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5화(115/218)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랑스러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으…….”
잠시 소파에 기대 있던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르게 앉아 있던 자세를 허물어뜨렸다.
역시 사람은 누워 있을 때 제일 편하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내쉬던 나는 한 시간쯤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칼리온에게서 직접 들은 팔 년 전 이야기와 그가 전쟁터에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
그 길었던 대화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황제도 쓰레기고 황후도 쓰레기야.’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권력을 방패 삼아 일방적인 감정을 강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제에 가깝게 아실라를 취한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는 개자식이었다.
이곳이 판타지 세계가 아닌 현대였다면 그냥 바로 감옥행이었을 텐데.
그리고 황후는 스스로를 가련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기에는 저지른 짓이 너무 악독했다.
‘아실라를 죽인 거로도 모자라서 칼리온을 전쟁터로 내몰고 저주까지 걸었지.’
황후의 죄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세르비아를 죽인 것도 황후잖아.”
솔직히 말해 황후가 세르비아를 죽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실라와 칼리온을 증오하는 건 황제 때문이라는 이유를 알지만 세르비아는 도대체 왜?
아실라가 황비로 들어가며 세르비아와 황후의 사이도 틀어졌기 때문인가?
정확한 이유는 황후만이 알고 있겠지.
세르비아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이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 몰랐을 테니까.
“차라리 그게 다행인가…….”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이가 제 죽음을 사주했다는 건 가혹한 사실이었다.
괜히 입 안이 썼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몸을 뒤집었다.
낮춰 둔 밝기 덕에 천장에 달린 마법 등을 보았음에도 딱히 눈이 아프지 않았다.
조금 우울한 생각을 떨쳐 낸 나는 칼리온이 대답해 주지 않고 간 내 의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나는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
칼리온은 떠나기 전까지도 결국 내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에일런과 테인이 있어서라고 하기에는 애초에 그 전부터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니, 황궁 밖에서 우리가 언제 만났었냐고.
칼리온은 언젠가 우리가 황궁 밖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것만 알려 주고 언제 어디서냐는 내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떠나기 전 슬그머니 다시 묻는 내게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비밀입니다.
-네?
-사람에게는 저마다 홀로 간직하고픈 순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대와 만났던 순간이 제게는 그러하네요.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속 시원하게 알려 주면 어디 덧나냐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아도 어딘가에서 칼리온과 만났던 기억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칼리온이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분명히 어디선가 만난 적은 있을 텐데.
그게 어딘지도 언젠지도 안 알려 준단 말이야.
결국 나는 잠들기 전까지도 내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
다음 날 아침.
“아가씨, 저 메리예요.”
“응,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메리가 후다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모습과 달리 어딘가 들뜬 듯한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오늘따라 들떠 보이네.”
그렇게 물은 내 시선이 메리의 품에 안겨 있는 상자로 향했다.
메리가 기분 좋은 이유가 저건가?
“그럼요! 이제 본격적인 사교 시즌이 시작되잖아요. 이거 보세요. 전부 아가씨께 온 초대장들이랍니다!”
내 물음에 밝은 목소리로 종알거린 메리가 내 시선이 닿았던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초대장?”
메리의 답에 내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어쩐지 묵직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상자는 구두 한 켤레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우선 제가 추린 것들이에요. 여기 있는 것들은 나름 명망 있는 가문들에서 온 거라 아가씨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열어 볼게.”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하하 웃으며 느릿하게 상자의 뚜껑을 잡았다.
보통의 경우에는 은쟁반이나 보석함 비슷한 편지함에 가져오는데 오늘은 왜 이런 커다란 상자인 걸까.
‘그냥 운 나쁘게 마침 편지함이 없었다든가 그런 일이었으면…….’
상자의 뚜껑을 연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메리.”
“네?”
“이게 다 내가 직접 답장해야 하는 초대장들이라고?”
아니지? 아니라고 해 주면 안 될까.
“음, 웬만해서는 아가씨께서 직접 하시는 게 좋죠.”
내 자그만 희망은 다정한 얼굴의 메리에 의해서 산산이 조각났다.
상자 안을 절반 정도 채운 편지는 어림잡아도 서른 개 이상이었다.
제국에 명망 있는 귀족들이 이렇게나 많단 말이야?
아무리 땅덩어리가 넓어도 그렇지.
“이게 다 초대장이라고……?”
나는 벌써 질려 오는 기분에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거기다 이게 이미 메리가 일 차로 추린 것들이라니.
귀족들이 무슨 파티다 모임이다 이래저래 모이는 걸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나는 차오르는 한숨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칼리온의 저주를 파훼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도 시기가 따라 주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과 동시에 찾아온 사교 시즌.
귀족 특유의 가식적인 행동들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시기였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지금에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 안에 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면 괜히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 게 뻔하니까.
“일단 얘기 나온 김에 지금 다 봐야겠네.”
내가 귀족인 이상 이건 의무나 다름없었다.
물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에일런은 무어라 하지 않을 테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필요는 없으니까.
“메리, 나 좀 도와줄래?”
“그럼요!”
그렇게 나는 메리와 함께 편지 개봉식을 시작했다.
***
메리의 도움을 받아 갈 만한 파티와 모임을 전부 추려 낸 나는 방만한 자세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점심을 먹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으니 뒹굴뒹굴하며 쉴 생각이었다.
“이런 걸 어떻게 맨날 하는 거야…….”
정확히 서른넉 장의 편지를 다 추려 내는 데에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참석할 파티를 최소한으로 골라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이런 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한댔지.’
처음 사교계에 데뷔하는 영애들은 집안의 여성 어른의 도움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엄마나 이모, 위로 올라가면 할머니까지.
하지만 대공가에는 안주인 역할을 할 여자가 나뿐이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와주시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는 그냥 됐으니까 다 가지 말라고 하실 것 같단 말이지.’
메리가 슬쩍 말해 준 건데 사실 아버지의 눈치를 봐 초대장을 보내지 못한 귀족들도 많다고 했다.
그 말은 백작가나 후작가의 영애들은 나보다 더 많은 초대장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휴,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지.”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삼십 분이 조금 넘도록 게으르게 뒹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마치 수분을 잔뜩 머금은 밀가루 반죽처럼 축 늘어져 있던 나는 메리의 부름에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누워 있고 싶었지만 그러면 아버지와 에일런의 잔뜩 실망한 얼굴을 보게 되겠지.
“아가씨, 혹시 준비 도와드릴까요?”
“아냐, 지금 나갈게!”
메리의 물음에 금방 나간다고 대답한 나는 머리를 쓱쓱 빗은 뒤 옷차림을 정돈했다.
달칵-
문을 열고 나서자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메리와 순하디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테인이 보였다.
‘……아직은 테인이 어색한 모양이네.’
메리와 시선을 주고받은 나는 테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테인,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어쩜, 초대장을 처리하는 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잖아.
“저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니까요.”
설마 하며 물은 내게 테인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테인이 진짜 내 호위 기사이기만 했다면 나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 테지만…….
“그럴 필요 없다니까……. 서 있기 힘드니까 그냥 방 안에 들어와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
“앗, 아가씨, 주인님께서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내가 미안함에 테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있을 때, 메리가 쏙 끼어들었다.
“……엥, 아버지가?”
“네에.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건 절.대. 금지라고 하셨거든요. 특.히. 테인 님한테는 명심하라는 말을 전하셨답니다.”
평소와 달리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메리의 말투는 단호했다.
절대와 특히에 악센트까지 줬다.
그건 메리도 아버지의 말에 찬성한다는 뜻이었다.
테인은 그런 메리의 말을 듣고도 둥그런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버지는 저 순한 테인의 어디를 보고 자꾸 경계하시는 거야.
아버지의 과보호는 겪어도 겪어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
“오늘 아침에 하신 말씀이니까요.”
메리가 순한 얼굴로 똑 부러지게 답했다.
아니, 메리 너까지 아버지한테 홀랑 넘어간 거야?
“그, 테인은 나랑 원래부터 알던 사이고…….”
“세상에, 아가씨, 그렇게 순진하셔서 어떡해요!”
떨떠름한 표정을 한 내게 메리는 아가씨는 조심성이 너무 없으시다며 소곤거렸다.
나름 테인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그런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수인의 청력은 인간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그러니 테인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메리의 말을 전부 들었음이 분명했다.
하여튼 아버지의 과보호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중에 테인은 남동생 같은 존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려야겠다.
“……일단은 알았어.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밑에 계셔?”
“네, 두 분은 먼저 와 계셔요.”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메리의 걱정이 멈추었다.
나는 여전히 망부석처럼 내 옆에 꼭 붙어 서 있는 테인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테인, 나 밥 먹고 올 테니까 너도 가서 점심 먹고 와.”
“식당 밖에서 에리타 님 기다리면 안 되나요?”
“그……, 아냐, 안 돼.”
곧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 테인에게 순간적으로 그래, 라는 답을 할 뻔했으나 나는 간신히 거절했다.
내 거절에 테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아마 귀와 꼬리가 나와 있었으면 같이 축 처졌을 테지.
“점심 먹고 밖에 갈 건데 그러려면 테인 너도 점심 먹어야지.”
“……!”
“그러니까 얼른 가서 먹고 와. 알았지?”
“네!”
살짝 뻗친 앞머리를 톡톡 털어 주며 말하자 시들었던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처럼 테인의 표정이 환해졌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테인이 기사 전용 식당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가씨.”
“응?”
고개를 돌리자 떨떠름한 표정의 메리가 보였다.
메리는 나를 한 번, 그리고 긴 다리로 금세 시야에서 멀어진 테인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왜 그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메리는 ‘……아무것도 아녜요.’라고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는 어딘가 비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냥 제가 정신을 더 바짝 차릴게요.”
“으응, 그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테인과 얘기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나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식당으로 향했다.
“아가.”
“에리타, 왔어?”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아버지와 에일런이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럴 것 없다. 우리도 방금 왔으니.”
“얼른 앉아.”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멋쩍게 헤헤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의자에 엉덩이를 댐과 동시에 주방 입구에서 에반이 트레이를 끌며 나타났다.
나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에반, 좋은 점심이에요.”
“허허, 아가씨께서도 푹 주무셨는지요? 역시 아가씨께서 내려오시니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습니다.”
에반은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한 번씩 시선을 두고는 인자하게 웃었다.
“아이참……, 에반이 자꾸 그렇게 말하면 제가 맨날 내려올 수밖에 없잖아요.”
“허허, 아가씨를 자주 본다면 이 늙은이야 좋지요.”
처음에는 저런 에반의 말에 당황해 어색한 웃음만 흘렸지만 이제는 배시시 웃으며 받아칠 수 있었다.
“하여튼 나이가 들더니 쓸데없는 말만 늘었어.”
그런 우리의 옆에서 미간을 좁힌 아버지가 못마땅해하는 어투로 말했다.
물론 아버지를 코찔찔이 시절부터 봐 왔다는 에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늘도 고마워요, 에반!”
“아가씨께서 맛있게 드셔 주시는 게 제 낙이랍니다.”
인사를 마치고 에반이 식당을 떠나려던 순간 생각난 사실에 나는 급히 에반을 붙잡았다.
“아, 에반, 혹시 그 간식 좀 더 부탁해도 될까요?”
“아이들에게 주시는 간식 말씀입니까?”
“맞아요. 음,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애가 좀 커서…….”
“허허, 새로운 아이를 만나셨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까지 만들어 놓지요.”
“역시 에반이 최고예요!”
내 호들갑에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허허 웃은 에반은 가서 준비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무슨 간식을 말하는 게야?”
“새로운 아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에반이 자리를 떠난 후, 나는 아버지와 에일런의 질문 세례에 시달렸다.
결국 나는 소리치듯 칼리온의 새에게 줄 간식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