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2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25화(125/218)
세르비아의 볼을 애틋하게 쓰다듬고 손을 잡아 주는 과거 속 아버지의 모습을 보던 나는 다시금 태양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을 먼저 보고 오라고 했지.’
새하얀 공간에서 들렸던 목소리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 과거의 모습이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
에리타를 가진 세르비아의 모습이?
태양신의 의중이 무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시기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나는 애써 복잡한 생각을 지워 내며 초상화로만 봐 왔던 세르비아의 모습을 눈에 새기는 데에 집중했다.
진통을 참아 내느라 하얗게 질린 얼굴이긴 했지만 밀빛 머리칼이 아름다운 미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세이안이랑 많이 닮았네.’
유순한 눈매를 가진 세이안은 내게 제 누님을 많이 닮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진정 세르비아와 닮은 건 세이안이었다.
언젠가 아버지도 세이안이 세르비아를 많이 닮았다고 했을 정도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르비아가 이전과 다른 고통을 호소했을 때였다.
고작 두어 번 겪었지만 익숙해진 두통이 밀려들었다.
‘왜 지금……!’
나는 급하게 세르비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만약 다시 그 하얀 공간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세르비아를 볼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이상하던 기분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읏!”
결국 심해진 두통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고 그와 동시에 다시금 감은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흐르고.
깜빡-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다행히 새하얀 공간으로 다시 돌아온 건 아니었다.
걸려 있는 미술품과 놓인 장식품이 다르긴 했지만 내가 선 곳은 익숙한 복도였다.
‘아직 대공령 저택 안이네…….’
아까는 세르비아가 에리타를 낳으려던 순간의 과거였는데 지금은 또 언제인지.
그때였다.
탁- 저벅저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곧바로 가볍고 단정한 발소리가 뒤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에일런?’
뒤로 돌자 보이는 건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에일런이었다.
나는 어린 오라버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나는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 에일런의 뒤를 따랐다.
길쭉한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간 에일런은 어느 문 앞에 반듯하게 섰다.
‘여기는…….’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린 에일런이 도착한 건 내가 대공령에서 쓰던 방이었다.
내가 에일런과 처음 만났던 그 방.
다시 말해 어린 에리타가 사용했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용하고 있을 그 방이었다.
에일런은 문 앞에 얌전히 서 있다가 그를 잘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도 여전했구나…….’
이상한 기분과 더불어 왜인지 모를 그리움이 차올랐다.
“어머, 에일런! 거기서 뭐 하니?”
잠시 복잡한 눈으로 에일런을 바라보던 나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슬립에 숄을 걸친 잠옷 차림의 세르비아였다.
“아, 어머니…….”
가벼운 걸음으로 제 앞으로 다가온 세르비아에 어린 내 오라버니는 답지 않게 우물거렸다.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건 내 눈에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인지 세르비아 역시 다정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우리 아들, 아침부터 동생이 보고 싶어서 내려왔구나?”
세르비아의 장난기 어린 말에 에일런이 작게 움찔거렸다.
젖살이 통통한 볼이 살짝 붉어진 걸 보니 정답인 듯싶었다.
에일런은 결국 자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타가 밤새 잘 잤는지 궁금해요, 어머니.”
“우리 아들이 벌써 오라버니가 다 됐네?”
“에리타는 제 동생이니까요.”
세르비아의 말을 들은 에일런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시선이 문으로 향하는 걸 보니 에일런이 제 여동생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가 훤히 보였다.
“그럼 엄마랑 같이 들어가자. 이따가는 같이 산책하러 나가고. 어때?”
“에리타랑 같이요……?”
“응, 같이. 아직 걷지는 못해도 안고 나가면 되니까.”
“저는 좋아요.”
세르비아가 눈매를 접으며 한 제안을 에일런이 덥석 물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 표현이 크지 않았다고는 들었는데 막상 과거를 보니 조금 어른스럽긴 하지만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과거의 일상이 흘러가던 도중 나는 또다시 두통을 느꼈다.
***
새하얗게 점멸했다가 돌아온 시야에 보인 건 산산이 부서진 마차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금 전 보았던 세르비아와 에일런, 그리고 에리타의 모습이 선명한데.
나는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비탈길에 마차가 끌린 자국이 있는 걸 보니 저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진 게 분명했다.
“…… 님! 제이슨!”
저 위에서 이쪽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지금이 언제인지 알 것 같아서 밀려드는 불안감이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가문의 문양.’
반파되다시피 한 마차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크로바하츠의 상징.
“크윽…….”
그때 마차 근처에 쓰러져 있던 기사 한 명이 힘겹게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서자마자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내어 빠르게 찢었다.
“마님……!”
그러고는 배에서 철철 쏟아지다시피 하는 피를 무시하고 부서진 마차의 문짝을 뜯어냈다.
비틀거리는 기사가 마차 안에서 안아 들고 나온 이의 얼굴을 본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세르비아.’
핏기 없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던 세르비아였다.
그제야 나는 지금 보고 있는 이 과거가 설마 했던 그때가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버지와 에일런이 그렇게 후회하던 그날이었다.
세르비아를 죽음으로 밀어 넣고 에리타가 실종되었던 그날.
“마님, 마님! 젠장……!”
기사의 부름에도 세르비아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세르비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이곳에 존재하는 이들이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이들에게 아주 조그만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았다.
그렇기에 내가 펼친 치료 마법은 세르비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마님, 금방…… 금방 대공 전하께서 오실 겁니다.”
그와 동시에 기사가 품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내어 피가 쏟아지는 세르비아의 옆구리에 뿌렸다.
포션은 빠르게 흡수되었지만 나는 마법사였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포션은 세르비아를 도울 수 없다는 걸.
이미 지나간 과거임을 알지만 짙은 무력감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빠르게 이곳으로 뛰어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금 시야가 반전되었다.
“허억, 허억!”
이번에 보인 건 품속에 이불 덩어리 하나를 들고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몸을 쓰는 데 특출난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도중에 마법사로 추정되는 누군가를 만나 텔레포트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마력의 끝이 닿은 곳은 내가 모를 수가 없는 곳이었다.
‘……리센이잖아.’
내가 처음 눈을 뜬 곳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가득한 곳.
남자는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퍼즐은 안 맞는 조각 하나 없이 전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저 이불 덩어리는 분명히 세르비아의 어린 딸, 에리타가 분명했다.
어쩐지 나와 저 때의 에리타를 구분 지어야 할 것 같은 기분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공존했다.
“십 년 안에 이 아이를 데리러 올 사람이 있을 것이네.”
“예?”
남자는 내 기억보다 젊은 원장에게 이불 덩어리를 안겨 주고는 두둑한 주머니 하나를 보여 주었다.
“사례는 이 정도면 되겠지.”
남자가 슬쩍 입구를 연 주머니에는 척 보아도 쉰 개는 족히 될 법한 양의 금화가 들어 있었다.
고아원에 주어지는 한 해 운영비가 금화 네댓 개가 될까 말까였으니 그 열 배가 넘는 양이었다.
“이, 이렇게나…….”
번쩍이는 금화를 본 원장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이 모습이 과거라는 걸 알면서도 치미는 토기를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때 원장이 이불 덩어리를 살짝 젖혔다.
“에구머니!”
그러고는 기겁을 하며 표정을 확 구겼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그럼 그렇지.
원장은 유독 내 머리카락을 싫어했다.
그 감정은 단순히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에 가까웠다.
원장뿐 아니라 리센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랬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괴롭게 했던 건 단연코 원장이 제일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남자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자 원장이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검은 머리카락은 저주받았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불 속의 아이와 금화 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는 저주를 받았으니 싫지만 저 금화는 탐이 나는 게 분명했다.
‘……역겨운 인간 같으니.’
여전한 원장의 모습에 나는 차갑게 조소했다.
결국 원장이 택한 건 금화 주머니였다.
“지켜볼 것이니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이고, 당연하지요!”
그렇게 원장에게 경고한 남자가 자리를 떠났다.
“쯧, 하필이면 검은 머리일 게 뭐람.”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이 되었을 때 원장은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소중히 손에 쥔 가죽 주머니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내다 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원장이 고아원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또다시 시점이 변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눈앞은 멀쩡했다.
“……뭐지.”
혹시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아까처럼 스르륵 통과할 수 있겠지 싶은 마음에 앞으로 쭉 걸어갔다.
퉁-
하지만 뭔가에 막힌 듯 고아원 안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뭐야…….”
의외의 상황에 나는 가만히 서 있는 것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조금 전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십 년 안에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아마도 황후와 레노센의 하수인일 테고.
아버지가 고아원에 있던 나를 찾아온 건 지금 내가 본 이 시점으로부터 칠 년이 지난 후였다.
그럼 만약 아버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순간 원작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원작의 에리타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떠올렸을 때였다.
“윽……!”
머리를 강타한 건 조금 늦은 두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