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3화(13/218)
“에반. 그 주책은 언제 고칠 건가.”
“흠흠. 나이가 들었더니 주책이 자꾸 늘어서. 반갑습니다, 아가씨. 저는 이 저택의 주방장을 맡은 에반이라고 합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타박에 멋쩍게 헛기침을 한 번 한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를 에반이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그, 저는 에리타에요.”
“편히 에반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작은 숙녀분.”
“네에…….”
차가운 얼굴과 반대되는 어투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싶었지만.
그보다도, 아까부터 겹쳐 보이는 나도 모르게 에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흠흠. 테르반이 제 동생입니다. 꽤 닮았지요?”
그 시선을 눈치챈 에반이 씩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놀란 표정을 기대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정말요?”
“예. 여덟 살 차이라 제가 테르반을 키우다시피 했지요. 지금은 영 재미없게 크긴 했지만 어릴 때는 제법 귀여웠답니다.”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아니나 다를까 에반이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사소한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었고.
‘인상이 다른데도 엄청 닮았네…….’
무엇보다도 웃을 때 잔주름이 깊게 잡히는 눈매가 가장 닮아 있었다.
서늘한 느낌과 온화한 느낌으로 인상은 전혀 달랐지만.
둘 다 전형적인 미중년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에반.”
계속된 이야기를 끊어낸 건 아버지의 한숨 어린 부름이었다.
“어이쿠.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둘 테니, 주방에도 가끔 들러 주세요.
비밀이야기를 하듯, 내 쪽을 향해 살짝 속삭인 에반이 허허 웃으며 자리를 떴다.
뒤이어 시작된 식사는 고작 세 명임에도 요란스러웠다.
“이게 맛있더구나.”
“많이 먹어, 에리타.”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앞에 놓아 주는 아버지와 나를 향해 웃어 주는 오라버니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 좋아하는 거라도 있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으응, 아니에요. 아버지랑 오라버니도 얼른 드세요!”
가슴께가 간질간질하면서도 한구석이 답답해져 왔다. 하지만 이건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물음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모든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를 시작했다.
***
이어진 식사 자리가 끝날 무렵, 커다란 식탁 위에 있던 접시들은 죄다 내 쪽으로 몰려 있었다.
‘이것도 먹어 보거라.’
‘에리타 닭고기 좋아해?’
식사 중간중간 맛있는 게 보이면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 준 아버지와 오라버니 때문이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건 먹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내가 잘 먹지 않는 건 다 거둬 간 둘 덕에 내 앞은 아주 호화로웠다.
과분하다 못해 조금은 부담스럽기까지 한 둘의 행동이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결과.
“잘 먹었습니다…….”
만족스럽다 못해 과한 식사를 마친 나는 배부른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함께한 식사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에반의 요리 솜씨가 유난히 좋아서인지.
사실은 둘 다인 것 같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평소에 먹던 양의 두 배는 족히 먹지 않았을까.
나는 슬그머니 빵빵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
힐끗 눈치를 살피고 배를 슥 만져보니 어쩐지 볼록하게 나온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배가 부를 정도로 먹어 본 적이 없었기에 이 느낌이 아직은 조금 어색했다.
‘……근데 오늘은 엄청 먹었나 봐.’
신기한 느낌에 내 배를 콕콕 찔러보다 이내 조금 민망해져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쏙 들어 올리던 나는 내 쪽으로 닿아 있는 붉은 시선 두 쌍을 발견했다.
나는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왜 항상 타이밍은 이 모양일까.
게다가 내 의자는 왜 더 높아서.
“맛있게 먹었어?”
그리 묻는 에일런의 눈가에는 웃음이 잔뜩 묻은 채였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 역시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입에 맞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네에.”
아까부터 지금까지 왜 이렇게 쪽팔리는 일투성인지.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아슬란과 에일런이 차갑고 잔인하다는 말은 전부 다 헛소리임이 틀림없었다.
정말로.
진짜.
***
식사를 마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여전히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이 기분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뭐든지 처음은 어색한 법이니까.
지금은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첫날이라 저택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둘 모두가 나서 탓이었다.
“심심하면 언제든지 와. 내 방은 에리타 방 바로 위거든.”
“집무실에 있으니 언제든 오거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오라버니가 손가락으로 바로 위를 가리키자, 아버지는 아까 왔던 집무실의 위치를 다시금 말해 주었다.
근데 집무실은 일하는 데 아닌가?
“집무실인데 제가 가도 되나요?”
물론 된다고 해도 자주 가지는 않겠지만.
“이 저택에서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어디든지 와도 돼.”
조그만 목소리로 그리 묻자 픽 웃은 아버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후, 잠시 동안 더 이어지던 이야기는 아버지를 찾아온 페른에 의해 끝이 났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오늘은 첫날에 불과했으니까.
“좋은 꿈 꾸거라.”
“잘 자, 에리타. 내일 보자.”
“아버지랑 오라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굿나잇 인사를 건넨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나 역시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던 나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낮에 보았던 그대로 여전히 포근한 모습의 방이었다.
“나갈 수 있나?”
창가로 다가간 나는 문고리를 열고 조심스레 테라스로 나섰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쉬자 답답하던 속이 그나마 괜찮아졌다.
사라지지 않은 불안은 그 존재만으로 갉작갉작 속을 긁어댔다.
애써 신나게 식사를 마쳤지만, 글쎄.
체한 듯한 속은 내려갔지만, 복잡한 머리는 여전했다.
“……책도 있네.”
테라스 문을 닫고, 침대 맞은편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간 나는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빼냈다.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표지에는 커다란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었다.
“작은 새 이야기.”
폭신한 책상 의자에 앉아 펼친 책은 예상했던 대로 어린아이들이 볼 법한 동화책이었다.
내용이 그리 길지 않아서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가 된 아기 새가 다른 무리의 새들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결국에는 다시 제 가족을 찾게 된 이야기.
“……그 후로 작은 새는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책을 덮었다.
대부분의 동화가 그렇듯 행복한 결말로 끝난 이야기.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주 드문 이야기이기도 했다.
고아였던 아이들 중 진짜 가족을 찾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실종된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는 확률은?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책을 덮었다.
이건 동화이기에 가능한 스토리다.
아마 내 이야기는 이것과 다르겠지.
아슬란과 에일런.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아닌 내 껍데기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겨우 생긴 가족이었으니까.
모순적이긴 했지만 내 존재만큼 모순적인 게 또 있을까.
나는 작은 손을 쭉 펼쳐보았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 그들의 끔찍한 결말을 바꾸는 것.
원작을 알고 있으니,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테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정도는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들을 사랑하더라도, 나는 어쩔 수 없는 거짓에 불과했다.
‘……그러니 마음을 전부 주면 안 돼.’
조그만 틈. 아주 조금의 사랑하지 않는 틈은 남겨둬야 했다.
……혹시나 버려지더라도 상처를 덜 받을 수 있게.
온전히 사랑하면 너무 힘들 테니까.
***
“아버지.”
집무실 앞에 도착한 아슬란은 제 앞에 선 에일런을 바라보았다.
“그래.”
“……잠시 후에 찾아 봬도 괜찮겠습니까.”
뒤를 따르는 페른을 힐끗 본 에일런이 물었다.
“잠시 후에?”
“예, 에리타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슬란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 에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오늘 바쁜 저를 대신해 에리타와 함께 있었으니 무언가 알릴 일이 있을 법도 했다.
“페른.”
“먼저 이야기하셔도 괜찮습니다.”
아슬란의 부름에 순서를 양보한 페른이 에일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면 고맙겠어.”
에일런의 말에 하하 웃던 페른은 닫히는 문 사이로 마주친 서늘한 시선에 몸을 흠칫 굳혔다.
제 주인이 본래 서늘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페른은 이내 픽 웃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
아가씨가 오신 지는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택의 분위기가 참 많이도 달라졌다 생각하며.
탁.
문 앞에 페른을 남겨둔 채 집무실로 들어선 아슬란과 에일런이 소파에 앉았다.
“그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고.”
묵직한 아슬란의 시선에 에일런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저 처음 만난 탓에 어색해하는 거라 여겼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나을 뻔했다.
도서관에서 제 손을 꾹 붙잡고 무언가 결연한 얼굴을 했던 에리타.
그리고 정원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을 보였던 제 동생.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연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지금껏 어떤 시간을 보냈기에 에리타가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거기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상투적인 말뿐이었다.
“……그리된 일입니다.”
길지 않은 에일런의 말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에리타가 내비쳤던 불안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기에 너무도 무거웠다.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걸로도 모자라,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니.
작디작은 아이의 속이 얼마나 문드러지고 짓물러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레노센 놈들.”
차오르는 분노에 아슬란이 낮게 욕을 짓씹었다.
그들로 인해 곁을 떠난 세르비아.
제게는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아들에게는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그리고 영영 잃은 줄 알았던 에리타.
7년 만에 되찾은 제 딸에게 그들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불안을 남겼다.
“에일런.”
아슬란은 저를 꼭 빼닮은 에일런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아버지.”
“에리타를 잘 다독여 주거라. 그 아이가 너를 편하게 여기는 모양이니.”
아무리 아비라 한들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과 같이 에일런에게 내비쳤던 불안감을 저는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서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마.”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에리타가 불안감을 가지게 만든 놈들을 모조리 잡아 끝장을 내는 것.
제 아이들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것은 전부 치워 버릴 것이다.
“그러니 너는 걱정할 것 없다.”
그것이 아슬란이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
닫히는 문 사이로 에일런이 모습을 감추었다.
“페른.”
아슬란의 부름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페른이 안으로 들어섰다.
“도련님께는 알리지 않으실 겁니까.”
“무엇을?”
제 물음에 픽 웃으며 고개를 기울이는 아슬란을 본 페른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주군께서 생포하라 명하신 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 묻는 걸 보니 카일이 성공했나 보군.”
조심스레 말을 꺼냈던 페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신 대로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생포 후 이동 중이니 내일 오후쯤 도착할 겁니다.”
아슬란이 느릿하게 팔걸이 위를 툭툭 두드렸다.
조심성 많은 황후와 레노센이 뒷덜미가 잡힐 꼬리를 남겨 둘 리가 없지.
그래서 7년 전에도 충실한 레노센의 가신 중 하나를 쓰지 않았던가.
필요 없다 여겼던 대공의 직위가, 지금만큼은 기껍기 그지없었다.
제게 남은 아이들을 위한 일이다. 지긋지긋하던 권력을 이용하는 것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아슬란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비록 직접 에리타를 고아원에 데려간 자는 찾을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그를 지시한 자는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았는가.
“에일런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냐 물었나.”
“…….”
“그래. 알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뒷사정을 아는 것은 아슬란, 그 혼자로 충분했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페른의 말에 아슬란은 아주 오랜만에 본 에일런의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에리타만큼이나 포기했던 에일런의 미소였다.
이제야 웃음을 다시 찾은 아들이 아니었던가.
응당 해야 할 복수였지만 아직 어린 에일런이 분노라는 감정에 깊게 빠져드는 것은 원치 않았다.
분노에 젖은 복수는 질척하고 추잡한 감정을 동반했으니까.
“복수에 사로잡히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
그렇기에 이건 제가 끝내야 할 일이었다.
그딴 감정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는 못난 아비가 될 순 없지 않나.
그제야 아슬란은 아까부터 속으로 되뇌던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내 아이들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것이 아슬란이 에일런과 에리타를 위하는 방식이었으며,
그가 지키지 못한 세르비아에게 속죄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