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8화(118/218)
며칠 후의 아침.
“아, 가기 싫어…….”
메리가 목욕물을 준비하는 사이 나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휘감은 채로 미적거렸다.
평소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오늘따라 침대와 한 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들었다.
“그냥 눈 감았다 뜨면 내일 아침이었으면 좋겠다…….”
“아가씨도 참. 그렇게 가기 싫으셔요?”
싫음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자 준비를 마친 메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어 왔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는 실내파인 게 분명해. 이불 밖은 위험하다구…….”
아무렴.
옛말에 집을 나서면 고생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주 정확한 말이었다.
“에이, 그래도 가셔야죠. 직접 답장까지 보내셨으면서.”
메리는 다정한 얼굴과 상반되는 단호한 손짓으로 나를 일으켰다.
나는 메리에게 이끌려 비척비척 일어나면서도 침통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나도 알지…….”
나흘 전 내가 직접 쓴 서른네 장의 답장 중 긍정을 표한 건 총 다섯 장이었다.
초대에 응하는 기준은 파티의 규모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초대한 이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메리가 미처 알지 못해 거르지 못했던 것들은 내가 알아서 걸러 냈다.
가령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문란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베르체 백작가의 차녀가 주최하는 소규모 파티나, 아랫도리가 한없이 가벼운 데른 후작가 장남의 생일 연회 같은 것 말이다.
‘그런 데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골라내고 골라내다 보니 괜찮은 파티는 딱 열 개가 남았다.
‘그렇다고 열 개를 다 가는 건 너무 많으니까.’
결국 내가 긍정의 답을 보낸 건 거기서 과감하게 반으로 확 줄여 버린 다섯 군데였다.
오늘은 그중 첫 번째인 사비에르 후작 영애의 티타임이 있는 날이었다.
“하아…….”
목욕을 마친 후 머리를 말리고 골라 놓은 드레스로 갈아입는 도중에도 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시름은 여전했다.
‘나는 그냥 협소한 인간관계가 좋은데.’
화려하고 시끌시끌한 파티 같은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물론 북부에서도 엠마나 릴리와 함께 간단한 티타임 정도는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격식이 필요 없는 사적인 자리였단 말이지.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오늘은 황궁 무도회를 제외하고 내가 처음으로 사교계에 나서는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아가씨가 오늘따라 걱정이 많으시네……. 그, 저번에 사비에르 후작 영애께서 아가씨께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응, 그랬지.”
“그럼 아가씨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 더 좋지 않으세요? 조금 도도하다는 걸 빼면 다른 소문들도 전부 괜찮구요.”
“으음, 글쎄…….”
메리의 말에 나는 떨떠름하게 말을 흐렸다.
사비에르 후작 영애, 그러니까 바이올렛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당황스러웠던 황궁에서의 만남뿐이 아니라 내게 보낸 초대장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난히 두툼한 봉투가 있다 했더니 사비에르 후작가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누가 초대장으로 편지를 세 장이나 써서 보내냐고.’
뭐, 결국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긴 했지만.
“메리, 나 기다리면서 응원해 줘야 해……. 알았지?”
“어머, 그럼요. 아가씨라면 틀림없이 잘하고 오실 수 있을 거예요.”
“메리이……!”
나는 잔뜩 감동한 얼굴을 하며 메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이제 화장할게요. 오늘도 너무 진하지 않게 해 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네에, 편하게 눈 감고 계셔요.”
조심스러운 손길이 얼굴 위를 매만졌다.
중간에 마릴린이 합세해 내 머리까지 만지니 준비가 끝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가씨, 오늘 너무 어여쁘세요!”
“메리는 나보고 맨날 예쁘다고 하잖아. 영 신빙성이 없는데…….”
“그야 사실인걸요! 그렇지, 마릴린?”
메리가 동의를 구하자 마릴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자신감을 좀 가지실 필요가 있으세요.”
그러더니 자신감을 가지라며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담담한 표정과 힘찬 손짓의 조화가 아주 요상했다.
“아니, 표정이랑 손짓이 너무 따로 노는 거 아냐?”
그 웃긴 행동에 나와 메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어?”
마차를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내 눈에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웬일인지 아버지와 에일런이 모두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내 구두 소리를 들은 건지 얘기를 나누던 아버지와 에일런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오라버니!”
후다닥 계단을 마저 내려가 두 사람의 앞에 서자 내 뒤를 따라오던 테인과 메리가 두 걸음씩 물러났다.
“자꾸 뛰지 말라니까.”
“습관이 돼서…….”
다정한 아버지의 타박에 실없이 웃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도 별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그때 두 사람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간단한 셔츠 차림인 데에 반해 에일런은 외출용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 오라버니도 어디 가세요?”
내 물음에 에일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황궁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
“아하…….”
혹시 칼리온을 만나러 가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지만 주위에 사용인들이 여럿 있었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정 궁금하면 이따 집에 돌아와서 에일런이나 칼리온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그럼 아버지는 오라버니 배웅하러 나오신 거예요?”
내 말에 아버지가 수려한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네가 지금 나간다고 해서 내려온 거란다.”
“아하하…….”
아버지의 매정한 대답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호위를 데려가려고?”
그때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주던 에일런이 내게 물었다.
방금까지 바라보고 있던 게 테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려구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몸을 돌려 테인과 눈을 마주했다.
가문 기사단의 제복을 빠짐없이 챙겨 입은 테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하게 웃었다.
“나 참…….”
앞에서 아버지의 못마땅해하는 한숨이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눈치 좋게 끼어든 테르반 덕분에 나는 어색하지 않게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
“힘들거든 억지로 앉아 있지 말고 나오려무나.”
“아하하……. 다녀와서 봬요!”
아버지의 인사는 과격한 구석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를 위한 말이었으니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그렇다고 정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생각은 없었지만.
***
마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렸다.
커튼을 살짝 걷고 바깥을 바라보자 내가 모르는 길로 접어들어 있었다.
전생으로 따지면 부자들이 사는 전원주택 단지라고 해야 할까.
보통 귀족이 사는 저택이라고 하면 본채 하나 별채 하나 그리고 정원은 기본으로 딸려 있다고 생각하면 됐다.
“집에 가고 싶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턱을 괴었다.
“가기 싫으신 거예요?”
그때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테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고개를 들자 내가 걱정스러운 듯 눈꼬리가 처진 테인의 얼굴이 보였다.
“으응, 뭐…….”
나는 힘없이 긍정했다.
그러자 테인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머리에서 퐁- 하고 늑대 귀를 꺼냈다.
“……제 귀 만지셔도 돼요.”
그러고는 얌전히 상체를 숙여 내게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지금껏 우울하던 것도 잊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시원한 웃음에 테인은 귓가를 붉게 물들이면서도 귀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지금 나 기분 좋아지라고 그러는 거야?”
겨우겨우 폭소를 갈무리했지만 목소리에 묻은 웃음기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에리타 님 제 귀 만지는 거 좋아하시니까요…….”
내 물음에 테인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웅얼거렸다.
물론 테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테인의 꼬리와 귀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옛날에도 내가 처져 있는 것 같으면 테인은 스리슬쩍 다가와 늑대로 변해서는 내 품을 파고들었다.
지금은 늑대로 변할 수 없으니 꺼내기 쉬운 귀라도 내민 모양이었다.
“정말……. 테인 너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나는 손을 뻗어 테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뒤로 누운 귀를 살살 매만지자 테인이 그릉그릉 하는 귀여운 소리를 냈다.
사실 귀엽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으르렁 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런 테인의 애교 덕분에 나는 사비에르 후작저에 도착한 뒤에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나이 지긋한 집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테인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뒤에서 내 뒤를 쫓았다.
“호위분께서 머물 곳을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원하시면 그리로 모실까요?”
집사의 물음에 나는 테인을 돌아보았다.
테인의 눈가에는 미미하게 싫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뇨, 괜찮다면 함께 가고 싶네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거절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불만스럽던 테인의 눈매가 다시 순해졌다.
정말이지 귀여운 늑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분쯤 더 걸었을까.
“실례해요, 사비에르 영애. 제가 조금 늦었네요. 벌써 시작된 건가요?”
준비된 테이블로 걸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다섯 명의 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대공녀님!”
놀란 이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 와중에 가장 격렬하게 나를 반긴 건 바이올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