적이 있나요?”
내 의문은 칼리온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칼리온은 처음부터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리안의 행세를 하며 나와 마주쳤을 때부터.
내가 기억하기로 수도로 오기 전까지 칼리온과 얼굴을 맞댔던 건 팔 년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왠지 칼리온의 태도만 보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칼리온이 아버지와 손을 잡았다고 해도 얼마 전까지는 나와 관련이 없던 얘기였다.
나는 그 사실을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칼리온은 내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고 오히려 내게 되물어 왔다.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에는 확연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목소리 역시 사근사근한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저를 알고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셨어요. 전하께서 아버지와 손을 잡으셨다고는 해도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이니까, 팔 년 동안 저는 전하와 접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잖아요.”
“흐음…….”
차근차근 설명하는 내 말에 칼리온이 낮게 목을 울렸다.
내가 칼리온을 친근하게 여기는 것에야 그가 원작의 남주인공이라는 이유가 존재했다.
‘……칼리온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칼리온이 나를 친근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내가 아버지의 딸이고 에일런의 동생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건 아닌 것 같은 감이 들었다.
만약 내 감이 틀린 거면 그냥 쪽팔린 거고.
……생각해 보니까 좀 많이 쪽팔릴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해 주세요. 저 지금 좀 부끄럽거든요.”
내가 재촉 아닌 재촉을 하자 칼리온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렸다.
“만난 적이 있냐고 물으시면…….”
“…….”
“예,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그러고는 눈매를 다정히 접으며 답했다.
***
칼리온은 내 질문에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는 긍정만 해 주고는 입을 다물었다.
딱 다물린 저 잘난 입술이 오늘따라 굉장히 얄미워 보였다.
“정말 얘기 안 해 주실 거예요?”
나도 모르게 불퉁한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딱히 말투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 안 해 드릴 겁니다.”
칼리온은 장난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하라고 물은 게 아닌데.
단호한 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내가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굳게 잠긴 문을 두드렸다.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창문을 내다보았다.
아직 해가 아주 긴 계절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바깥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
“시간 가는지 모르고 얘기했네요.”
“그러게요…….”
칼리온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아마 메리나 테인 두 사람 중 한 명일 것 같은데.
달칵-
나는 칼리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문을 열었다.
……응?
그러자 다정한 내 오라버니의 얼굴이 보였다.
“……오라버니?”
“안녕, 에리타.”
예상치도 못한 에일런의 등장에 당황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에리타 님.”
“어, 테인…….”
그러자 에일런의 옆쪽에서 테인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아니, 이게 무슨 조합이람.
에일런과 테인이라니.
마치 커피와 매운 닭꼬치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었다.
“왜 두 사람이 같이 와요?”
“음, 연무장에서 만나서 같이 대련했거든. 그보다…….”
옅은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 에일런이 조그맣게 열린 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내 동생이 혼자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이대로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다.
“알고 왔으면서 괜히 떠보기는.”
내 뒤에서 낮은 목소리와 함께 칼리온 특유의 시원한 향이 훅 끼쳤다.
“아, 전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내 뒤에 서 있는 칼리온이 보였다.
“……곤란하신 듯하여. 아니었다면 미안합니다.”
“아, 아녜요. 안 그래도 전하께 여쭤보려고 했었어요.”
칼리온이 조금만 더 다가와도 그의 가슴팍에 닿을 것 같아 나는 슬그머니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리타 님.”
그때 테인이 나를 불렀다.
“으응?”
그제야 칼리온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테인의 모습에 금세 걱정이 차올랐다.
“테인,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오라버니랑 너무 무리해서 대련했나?”
습관처럼 테인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나는 아차, 하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복도에서 얘기를 계속하긴 좀 그랬으니.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
내가 몸을 살짝 물리려 하자 칼리온이 먼저 옆으로 비켜났다.
“그럼 잠깐 들어갈게.”
나와 칼리온이 비켜선 자리로 에일런이 들어왔다.
“테인 너도 들어와.”
“……그래도 되나요?”
테인이 순한 눈망울로 연구실 내부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괜히 호위 기사로 데려와 눈치를 보게 만든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당연하지. 내 호위니까 옆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
부러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나를 따라 배시시 웃은 테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소파로 걸어간 나는 평소처럼 테인과 나란히 앉았다.
그러자 에일런과 칼리온이 어딘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혹시 내 뒤에 뭐가 있나 싶어 힐끗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에일런이 픽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흘겨보았지만 에일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근데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오늘 전하께서 오시는 거 비밀이었는데…….”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에일런은 별다른 답을 해 주지 않고 나직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십 분 정도의 어색한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나만 어색하지, 또.’
에일런의 성격이야 잘 알았고 테인은 말을 하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왜 자꾸 보고 웃어.’
그나마 이 중에서 제일 나긋나긋한 성격을 가진 칼리온은 아까부터 자꾸 예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계속 웃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건지.
하여튼 이 어색한 공기 속에서 고통받는 건 나밖에 없어 보였다.
“음, 시간이…….”
결국 어색한 공기를 이기지 못한 나는 뻣뻣한 말투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쉽지만 저녁 시간이 다 되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보는 게 좋겠군요.”
내 말에 낮게 웃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칼리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