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20)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20화(120/218)
나도 몰랐지만 지금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저절로 낮아진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대, 대공녀님…….”
그런 내 기분을 느낀 걸까.
바이올렛이 내 눈치를 보며 나를 불렀다.
“네, 사비에르 영애.”
“……혹시 제가 뭔가 실언을 했나요?”
나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흘러나온 대답은 아까와 달리 조금 딱딱한 구석이 있었다.
시원찮은 내 부정에 바이올렛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참, 웃기지도 않네.’
속으로 뱉은 조소는 바이올렛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내 기분이 저조해진 이유를 알아챈 탓이었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분명 그럴 수 있는데…….’
바이올렛이 나를 만난 첫날부터 이유 모를 호의를 보인 게 나를 힘들게 했던 검은 머리카락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별로였던 듯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검은 머리카락을 싫어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같은 색이었으니까.
하지만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딱히 유쾌한 감정이 아니었고.
“사비에르 영애.”
“네, 네! 말씀하세요, 대공녀님.”
나는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오늘 티타임에 초대해 줘서 고마웠어요.”
다정하려 애를 쓴 탓인지 다행히 목소리는 본래의 톤을 찾았다.
“저야말로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한 바이올렛은 무언가 더 하고픈 얘기가 있어 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 인사를 꺼냈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어요, 사비에르 영애.”
“아…….”
바이올렛 역시 그 말이 그만 가 보겠다는 말임을 알아챈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평소였다면 남은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자리를 떴겠지만 지금은 더 있어 봤자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영애.”
무언가 할 말이 남았음이 분명했지만 바이올렛은 끝내 나를 붙잡지 못했다.
***
다시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검은 머리로 인해 경멸 어린 시선과 폭언을 받았던 건 무려 구 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딱히 떠올려 본 적도 없었던 과거.
케케묵은 상처는 가족들의 사랑으로 전부 덮여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때의 일이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바이올렛이 꺼낸 말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질 리가 없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문에 이마를 툭 기댔다.
지금 내가 어쩌고 싶은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머리가 복잡했다.
‘바이올렛한테 사과를 해야 하나.’
바이올렛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내 기분이 상한 걸로 보일 테지.
생각에 빠진 나는 테인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를 힐끔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테인이 누구를 찾아가려 생각하고 있는지도.
***
한번 바닥을 친 기분은 쉬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으로 내가 좋아하는 에반의 특제 매콤 닭 다리가 나왔을 때는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아가씨, 어깨 좀 주물러 드릴까요?”
“아니면 차를 준비하라 이를까요? 과일차인데 요즘 황도에서 인기가 좋대요.”
“아, 아냐. 괜찮아…….”
메리와 마릴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무슨 철없는 짓이람.’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두 사람이 내 눈치를 살피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나 오늘은 일찍 누워서 쉴게. 그 차는 내일 마셔 봐도 돼?”
나는 그렇게 물으며 소파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럼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편히 쉬세요, 아가씨.”
메리와 마릴린은 내 잠자리를 봐 준 후 여전히 걱정이 묻은 얼굴로 그렇게 당부하고는 방을 나섰다.
탁-
문은 작은 소리를 남기고 굳게 닫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문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좀생이도 아니고…….”
고작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검은 머리카락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이렇게 처지다니.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만큼 좁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도 우울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백 번이 넘게 옛날 일이라고 되뇌어 봐도 소용이 없을 뿐.
“그때는 괜찮았는데…….”
어째 리센 고아원에 있었을 당시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이 더 어려진 것 같았다.
‘너무 어리광쟁이로 자랐어.’
아버지와 에일런이 부어 주는 사랑을 잔뜩 받으며 컸더니 마음이 아주 물렁물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두 사람과 거리를 두겠다는 계획은 아주 대차게 말아먹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쏟아지는 애정에 속절없이 흠뻑 젖은 채였다.
“……어휴.”
내 기분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열불이 나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똑똑-
“에리타, 자?”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다정한 내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자요! 들어오세요!”
나는 문 너머에 들릴 정도로 크게 대답을 하며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깐 실례할……. 에리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라면 애벌레처럼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내릴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에일런을 맞이하고 말았다.
문을 열자마자 애벌레마냥 이불을 뚤뚤 말고 있는 동생을 본 에일런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서렸다.
그게 비웃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치심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았다.
“아하하, 하……. 들어오세요, 오라버니…….”
“미안, 내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네.”
“아녜요. 어차피 안 자고 있었던걸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꾸물꾸물 이불을 풀어냈다.
“편하게 누워 있어. 그냥 잠깐 얼굴 보러 온 거니까.”
침대 밑으로 내려가려던 내 시도는 에일런에 의해 무산되었다.
대신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지금 잘 거 아닌데…….”
내 작은 웅얼거림은 그다지 별 효과가 없었다.
평소 에일런은 내 말이라면 대부분 다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내 편의가 관련되면 절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아버지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그때, 에일런 역시 오늘 일정이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황궁은 잘 다녀오셨어요? 별일은 없으셨구요?”
“응, 별일 없었어. 오늘은 갑자기 의견을 나누어야 할 안건이 생겨서 다녀온 거라서.”
“안건…….”
나는 약간 어벙한 목소리로 단어를 되풀이했다.
칼리온을 만나기 위해서 간 게 아니었구나.
‘하긴. 대놓고 황궁에서 칼리온을 만나면 같은 편 먹었다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겠지.’
그럼 오늘은 순전히 대공 대리로 갔던 모양이네.
나와 아버지보다 이 년 먼저 수도로 왔던 에일런은 그때부터 소대공 자격으로 대공 대리를 맡고 있었다.
서류 처리는 아직까지 아버지가 대부분을 맡아서 하지만 대외적으로 나서는 건 전부 에일런이 하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귀찮아서 떠넘긴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주위에서는 에일런이 훗날 대공이 되었을 때를 위한 발판을 닦아 두는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정확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뭐, 나도 최근에 알았지만.’
세세한 속사정은 구태여 알아보지 않았지만 칼리온이 황제가 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닐 테니 그 때문이겠지.
“에리타 너는 잘 다녀왔어?”
그때 에일런이 나긋한 어조로 다정하게 물어 왔다.
“……네?”
“속상한 일은 없었고?”
나는 그의 말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사비에르 후작저에서 집으로 온 뒤로 에일런과는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에일런의 표정을 보니 오늘 내 기분이 저조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온 듯했다.
“……메리가 말했어요?”
나는 그의 물음에 따로 부정하지 않고 넌지시 첩자의 이름을 물었다.
가장 먼저 의심한 사람은 메리였다.
내 걱정이 유별난 메리는 내가 입을 꾹 다물 때면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슬쩍 말을 흘리곤 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강요 아닌 강요로 시작됐다지만 지금은 메리도 자발적으로 내 기분을 살그머니 두 사람에게 날랐다.
‘뭐, 내가 괜찮다고 해서 계속 그러는 거긴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말이 들어간 후에는 대부분 어떤 방법으로든 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 메리의 입장에서는 옳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 이번에는 아니야.”
하지만 에일런은 나직하게 웃으며 부정했다.
……뭐야. 그럼 누구지? 마릴린인가? 근데 마릴린은 오라버니를 좀 무서워하던데.
평소 귀신이 나타나도 ‘이런, 귀신이군요.’를 시전할 것 같은 마릴린은 의외로 오라버니를 꺼렸다.
그러고 보면 잘 웃지 않아 차가운 인상을 가진 아버지보다도 잘 웃는 에일런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엠마도 오라버니가 더 무섭다고 했지.
아, 하여튼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가서 말했담.
골똘히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던 에일런이 눈매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날 찾아온 건 네 늑대였는데.”
옅은 웃음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내 상태를 알린 사람이 테인이라 말했다.
“……테인이라구요?”
“응.”
상상도 못 했던 이름이었지만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요즈음 테인과 에일런은 제법 사이가 괜찮았으니까.
“……언제 테인이랑 그렇게 친해지셨대요.”
“기사는 검으로 얘기를 나누는 법이지.”
나는 에일런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요새 테인이 활기차졌다 싶더니.
“전하랑도 훈련하면서 친해졌다면서요. 하여튼 기사들이란 검밖에 모른다니까.”
“으음, 사실이라서 부정할 수가 없네.”
내가 눈을 흘기자 에일런은 여전히 다감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