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4화(114/218)
에리타와 칼리온이 얘기를 나누는 시간의 다른 장소.
넓은 연무장에서는 수십의 기사들이 저마다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무표정한 얼굴의 테인이 들어섰다.
“오, 저 친구도 훈련하러 왔나 본데.”
“뭐야, 누군데 그래?”
“아, 그때 자네는 파견 갔었나? 저 친구가 새로 온 아가씨의 호위 기사인데 아가씨께서 직접 데리고 오셨다고 하더군.”
“아가씨께서 직접?”
“그렇다니까.”
“흠, 가서 대련이나 해 보자고 할까.”
“됐네요. 단장님 말씀은 뭐로 들었냐? 같은 기사단 내에서 괜히 시비 걸지 말라잖아.”
“시비라니! 그냥 신입이 들어왔으니까 실력이나 한번 볼까 했던 거지…….”
“웃기고 있네. 대공 전하가 인정하신 실력인데 자네가 봐서 뭣 하나?”
소문이 무성하던 새 호위의 등장에 기사들의 관심이 쏠렸다.
개중에는 아슬란과 테인의 대련 당시 자리에 없었던 기사들도 많았다.
호기심과 호승심이 섞인 시선이 따갑도록 쏟아졌지만 테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가 적당한 구석에 멈춰 선 테인은 가볍게 몸을 풀면서도 에리타의 연구실 쪽을 힐끗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다고 두꺼운 벽과 강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내부가 보일 리도 없는데 말이다.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과 달리 그의 속은 꽤 초조한 상태였다.
‘에리타 님…….’
몇 분 전 처음으로 대면한 황자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제 주인의 말대로 황자는 수인들이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조만간 아버지께서 숲을 나오시면 한 번 더 조율해 보아야겠지만 오늘의 대화는 확실히 유익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테인은 다른 이의 감정을 빠르게 알아챘다.
늑대 특유의 감일 수도 있고 격투장에서 남의 눈치를 보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 테인은 에리타를 바라보는 칼리온의 눈빛에 스민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애초에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아니, 감출 필요가 없는 거였나.’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린 건 테인뿐이 아니었다.
지금껏 잘 눌러 왔다고 생각한 감정은 사실 바람 한 번 불면 훅 날아갈 지푸라기로 덮어 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키잉-
어느 정도 몸이 풀리자 테인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매끈한 검집을 조심스레 제 겉옷 위에 올려 두었다.
하나뿐인 제 주인의 머리칼을 닮아 새까만 검집은 에리타가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에리타와 만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자, 이건 내가 주는 선물. 검은 유르젠이 좋은 거로 구해 줬다고 해서 나는 검집을 준비했거든.
조금 쑥스러워 보이는 표정의 에리타가 검집을 내밀었다.
새까만 몸집에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검집이었다.
-유르젠한테 들었는데 검은색이 제일 좋다고 했다며. 어때, 마음에 들어?
자신이 멍하니 검집을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이자 제 주인은 나직하게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얼른 받아. 나 팔 아파.
웃음기가 스민 말투에 테인은 자신도 모르게 후다닥 팔을 뻗어 검집을 받아 들었다.
팔이 아프다는 말과는 다르게 검집은 가벼웠다.
-내가 검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냥 검에 따라서 크기가 달라지는 마법 정도만 새겼거든.
그냥 새겼다고 하기에는 가치가 높은 물건이었지만 당시의 테인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몰랐다.
그저 에리타에게 받은 선물이었기에 가치를 부여했고 그랬기에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을 뿐이었다.
기실 테인은 에리타가 준 것이라면 그게 하찮은 나뭇가지일지라도 지금과 같이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테인이 사랑하는 법은 그랬다.
부웅- 휘익-
잡생각을 덜어 내기 위해 휘둘러지는 검이 유려한 선을 그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 탓에 공기를 가르는 검격은 평소보다 과격했다.
에리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테인은 알 수 있었다.
제 주인이 어떤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았는지.
아직은 미약했으나 그 기반이 어떤 감정인지 모르지 않았다.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잖아.’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격투장에서 갇혀 살며 배운 건 포기하는 방법과 체념하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강하게 뿌리를 내린 감정은 포기가 되지 않았고 체념이 되지 않았다.
해서 테인은 제 감정을 홀로 간직하기를 선택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만히 속으로 보듬기를 선택했다.
‘그분 옆에 있는 걸로 충분해.’
그러니 지금 느끼는 짙고 추한 감정을 빨리 떨쳐 내야 했다.
자신의 선택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또한 상냥한 에리타의 얼굴에 미안함이 서리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챙-
누군가 거칠게 내질러지던 테인의 검을 가볍게 걷어 냈다.
“잡생각이 너무 많아.”
그와 동시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갑작스러운 방해에 당황한 테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인 건 계속해서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던 이와 똑같은 흑발이었다.
다른 점은 테인이 생각하던 이는 다감하고 상냥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졌지만 지금 앞에 선 이는 서늘한 적안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소대공님을 뵙습니다.”
테인은 놀란 기색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엉거주춤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겨누고 있던 검 끝을 거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에리타의 호위 기사가 되었으니 인간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테인도 잘 알았다.
“지금 그대는 내 동생의 호위 신분이니 하대에 기분 나빠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편하신 대로.”
에일런의 불친절한 말에 테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런은 제 주인의 가족이자, 차후 크로바하츠를 이끌 사람이었다.
아무리 테인이 수인족의 후계자라 한들 크로바하츠 소대공에게 존대를 바라기에는 애매한 위치였다.
“테인이라 하였지.”
에일런의 말에 테인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호위 기사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음에 분노했을 테지만 에일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검을 배웠지?”
다만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건 어찌하여 물으시는지.”
어딘가 미묘하게 경계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에일런은 그런 테인의 대답에 픽 웃었다.
역시 이 늑대는 제 동생의 앞에서만 고분고분하고 순진한 행세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 역시 그랬으니.
에일런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키기보다 죽이기에 적합한 검을 사용하던데.”
“…….”
“그런 검은 내 동생을 지키기에 적절하지 않아.”
에일런의 말에 테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검을 배운 환경은 평범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었다.
그런 곳에서 배운 검이니 누군가를 지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에일런의 말은 사실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테인은 겨우겨우 알고 있다는 답을 꺼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에리타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를 되뇌고 있던 그에게 에일런의 말은 아프게 다가왔다.
그가 품은 감정도, 그가 휘두르는 검도.
전부 에리타의 곁에 있기에는 자격 미달이었다.
“하면 다시 배울 생각은 있나?”
그때, 에일런의 건조한 목소리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게 무슨…….”
테인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에일런은 그런 테인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며 한 번 더 말했다.
“내 동생을 지킬 수 있는 검으로 다시 배우겠느냐 물었다.”
테인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해가 되는 제안은 아니었다.
에일런의 시선에서는 테인을 향한 호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왜 내치지 않으십니까.”
테인의 물음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에일런은 무심한 손길로 검을 갈무리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선 너를 내치면 내 동생이 슬퍼하겠지. 나는 그 아이가 항상 행복하길 바라니 그 선택은 딱히 끌리지 않는군.”
에리타에 관해 말할 때 서늘했던 적안에 옅은 온기가 스몄다.
그건 가족에 관해 이야기하는 에리타의 눈빛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검을…….”
테인이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에일런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아이의 곁에서 잠시 머물다 물러날 건가?”
테인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렇게 묻는 에일런을 바라보았다.
분명 소대공은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보다는 그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옳은 말이었다.
서늘한 적안에는 호의도 적의도 없었다.
테인은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때 에일런이 조금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너 달 있다 떠날 생각이라면 나도 더는 권하지 않도록 하지. 떠날 이라면 신경 쓸 가치가 없으니.”
그제야 테인은 에일런이 어떤 의도로 그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아닙니다.”
그랬기에 테인은 단호하게 답했다.
고작 서너 달 곁에 있다 떠날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깊은 속마음에서 바라는 자리는 그가 절대 가질 수 없었기에 에리타의 곁에 있기 위해 스스로 구한 자리가 호위였다.
에일런의 제안은 스스로가 택한 자리에 충실하라는 뜻이었으며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보답받기를 바라지 말자 다짐했던 감정이다.
홀로 간직하자 결심했던 감정이다.
그렇기에 테인은 지금 허락받은 이 자리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테인은 단단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키는 검을, 배우겠습니다.”
“그래.”
돌아온 답은 짧은 허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