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3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31화(131/218)
눈을 뜨자 잠들기 전과 달리 어두운 방 안이 보였다.
‘밤인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니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온몸을 두드리던 고통도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으…….”
미미하게 남은 건 뻐근함 정도였다.
이번에는 하루만 아팠던 건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기억 이후로는 깨어났던 기억이 없으니 아마 하루가 맞을 테지.
‘아니면 일어났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나는 어쨌든 지금은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기름칠이 되지 않은 갑옷처럼 몸이 삐거덕거렸으나 잠들기 전에 비하면 아주 팔팔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푹 자라고 그런 건지 조명을 전부 꺼 둔 방은 어두웠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비쳐 드는 달빛이 밝았기에 조명이 없어도 아주 깜깜하지는 않았다.
“아홉 시네…….”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계를 보고 돌아오던 내 시선에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그릇과 하얀 천이 들어왔다.
“계속 여기 계셨나?”
물은 아직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때, 문이 자그만 소음을 냈다.
밝은 빛이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오라버니?”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에일런이었다.
하나뿐인 내 오라버니.
“……에리타?”
나는 멍하니 차가운 얼굴이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금세 다정함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내 이름을 부른 에일런이 길쭉한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옆의 등을 켜자 은은한 빛이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몸은 좀 어때. 배는 안 고프고?”
에일런은 다정하게 물으며 부드러운 손길로 내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앞에 시녀를 세워 놓을 거야.”
“…….”
“에리타, 괜찮아? 조금 더 잘래?”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내 모습이 의아했는지 에일런이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내가 말이 없었던 건 아직 머리가 조금 멍한 탓도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회색으로 물들었던 에일런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 가장 컸다.
그리고 그가 진짜 나의 하나뿐인 남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게 고작 어제라는 이유도 있었고.
“일단 물부터 좀 마셔.”
에일런이 내게 미지근한 물을 내밀었다.
다행히 팔은 내 의지대로 잘 움직여 컵을 잡았다.
꼴깍-
반 정도 차 있던 물을 전부 마시자 목이 칼칼하던 느낌이 가셨다.
“……저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예요?”
목을 가다듬었지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 형편없는 목소리를 들은 에일런은 여전히 다감한 말투로 대답했다.
“온종일 아팠어.”
하루라는 뜻이었다.
“으음, 이번에는 하루라서 다행이네요.”
처음 생각했던 대로 하루만 아팠구나.
나는 다행이라 말하며 옅게 웃었다.
“……다행이기는. 너 아프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런 소리를 해.”
에일런이 무섭지 않게 나를 타박했다.
힐난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말투는 나긋했기에 그저 걱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헤헤, 죄송해요.”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얌전히 웃으며 사과했다.
“배는 안 고파? 열은 떨어졌어도 약은 한 번 더 먹어야 하니까 간단하게라도 먹자.”
죽은 넘길 수 있겠어? 에일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무언가 먹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지만 굳이 거절해 에일런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조금만 먹을래요.”
“응, 알았어. 잠시만.”
내가 긍정의 대답을 내놓자 에일런은 길쭉한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에게 죽과 약, 간단한 사탕 정도를 가져오라 이른 에일런은 금방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내가 먹는 약은 포션이 아닌 약초를 배합해 우려낸 것이었다.
한마디로 끔찍할 정도로 쓴맛을 자랑한다는 소리였다.
“조금만 기다리자.”
“네에……. 아, 그런데 아버지는요?”
에일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아버지와 에일런은 내 걱정이 지극해서 매년 내가 아플 때면 며칠이고 내 곁을 지켰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 의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황궁에 가셨어.”
“황궁에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코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는 여전히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황궁에 가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급하게 의논할 일이 있었어. 제국 남부에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더라고.”
내 의문을 알아차린 건지 에일런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전염병이라는 말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세상에, 전염병이라니……. 아버지가 황궁에 가실 정도면 심각한 건가 보네요.”
사실 전염병 자체는 아주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예방 접종이라는 개념도 없을뿐더러 위생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다.
빈민가에 가 본 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전염병이 쉽게 퍼지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니까.
대부분의 평민은 병에 걸려도 신관의 치유를 받거나 값비싼 약값을 치를 만큼 부유하지 않았다.
‘그러니 약만 먹으면 되는 가벼운 병도 전염병처럼 퍼져 버리지.’
씁쓸한 현실이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상단의 이름으로 저렴한 가격에 약을 푸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돌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는데 최초로 병이 발발한 지역에서 나온 사망자만 벌써 천 명을 넘었어.”
“……정말요?”
하지만 에일런의 입에서 나온 수치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두 달 만에 천 명.
그것도 한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황궁에 가신 거야. 너를 혼자 두긴 좀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아침에 에일런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했더니 아침부터 황궁에 갔던 모양이다.
성인이 된 지가 언젠데 아버지와 에일런의 과보호는 여전했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거기다 메리랑 마릴린도 있는데…….”
그게 싫은 건 절대 아니었지만 조금 민망한 건 사실이라 나는 괜히 작게 웅얼거렸다.
“음, 그럼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고 치자.”
아주 눈 가리고 아웅이었으나 나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똑똑-
“도련님, 말씀하신 죽과 약을 준비했습니다.”
때마침 익숙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에일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죽과 약을 받으러 갔다.
열린 문 사이로 눈이 마주친 메리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가 같이 서려 있었다.
“나 괜찮아.”
아직 큰 목소리를 내기에는 목이 아파서 나는 작게 말하며 괜찮다는 의미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메리의 얼굴에 온전한 안도의 화색이 돌았다.
에일런이 나가면 메리가 걱정했다며 나를 꼭 끌어안을 미래가 훤히 보였다.
“억지로 다 먹을 필요 없으니까 먹을 만큼만 먹어.”
“그럴게요.”
다행히 에일런은 죽을 직접 먹여 주는 과보호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오 년 전만 해도 아버지며 에일런이며 내가 숟가락도 들지 못하게 했었는데.
결국 내가 부끄럽다며 소리를 빽 지른 후에야 두 사람은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풋.”
하얀 죽을 휘휘 젓다 생각난 추억에 나는 작게 눈을 접어 웃었다.
아픈 건 싫었지만 아버지와 에일런의 보살핌은 좋아했다.
아마 평생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테지만.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웃어.”
죽을 먹으려다 말고 웃는 내 모습에 에일런이 나긋하게 물었다.
“으음,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
“어릴 때는 아프면 숟가락도 못 들게 하셨잖아요.”
목소리는 가라앉은 채였지만 장난기가 묻어 나오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음, 지금도 그럴 수 있는데.”
하지만 에일런이 나보다 한 수 위였다.
“…….”
나는 다정한 에일런의 시선을 슥 회피하며 쥐고 있던 숟가락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그런 내 모습에 에일런이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지금은 안 그래. 이미 다 큰 동생한테 하기에는 너무 과보호잖아.”
덕분에 내 얼굴만 벌게졌다.
아니, 그게 과보호라는 걸 알면서 굳이 황궁에서 돌아왔단 말이야?
속으로 투덜대 보았을 뿐 당연하게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말로 만약 아버지와 에일런 두 사람 모두 집을 비웠다면 가장 서운해할 건 나라는 걸 나도 잘 알았다.
“……씨.”
정말이지 응석받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말간 죽에 성질을 부렸다.
“흐음, 근데 지금은 숟가락 들기 힘들어 보이는데.”
에일런이 다시금 민망하고 창피한 소리를 한 후에야 나는 숟가락을 원래 용도로 써먹었다.
***
죽을 반쯤 비운 후 쓰디쓴 약을 마신 나는 여전히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열은 떨어졌다지만 종일 아팠던 탓에 기운이 없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까?”
에일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고개만 끄덕이면 정말 잠들 때까지 옆을 지킬 생각인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도 바쁘시잖아요.”
아버지가 황궁에 입궁했을 정도의 일이라면 에일런 역시 한가할 리 없었다.
그것도 심각한 수준의 전염병 때문이라면 더더욱.
“바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게 내 동생보다 중요하지는 않아.”
“저는 괜찮아요. 이제 열도 다 떨어졌고……. 그리고 지금은 잠도 안 와서 그냥 좀 앉아 있으려구요.”
지금까지 계속 잤는데 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럼 위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사람을 보내서 불러. 알았지?”
“그럴게요.”
다행히 에일런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봐요, 오라버니.”
“푹 쉬어.”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에일런은 느릿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