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2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22화(122/218)
이틀 뒤 아침.
나는 평소 외출하던 날과 달리 적당히 고급스러운 옷을 챙겨 입었다.
물론 가려는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화려한 장식은 하지 않았지만.
‘신전에서 1인 기도실에 가려면 귀족 신분으로 갈 필요가 있으니까.’
물론 돈이 많은 평민 역시 1인 기도실에 갈 수 있었지만 그건 드문 경우라 기억에 남을 확률이 컸다.
‘내가 왜 오늘을 골랐는데.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축복의 날인 오늘 신전에 가기로 선택한 것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처럼 신전이 바쁜 날을 찾기도 힘들 테니까.’
일 황자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신전에서 평민들에게 무료로 축복 세례를 펼치는 날.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광고를 해 두었으니 아마 신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오늘처럼 신전이 바쁜 날 방문하면 내가 1인 기도실을 방문한다고 해도 평소보다 쏠리는 시선이 적을 터.
‘변장하고 간다고 해도 마주치는 사람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좋으니까.’
신전은 황후가 장악한 곳이니만큼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들이 크로바하츠가 칼리온의 뒤에 섰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뭐든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옛말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으니.
준비를 마친 나는 방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벽에서 한 발 떨어져 꼿꼿하게 서 있던 테인이 나를 바라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리타 님.”
“테인, 준비 끝났어. 이제 갈까?”
“아, 네!”
고개를 끄덕인 테인이 주위를 살펴보곤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오늘도 마법으로 가나요?”
그걸 물으려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살핀 모양이었다.
하여튼 귀엽기는…….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거야. 먼저 유르젠 만나러 갔다가 가려고.”
유르젠이라는 말에 순간 테인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내 호위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매일 보다시피 했던 유르젠이니 보고 싶을 만도 하지.
아직까지 테인을 향한 경계를 풀지 않은 탓에 불퉁한 얼굴의 메리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든 나는 곧바로 테인의 팔을 붙잡고 술식을 읊었다.
“오셨습니까.”
눈을 뜨자 유르젠이 오늘도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소파로 걸어가며 힐끗 본 책상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 더미가 남아 있었다.
“……좀 쉬엄쉬엄하라니까. 어제도 안 잤지? 보나 마나 뻔하다, 뻔해.”
괜히 속상한 마음에 말이 불퉁하게 나갔다.
“할 만해서 하는 겁니다.”
“할 만하기는. 볼 때마다 얼굴이 반쪽이 되는데. 나중에는 그냥 사라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내 투덜거림에 유르젠이 나직하게 웃었다.
저거 봐.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더니 피곤하니까 살살 웃잖아.
“테인, 네가 봐도 유르젠 완전 피곤해 보이지?”
내 옆에 앉은 테인에게 묻자 맞은편의 유르젠을 흘깃 본 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거 보라는 듯이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유르젠을 바라보았다.
“할 일이 많으면 사람을 하나 뽑으라니까. 찾아보면 믿을 만한 사람 하나쯤은 있을걸.”
“……됐습니다. 사람 하나 더 들이면 신경 써야 할 게 적어도 세 배는 늘어날 텐데, 그냥 혼자 하는 게 나아요.”
차를 호로록 마시며 거절하는 유르젠의 어조는 단호했다.
‘인간 불신은 여전하구만…….’
과거 사람에게 크게 덴 적이 있었던 탓에 유르젠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걸 거부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나와 테인을 제외하면 유르젠이 마음을 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서류 처리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뽑자고 해도 저렇게 싫어하니…….’
상단 규모가 제법 커진 이후에 유르젠이 덜 힘들도록 서류 처리를 분담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뽑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외부에서 뽑든 상단 내에서 뽑든 상관없었다.
유르젠이 사람을 믿지 않는 건 알지만 상단이 커질수록 그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아지니까.
하지만 유르젠은 그때도 지금같이 단칼에 거절했다.
‘상단 일을 처리하는 건 유르젠이니 내가 뭐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고…….’
결국 오늘도 회유에 실패한 나는 한숨을 삼키며 차로 입술을 적셨다.
“……그보다 마차를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하셨던가요.”
“아, 맞아. 아무런 문양도 없는 마차였으면 좋겠는데.”
내 긍정에 유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 신전에 갈 때는 마차를 타고 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전부 크로바하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우리 가문 마차는 탈락이었다.
‘내가 거기 간다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지.’
찾아보면 평범한 마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자연히 아버지 귀에도 소식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더 이상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숨겨야 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아일라와 원작에 관련된 내용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유르젠에게 부탁했다.
“이미 밑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유르젠이 그 말과 함께 작은 은색 패를 하나 내려놓았다.
통통한 라그라스의 생김새가 조각되어 있는 패였다.
“은색이네?”
“눈에 띄기 싫으시다면서요. 지방의 적당한 귀족쯤으로 볼 겁니다.”
“역시 유르젠은 내 마음을 잘 안다니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은색 패를 집어 들었다.
라그라스 상단에도 거래하는 고객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었다.
동색, 은색, 금색, 백금색, 검은색.
색을 보면 대충 눈치껏 유추할 수 있겠지만 동색이 가장 낮은 단계고 검은색이 가장 높은 단계였다.
아직 검은 패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뭐, 그냥 돈 많이 쓰는 대로 나눴다고 보면 되나.’
그런 의미이니 유르젠의 말대로 은색 패 정도면 적당했다.
“아, 그리고 좀 있으면 트란 열매가 열릴 시기지?”
내 말에 유르젠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정도 남았네요.”
“으음, 그럼 나흘쯤 뒤에 한번 가 봐야겠다.”
“직접 마력을 주시려고요?”
“응. 걔는 내 마력을 좋아하잖아. 딱 열매를 맺기 전에 잔뜩 부어 주면 더 좋은 열매를 주지 않을까?”
트란 열매는 아주 귀하게 취급되는 마법 재료였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열매 하나가 최고급 포션 백 개보다 더 비쌌다.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와 따져도 가치에서 뒤지지 않는 게 트란 열매였다.
물론 그 명성과 가격에 걸맞게 키우는 것 역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자라는 속도도 느린 데다가 개체 수도 적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탑에서 독점하다시피 했지.’
하지만 나는 원작을 읽었기에 마탑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트란 나무 군락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침 땅을 가진 이가 재산을 처분하고 있던 도중이었기에 그 일대를 전부 사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 딱 맞는 재배 방법까지도 알고 있으니까.’
원작 버프로 인해 나는 대륙에서 가장 질이 좋은 트란 열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라그라스 상단이 빠르게 몸집을 불린 데에는 트란 열매도 한몫했다.
트란 나무마다 근소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보통 열매를 맺기까지는 삼 년 정도가 걸렸다.
게다가 한 번에 열매를 하나밖에 맺지 않으니 그 희소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군락지에 나무가 스무 그루나 있었던 건 진짜 행운이었지.’
그런 트란 열매는 칼리온의 저주를 파훼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재료였다.
‘마침 열매가 맺히기 직전인 트란 나무가 두 그루 있어서 다행이야.’
보관해 둔 열매는 있었지만 저주를 파훼하기 위해서는 나무에서 떨어진 지 한 달이 넘지 않은 열매가 필요했다.
‘이러니까 저주를 파훼하는 방법을 알아도 아무나 못 했지.’
하여튼 흑마법을 구분해 내는 아티팩트도 그렇고 흑마법과 관련된 것들은 죄다 돈이 없으면 엄두도 못 낼 것들투성이였다.
나는 마침 떠오른 이의 얼굴에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그때 이 황자 전하랑 같이 가도 괜찮아? 확실한 건 아닌데 같이 갈 수도 있거든.”
트란 열매만 구하면 필요한 재료의 준비는 전부 끝나는 거니 칼리온에게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트란 열매를 따 온 뒤에 다른 재료들과 함께 가공하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게다가 조만간 칼리온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저번에 줬던 아티팩트에 마력을 충전해야 했다.
“……어차피 아가씨 소유이니 안 될 건 없죠.”
내 물음에 유르젠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말을 안 하고 가려니까 좀 그래서.”
트란 군락지가 내 소유이긴 했지만 그곳을 관리하는 건 대체로 라그라스 상단 소속원들이었다.
“그럼 나흘 뒤에 자리를 비워 두라 이르겠습니다.”
“유르젠은 같이 안 가려고?”
“예. 저는 그때 비단 거래 건으로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아, 그래?”
“갑자기 잡힌 거라 미리 말씀을 못 드렸네요.”
“아, 아냐! 그런 것까지 다 안 말해 줘도 돼…….”
나는 손을 내저었다.
유르젠도 가끔 보면 나를 너무 극진히 대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영 고치질 않으니…….
솔직히 본인은 딱히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여튼 황소고집이라니까.’
그때 유르젠과 칼리온을 소개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예정된 거래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
“흠, 그럼 다음에 날을 잡아야겠네.”
그렇게 유르젠과 이야기를 마친 나는 테인과 함께 다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일부러 은패를 받아 놓고 상단주의 방에서 나오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까.
물론 마차를 타러 가기 전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