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2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21화(121/218)
“……사실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에요.”
에일런과 조금 더 잡담하던 도중 나는 오늘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다정한 에일런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노곤해진 탓이었다.
내가 뭐라고 해도 내 편을 들어 줄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아버지나 에일런의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털어놓게 됐다.
“음, 사실 저도 제가 좀 유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에일런에게 오늘 내가 왜 꽁했는지를 설명하려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았다.
벌써 구 년이나 지난 일 때문에 축 처져 있었다고 하기에 나는 이미 너무 커 버렸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칠 수 있는 대나무 숲은 필요한 법이지 않나.
나는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기대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사비에르 영애한테 왜 저를 좋아하냐고 물어봤거든요.”
“으응, 그랬어?”
에일런이 다정하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애는 제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져서 좋다고 하더라구요. 사실은 되게 별거 아닌 건데…… 근데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났어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에일런을 보자 망설였던 게 무색하게도 투정 비슷한 게 줄줄 흘러나왔다.
처음 입을 열기가 꺼려졌을 뿐 한번 물꼬를 트니 속내를 내보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실 리센에 있을 때는 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원망하기도 했어요.”
내 말에 에일런이 약간의 동요를 보였다.
이건 내가 그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였다.
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뜬 후부터 리센에서 지냈던 시간은 고작해야 일 년이 조금 넘었다.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구 년에 비하면 잠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받았던 경멸과 차별은 시간이 지나 흐려졌을 뿐 전부 잊혀진 게 아니었다.
살이 파인 상처는 연고를 바르고 치료를 해도 옅은 흉터가 남는다.
나는 나쁜 기억도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저한테도 가족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내가 다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졌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
끝말을 덧붙이며 옅게 웃었지만 에일런은 나를 따라 웃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자책하는 것 같기도, 무언가에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옛날 일이에요. 이미 구 년이나 지났고…….”
“……아직 그때 일이 생각나?”
에일런은 무거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요.”
그때의 일을 빠짐없이 생생히 기억하는 건 안에 든 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였기 때문이지만 아홉 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 자체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망측해라! 어쩜 검은 머리를 가졌는데 가리지도 않고 다닌담?
-너 때문에 우리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산속으로 내던져 버릴 줄 알아라!
-야, 쟤 머리카락은 저주받았대. 그러니까 가까이 가지 마. 옆에 있다가 우리한테도 저주가 옮으면 어떡해?
-으악, 무서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당시의 충격 때문인지 뇌리에 단단히 박힌 날 선 말들은 잊을 만하면 또다시 떠올라 머릿속을 갉작였다.
물론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전부 다 기억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아주 가끔…….”
나는 끝말을 흐렸다.
마주친 에일런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저 내 짐작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미안하다고 말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에일런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종종 어린 에리타를 잃어버렸던 것을 못 견디게 괴로워했으니까.
내색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일렁이는 눈빛과 초조한 듯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만 봐도 그들이 여전히 그때의 일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랬기에 나는 선수 쳐 먼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저 지금은 괜찮아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때를 떠올려도 괜찮을 만큼 사랑해 주셨으니까요.”
이건 내 진심이었다.
잊지 못한 그때의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를지언정 매번 무던히 넘길 수 있는 건 아버지와 에일런이 부어 준 사랑 덕분이었다.
비록 내가 그들이 잃어버렸던 에리타가 아닐지라도 이 정도 말은 해도 괜찮겠지.
두 사람은 차고 넘칠 만큼 그들의 딸과 여동생을 사랑했다.
“그냥 오늘 기분이 이상했던 건, 음, 뭐라고 해야 할까…….”
“…….”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였던 게 지금은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된다는 게 조금 크게 와닿았던 것 같아요.”
잔잔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힘이 없지 않았다.
경멸 어린 눈초리의 원인이었던 내 머리카락이 누군가가 내게 호의를 품게 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겪어 봐서 놀랐던 거지.
그 정확한 이유를 찾아내고 나니 오히려 더 홀가분해졌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래서 더 감사하지 않나 싶어요.”
나는 작게 웃으며 흘리듯 말했다.
“하하,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네요. 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오라버니.”
내가 먼저 말을 꺼낸 이유를 아는 것처럼 에일런은 조금 아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동생이 언제 이렇게 많이 컸지.”
“오라버니가 저를 너무 어리게 보고 계셨던 거죠.”
가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자 나를 바라보던 에일런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웃음이 어린 숨이었다.
“속상한 일이 있었을까 걱정이 돼서 왔더니 내가 위로를 받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오라버니가 들어 주셔서 괜찮아졌는걸요.”
“으응, 그랬어?”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러운 솜이불에 볼이 비벼졌다.
“에리타.”
“네에.”
“혹시 사비에르 후작 영애가 불편하면 다시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나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편하겠지만 사비에르 영애가 상처받을 거예요. 오늘도 제가 조금…… 조금 매몰차게 대했거든요.”
“매몰차게 대했어?”
에일런의 표정은 그다지 내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바이올렛의 할 말이 남았다는 얼굴을 외면하고 등을 돌린 건 사실이었다.
따지고 들자면 눈치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뿐이니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울 것 같던 얼굴을 떠올리니 괜스레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네에. 영애가 저한테 할 말이 남아 있던 걸 아는데…… 웃는 얼굴로 못 들을 것 같아서 그냥 집에 왔거든요.”
지금 돌이켜 보니 바이올렛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이올렛은 내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도 모를 텐데.
수도에서는 검은색을 좋아하는 게 그렇게 괄시받는 취향이 아니었으니.
“……나중에 사비에르 영애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요. 아니면 적어도 상황 설명이라도 하든가…….”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불에 막힌 목소리가 웅얼대는 것처럼 울렸다.
“아, 민망해. 사비에르 영애가 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죠…….”
“으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에일런이 다른 의미로 축 처져 버린 나를 다독였다.
물론 에일런의 말대로 앞으로 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다.
딱히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힘을 가진 사람이 최고인 이 판타지 세계에서 내 가문은 깡패나 다름없는 뒷배였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라면 전부 들어주려고 하는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라고 허락하고도 남았다.
거기다 바이올렛의 할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던 것 하나로는 꼬투리를 잡기도 애매했다.
사교계에는 오늘 내가 했던 행동보다 백배 천배로 싹수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으니.
‘근데 그러기에는 양심이 쿡쿡 쑤신단 말이야…….’
게다가 바이올렛은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지랖일지 몰라도 내가 좋다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에 우리 저택에 초대하는 건 어때? 그쪽에서는 좋아할 것 같은데.”
그때 에일런이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집에 초대하라고?
음…….
생각해 보니 다른 곳에서 마주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좋은 선택지 같았다.
“……그러면 좋아할까요?”
내 물음에 에일런이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아는 사비에르 영애라면 아마.”
그렇다면 확실히 좋아한다는 뜻이로군.
여태껏 에일런의 말을 들어서 잘못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그럼 유리온실에 영애를 초대해야겠어요. 들어 보니까 정원을 가꾸는 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타임에서 식물에 관련된 주제가 나올 때면 유난히 말이 많아졌으니 확실했다.
후작저의 집사도 내가 바이올렛과 산책했던 정원을 두고 저희 아가씨가 직접 가꾼 정원이라고 말했었고.
“네에. 후작저 정원도 직접 가꿨대요. 저는 그런 분야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잘 모르긴 하지만 척 보기에도 예뻤거든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근심을 덜어 낸 내가 종알종알 말을 이어 가자 에일런은 옅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내 말을 들어 주었다.
***
“그럼 가 볼게. 잘 자, 에리타.”
“오라버니도요.”
나는 방을 나서는 에일런을 배웅했다.
하얀 셔츠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후에야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고요한 적막이 찾아들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 걱정을 하느라 애가 탔을 테인이었다.
테인은 순진했지만 늑대의 피를 이은 만큼 감이 좋았다.
오늘 내게 직접 오지 않고 에일런에게 달려간 것도 그래서였겠지.
내가 바이올렛과 이야기를 나눌 당시 열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수인의 청력은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러니 내가 무슨 이유로 처졌는지 예상했음이 틀림없었다.
“……내일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리고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고도 해야겠다.
오늘은 왜 이렇게 미안할 일이 많은지 모르겠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실없이 웃었다.
“후작저에 보낼 초대장도 써야 하고…….”
아침 먹으면서 아버지한테 여쭤보고 그 뒤에 쓰면 딱이겠다.
바이올렛을 초대하는 일을 내일로 미뤄 둔 나는 잠시 날짜를 헤아렸다.
내가 테인과 함께 번화가에 갔다 온 게 벌써 오 일 전이었다.
“……이틀 뒤에 신전에 가야겠네.”
저번에 들었던 축복의 날인가 뭔가 하는 날이 이틀 뒤였다.
나는 몸을 뒤척거리며 일정을 정리했다.
내일은 바이올렛에게 보낼 초대장을 쓰고 모레는 신전에 가야 했다.
거기다 조만간 칼리온도 한번 만나야 했다.
저주의 파훼를 위한 재료 준비가 거의 끝났다는 것도 알려 줘야 했고, 그에게 주었던 아티팩트에 마력을 채워 놓을 때도 다 되었다.
“바쁜 건 싫은데…….”
그렇게 머릿속으로 일정을 되뇌던 나는 어느 순간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