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7화(117/218)
“휴, 역시 뭘 할지 모를 때는 돈을 쓰는 게 최고야.”
나는 상쾌하게 중얼거렸다.
“…….”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테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그늘이 져 있었다.
지금은 내 아공간에 들어 있는 옷의 개수와 가격을 본 뒤로는 더 그랬다.
“……테인,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선물 주는 거 싫어?”
나는 그제야 흘긋 테인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는 이것보다 많은 선물도 기뻐하며 받았던 테인이라 솔직히 이렇게까지 꺼릴 줄 몰랐다.
내 물음에 테인은 나를 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선물은 제가 먼저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소심하게 이야기했다.
내 눈에 축 처진 귀와 꼬리가 겹쳐 보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테인을 끌어안고 예뻐해 주고픈 마음을 꾹 참으려 애를 썼다.
‘이게 바로 육아에서 느끼는 뿌듯함인가.’
테인은 내 아이가 아니었으나 남동생과도 같은 아이였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나이는 고작 숫자에 불과했다.
하여튼 의사를 표현하는 법도, 글을 쓰는 법도, 세상에 대해서도 모르던 처음의 테인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그저 감동적이었다.
“……나한테 선물을 주려고 했어?”
“네에, 유르젠 님이 그러면 주인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테인이 숙였던 고개를 살며시 들며 수줍게 긍정했다.
“어휴, 유르젠도 참. 바쁘다면서 이래저래 신경을 많이 쓰고 있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유르젠도 테인도 이제는 내 가족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생각해 주는 게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겠어.
테인을 바라보자 순한 얼굴에는 여전히 내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듯한 고집이 서려 있었다.
“그럼 테인 네가 선물을 주기 전까지는 저 옷들 내가 가지고 있을게.”
“아…….”
“대신 너무 늦으면 안 돼. 내가 먼저 주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알았지?”
“네, 네! 그럴게요!”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었지만 테인은 내 결정이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자신이 먼저 선물을 주고 싶다는 마음인 듯했다.
***
쇼핑을 마친 후 나와 테인은 별다른 목적지 없이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잡화점에 들러 구경도 하고 무기점에 들러서 테인에게 어울리는 단검도 하나 샀다.
내가 지갑을 꺼내려 들자 한사코 거절한 테인은 본인이 돈을 내더니 아주 만족한 얼굴로 무기점을 나섰다.
원래 호위할 때 필요한 소모용 무기나 장비는 가문에서 지급해 주는 거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좋아?”
내 불퉁한 물음에도 테인은 순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상태를 보니 테인이 주는 선물을 받기 전까지 내가 뭔가를 주는 건 영 그른 듯싶었다.
“테인한테 어울리는 거 사는 게 인생의 낙이었는데…….”
우울하게 중얼거려 보았으나 테인은 낑낑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면서도 그럼 선물을 받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게 다 유르젠이랑 같이 있더니 그 대쪽 같은 고집이 옮아서 그래.’
나는 속으로 말도 안 되는 불만을 웅얼거렸다.
유르젠이 들으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대쪽 같은 고집을 가지신 게 누군데요.’라고 답할 게 뻔했다.
물론 그 누구는 나겠지.
“으휴,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어.”
나는 결국 허허 웃는 것을 택했다.
내가 웃자 낑낑거리던 테인이 저도 따라 웃었다.
그 후로도 나와 테인은 조금 더 발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런 우리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테인은 맨날 초코아이스크림만 먹네.”
“아…….”
내 말에 테인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테인은 옛날부터 초콜릿 맛을 좋아했었지.
뭐, 맛있긴 하지만.
“옛날에 유르젠이 테인 네 초콜릿 먹어서 한동안 심통 나 있었던 거 기억난다.”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건 잊어 주세요…….”
테인 역시 그때를 기억해 낸 모양인지 붉어진 얼굴로 속삭이듯 부탁했다.
“아하하, 부끄러워서 그래? 괜찮아, 귀여웠어.”
“그래도요…….”
보통은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는 테인이었지만 이번에는 꽤 강경하게 주장했다.
아무래도 본인은 흑역사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후후, 알았어. 잊을게.”
내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안심이 된 모양인지 테인이 나를 따라 헤헤 웃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 테인과 함께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때였다.
내 귓가에 한 단어가 꽂혀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축복의 날이네.”
축복의 날?
생소한 단어였다.
옆을 바라보자 테인도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축복의 날? 그게 뭔데?”
다행히 우리 둘만 모르는 것이 아닌 모양인지 다른 한 명이 말을 꺼낸 이에게 물었다.
“나도 어제 옆집 벤자민한테 들은 건데 일주일 뒤에 신전에 찾아가면 사제님들이 축복을 내려 준다고 하더군.”
“평민들에게도?”
“그래, 그렇다니까.”
나는 걸음을 늦추며 티 나지 않게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슬그머니 걷는 속도를 늦추자 내 옆에서 따라 걷던 테인 역시 보폭을 좁혔다.
“흐음,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무슨 소리야?”
“아니, 뭐, 평민들한테도 축복의 기회를 주는 건 좋지만 우리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인 이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 비싼 축복 헌금을 마련하느냔 말이지.”
그 말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의 헌금을 내면 사제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제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을 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효능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던데.’
사제의 축복에는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다나 뭐라나.
내가 보기에는 영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진짜로 축복의 효능을 믿었다.
하지만 내 주위에도 신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었다.
아니,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신전을 싫어하는구나.
아버지도 에일런도, 그리고 칼리온도.
그때 축복의 날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사람이 마저 설명을 이었다.
“아냐, 이번 축복의 날에는 평민들을 대상으로 헌금을 받지 않고 사제님들이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고 했어.”
“뭐? 그럼 공짜란 소리야?”
“그렇지.”
남자의 말에 내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 신전은 황후와 레노센의 편이라고 했다.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을 텐데.
“뭐, 듣기로는 일 황자 전하께서 평민들을 위해 신전에 직접 부탁하셨다고 하던데.”
“오오, 그럼 나도 아내랑 같이 가 봐야겠구먼.”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입에서 일 황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벌써 밑밥을 깔기 시작했구나.’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일 황자 측은 벌써 이미지 관리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신전은 황후와 손을 잡았으니 그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그러고 보니까 신전에도 한번 들러 보려고 했는데.’
신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들를 이유가 있긴 했다.
‘조만간 가 봐야겠어.’
지금도 시간이 있긴 했지만 평민처럼 입고 있었기에 신전에 가도 환영받지 못할 게 뻔했다.
내가 신전에 가려는 건 1인 기도실에 가기 위함이니까.
‘다음에 한번 날을 잡아야겠네.’
***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목욕까지 마치고 나자 나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해졌다.
그렇다고 당장 잠이 오는 건 아니라서 나는 노트 두 권과 만년필 하나를 챙겨 침대 위로 올라갔다.
가로 길이와 세로 길이가 비슷한 침대는 아무렇게나 엎드려도 내 몸보다 길었다.
“음, 일단 할 일부터 하는 게 좋겠지.”
단순한 표지의 노트를 펼치자 짤막한 단어 여러 개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페이지가 나타났다.
그중 대부분은 체크 표시가 된 채였다.
칼리온의 저주를 파훼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흐음, 재료 준비는 거의 다 됐네.”
확실히 칼리온이 함께 준비하니 시간이 단축되긴 했다.
그럼에도 아직 남은 재료들은 있었지만 그건 기다리면 저절로 손에 들어올 거니까.
“뭐, 다음 주쯤이면 되려나. 한번 가 보긴 해야 하는데…….”
내가 남은 재료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웅-
침대로 가지고 올라왔던 두 권의 노트 중 얌전히 옆에 놓아두었던 노트에서 미약한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익숙한 파장이었다.
나는 후다닥 노트를 집어 들었다. 스스로는 몰랐지만 원래 보고 있던 노트는 저 멀리 팽개쳐진 상태였다.
칼리온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노트를 펼치는 내 얼굴이 밝았다.
[달이 밝습니다.]적혀 있는 건 짧은 문장이었다.
내 시선이 저절로 커튼을 걷어 둔 창문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낮게 뜬 달이 환하게 밤을 밝히고 있었다.
“……확실히 밝네.”
잠시 달을 구경한 나는 침대에 가지고 올라왔던 만년필을 들어 답장을 썼다.
-정말 밝네요. 제가 있는 곳에서도 달이 잘 보여요.
그렇게 쓰고 보니 엎드려 있는 자세 탓인지 평소보다 찌그러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답을 쓰는 거라 글자가 찌그러졌어요:(
그래서 나는 사족을 덧붙였다.
마릴린이 가르쳐 준 우는 표정까지 꼼꼼히 그려 놓고 나자 조금 과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우자니 더 이상했다.
[찌그러져도 귀엽네요:)]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나타난 답장에 사라졌다.
“……뭐야, 귀여워.”
칼리온 역시 입 모양만 바꾼 표정을 그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 따라 하신 건가요?
[네, 따라 한 겁니다.]그렇게 표정 그림으로 시작된 필담은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끝났고, 겨우 노트를 덮은 나는 꿈 없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