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1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19화(119/218)
다행히 티타임은 괜찮았다.
나와 바이올렛을 포함해 여섯 명쯤 되는 참석 인원들은 다들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성격이었으며 중립파 가문들이었다.
덕분에 불편할 건덕지가 없었다고나 할까.
물론 어느 화장품이 최고며 동방의 비단이 새로 들어왔고 무슨 나라의 희귀한 꽃을 구했니 뭐니 하는 얘기들은 지루한 구석이 있었다.
보통 이런 자리의 화제는 최근 유행하는 것들이나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들이 주를 차지했으니까.
‘상단 관련으로 맨날 보고받는 내용이라서 그런가.’
상단은 누구보다 먼저 유행을 파악해야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내가 몇 달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다.
웬만한 사교계의 소문들도 라그라스 산하의 정보 길드에서 수집한 것들이 대다수고.
그러니 내게는 흥미 없는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누군가 시비를 걸거나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없어서 편하긴 했다.
이상한 것이 있다면 나를 이 자리에 초대한 바이올렛이 조용했다는 거랄까.
‘초대장만 보면 한 시간은 붙잡고 얘기할 것 같던데…….’
의외로 내게 관심이 더 많은 건 다른 이들이었다.
티타임 내내 바이올렛은 계속 내 쪽을 힐끔거리면서도 쉬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빠른 듯 느리게 흘러갔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슬슬 티타임이 끝이 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제 슬슬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겠네요.”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바이올렛이 모임의 끝을 언급했다.
“오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비에르 영애.”
“다음에는 제가 새로 꾸민 온실에서 모임을 열도록 할게요. 그때도 와 주시면 기쁠 거예요.”
두런두런 얘기하던 이들의 시선이 자꾸 나를 스쳤다.
‘다음에도 초대하겠다는 말을 할 것 같은…….’
“저, 대공녀님.”
내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블란쳇 백작 영애가 나를 불렀다.
“네, 블란쳇 영애.”
나는 피곤한 기색을 감쪽같이 숨긴 채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교계에 깊게 스며들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일 생각도 없었다.
‘뒤에서 태도 관련으로 소문이 돌면 아버지의 이름에도 누가 되니까.’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 다가오는 남자가 있으면 그게 누구든 걷어차라고 하신 분이다 – 내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혹시…….”
잠시 나를 보며 우물쭈물하던 블란쳇 영애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다음에 제가 주최하는 모임 초대장을 보내 드려도 될까요?”
그 말을 하려고 지금껏 눈치를 봤던 건가.
순한 인상이다 했더니 성격도 그랬다.
“그럼요. 시간이 된다면 참석하도록 할게요.”
그들이 내 눈치를 보는 이유를 알기에 나는 유한 대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사교계 활동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어울릴 사람을 만들어 두는 게 편했다.
더군다나 오늘 모인 이들은 전부 중립파였으니 어울리는 데에 거리낌도 없었고.
‘사비에르 후작가는 칼리온의 편이지만.’
내 대답이 긍정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블란쳇 영애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저, 정말이신가요?!”
그러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물었다.
복슬복슬한 갈색 머리카락에 옅은 녹색 눈동자를 보자 왠지 저 뒤에 서 있는 테인이 생각났다.
물론 테인이 눈앞의 아가씨보다 두 배쯤 크긴 했지만 그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뭐, 일정이 있으면 참석하지 못하겠지만…….”
반짝이는 눈빛을 계속 받고 있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워 나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흘러나온 말에 강아지같이 순한 눈매가 점점 처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는 테인처럼 생긴 사람에게 약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편지를 주고받았던 세이안을 생각해 보아도 딱 들어맞았다.
“……별일이 없다면 가고 싶네요.”
결국 나는 다시금 긍정의 답을 해 주고 말았다.
“와아, 저 정말 기뻐요!”
그렇게 블란쳇 영애를 시작으로 다른 아가씨들도 내게 초대장을 보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블란쳇의 아가씨에게 해 주었던 답을 조금씩 변형해 돌려주었다.
의미는 일맥상통했다.
‘……근데 바이올렛은 왜 저기서 살벌하게 보고만 있냐.’
내가 도착했을 때 가장 반갑게 나를 맞이했던 바이올렛은 여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내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살벌하다기보다는 심통이 난 표정에 가까워 보였지만 치켜 올라간 눈꼬리 덕에 조금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나와 내 주위의 영애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입술을 깨무는 모양새가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한테.
“사비에르 영애,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뵈어요!”
인사를 마친 영애들이 하나둘 자신이 데리고 왔던 호위와 시녀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나는 부러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저런 얼굴을 두고 가면 자다가 생각날 것 같다고.’
정원에는 나와 바이올렛, 그리고 후작저의 사용인들과 테인밖에 남지 않았다.
그를 확인한 나는 뒤로 돌아 바이올렛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바이올렛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사비에르 영애, 혹시 내게 할 말이 있나요?”
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할 말이 있다면 얼른 듣고 집에 가고 싶었다.
없다면 지금 바로 가면 될 테고.
***
결국 바로 집으로 가려는 내 계획은 실패했다.
바이올렛이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산책까지 하고……. 오늘 일주일 치 운동 다 했네.’
지금 우리는 바이올렛이 직접 가꾸었다는 정원을 걷는 중이었다.
“으음, 영애, 할 말이라는 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삼 분쯤 말없이 걷기만 하는 바이올렛에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던데…….”
내 말에 바이올렛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아, 알고 계셨나요?”
그렇게 묻는 표정은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도, 민망해 보이기도 했다.
“자꾸 눈이 마주치길래요.”
“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바이올렛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저, 대공녀님, 혹시…….”
나는 가만히 바이올렛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제가 싫으신가요?”
말을 마친 바이올렛의 푸른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당황을 넘어 황당하기 짝이 없었으나 당장은 이 상황을 타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영애를 싫어한다니요.”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퐁퐁 흘릴 것 같은 바이올렛을 달랬다.
아까 전까지 도도하다고 생각했던 바이올렛은 침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제가 너무 과하게 들이대서…… 그래서 대공녀님께서 저를 싫어하게 되셨을까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자기가 과하게 들이댄 건 아나 보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처음 본 사람이 갑자기 친구 하자고 다가서면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니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바이올렛을 싫어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사비에르 영애, 나는 영애를 싫어하지 않아요.”
나는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말요?”
“그럼요. 제가 영애를 싫어했다면 오늘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바이올렛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내 의문이 해결된다면 바이올렛과도 더 깔끔하게 잘 지내게 될지도 모르지.
“영애, 이번에는 내가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네! 얼마든지 물어보셔요!”
조금 전까지 침울하던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였는지 바이올렛은 금세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가 내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가 뭔가요?”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고작 몇 시간이긴 하지만 지금껏 겪은 바이올렛을 보면 그녀에게는 직설적인 화법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올렛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검은색을 제일 좋아했거든요.”
그 대답에 나는 지금껏 해 온 생각이 다 쓸모없음을 깨달았다.
김이 팍 샜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검은색을 좋아해서?
싱겁다 못해 어이가 없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취향이지만요. 그런데 팔 년 전에 선황비마마의 장례식에서 대공녀님을 뵌 거예요! 그때부터 친해지고 싶었는데 바로 대공령으로 돌아가시고 수도로는 오지 않으셔서…….”
내 떨떠름한 눈빛을 느끼지 못한 모양인지 바이올렛은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는 조잘조잘 말했다.
“제 못난 오라버니와 소대공님 사이에 친분이 생겼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대공녀님이 수도에서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신다는 소식에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했거든요.”
줄줄 말을 늘어놓는 바이올렛은 전혀 부끄럽지 않아 보였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어쩐지 민망해졌다.
어쨌든 저 장황한 말의 요는 바이올렛이 검은색을 좋아하는데 때마침 내가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검은색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하기에는 오라버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바이올렛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딱히 이상한 말은 아니었는데 경악이 서리는 얼굴을 보자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던 바이올렛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다.
“이,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그 외침이 얼마나 우렁찼던지 나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런 바이올렛의 모습이 익숙한 듯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놀란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내 시선이 다시 바이올렛에게 닿자 그녀는 도도한 눈매를 잔뜩 늘어뜨리며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대공녀님을 좋아하게 된 게 대공녀님의 검은색 머리칼 때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전부 좋아하는 건 아녜요!”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내가 있던 리센에서는 검은색을 좋아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수도에서는 검은 머리를 가져도 크게 차별받지 않았지만……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람을 보니 신기하긴 했다.
‘……뭐, 개인 취향이니까.’
사나운 동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동물들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딱히 이해되지는 않았으나 각자의 취향은 다른 법이니 존중해야 함이 마땅했다.
어딘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바이올렛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영애의 취향이니 내게 그리 열심히 설명할 것 없어요.”
흘러나온 내 목소리는 평상시와 비슷했지만 조금 더 낮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