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3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33화(133/218)
하룻밤을 더 자고 일어난 오늘은 확실히 몸 상태가 괜찮았다.
조금 찌뿌둥한 감은 있지만 그건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이지 몸이 좋지 않은 게 아니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겠느냐.”
그러니까 아침부터 입궁해야 하는 아버지와 에일런이 내 걱정에 집을 나서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아버지의 걱정이 묻은 말에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괜찮아요! 저 이제 다 나았는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버지와 에일런은 괜찮다는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양인지 떠나는 걸음을 미적거렸다.
저 옆에 선 테르반과 페른이 한숨을 내쉬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얼굴이 붉어지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전염병이면 심각한 일인데 자꾸 자리 비우시면 다른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할 거라구요.”
“다른 이들은 상관없다.”
민망함에 가볍게 눈을 흘기며 타박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남의 눈치 안 보기로는 가뿐히 일이 등을 거머쥐고도 남을 사람들이라는 걸 잠시 깜빡한 게 내 패착이었다.
“……얼른 가세요!”
결국 아버지와 에일런은 내가 등을 질질 떠민 후에야 느릿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신체 능력이라면 일반인과 견주기도 민망할 만큼 뛰어나면서 두 사람은 옆을 지나는 하인의 걸음보다도 느리게 걸어갔다.
“다녀오세요!”
기가 막혔지만 힘이 쭉 빠진 나는 얌전히 두 사람에게 잘 다녀오시라며 손만 흔들고 말았다.
“하…….”
마차가 저택을 벗어난 후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배웅을 했을 뿐인데 피곤해진 느낌이었다.
“아가씨를 많이 아끼셔서 그런 것이니 조금 귀찮아도 그러려니 해 주십시오.”
그런 내게 테르반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나에 대한 두 사람의 애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아버지와 에일런의 끝없는 사랑이 좋았고.
하지만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치지 않나…….
“그건 알지만…… 음, 저건 과보호라고 해야 맞는 말 아닐까요.”
나는 떨떠름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열여덟이나 먹은 내가 아프다고 황궁에서 열리는 회의에 불참하겠다니.
정확히 말하면 아팠던 건 어제였고 오늘은 아주 말짱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할 얘기였다.
팔불출도 저런 팔불출이 없단 말이지.
“테르반, 아무래도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밤에 오시겠죠?”
아까 들은 말이었지만 괜스레 또 물었다.
“아마 그러실 겁니다. 오늘은 저녁을 준비하지 말라 이르셨으니까요.”
“음.”
테르반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염병에 관한 문제는 쉬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전염병의 무서운 점은 손쉽게 퍼진다는 것이다.
지금은 제국 남부에 국한된 일이라지만 언제 전염병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럼 점심이랑 저녁은 혼자 먹어야 하려나…….’
조금 전까지는 팔불출이 어쩌고 했지만 오랜만에 저택에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테르반, 지금 에반은 주방에 있겠죠?”
“네. 아가씨께 드릴 새로운 메뉴를 만든다면서 주방에 틀어박힌 게 벌써 일주일쨉니다.”
주방에서 쓰는 예산이 도대체 얼마인지.
답지 않은 테르반의 한숨 어린 어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풍족한 예산 아래에서 에반의 연구욕이 다시 도진 듯싶었다.
“으음, 이번에도 매운 요리래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테르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를 사랑하는 에반은 가끔 연구욕을 불태울 때가 있었는데 테르반의 말에 따르면 내가 매운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 주기가 짧아졌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저택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차마 도전하지를 못했다고 하던가.
테르반의 살짝 구겨진 눈매에는 호탕한 형제에 대한 한숨이 묻어 있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말아요. 에반의 요리는 누가 뭐래도 제국 제일이니까 그 정도 예산은 얼마든지 써도 괜찮거든요.”
내가 눈을 찡긋이며 하는 소리에 결국 테르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에반한테 가 볼게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에이, 오랜만에 아버지랑 오라버니 둘 다 집에 없는데 테르반도 좀 쉬어야죠. 이참에 느긋하게 취미 생활이라도 즐겨요.”
내가 씩 웃으며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하자 테르반의 잔주름 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테르반의 취미는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향 좋은 커피를 마시며 고서를 읽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한 취미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그렇게 테르반과 헤어진 나는 말했던 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에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였다.
주방으로 가는 길은 따로 있었지만 주방은 식당과 이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현관에서 식당까지는 금방이었다.
“흠, 역시 고기로 부탁하는 게 좋겠지. 후식은 초콜릿 종류로 하고.”
나는 식당을 가로지르며 에반에게 부탁할 메뉴를 생각했다.
달그락- 통통- 치이익-
소란스러운 내부에 들리지도 않을 노크를 마친 나는 문을 살짝 열었다.
“그만큼이나 넣으면 재료의 맛이 다 가려진다고 했잖아!”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집어넣은 순간 에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얗게 센 머리가 무색하게도 기사들 못지않게 체격이 좋은 에반은 무거운 프라이팬을 한 손으로 다루는 중이었다.
어쩐지 에반을 부르기가 어려운 상황에 나는 잠시 눈을 굴렸다.
그때였다.
“새겨들으란 말이…… 응?”
제자를 가르치던 에반이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하…….”
마주친 시선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에반은 제자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빠르게 내게로 다가왔다.
“아이고, 아가씨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에반의 뒤를 힐끗 보자 세 남녀가 간절함이 철철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세 쌍의 눈동자를 보자 아주 적절한 시기에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는데…… 시간 괜찮아요?”
“아가씨 부탁인데 당연히 괜찮지요!”
에반의 호쾌한 대답에 확 밝아진 세 사람의 얼굴은 에반이 뒤로 돌아 잠시 쉬고 있으라는 소리를 하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변했다.
“아가씨, 이것들 드시면서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디저트만 드시면 목 막히실 테니까 시원한 차도 드려!”
빛에 버금가는 속도로 다과상을 차려 낸 세 사람은 나와 에반을 주방 뒷문을 열면 나오는 작은 야외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들의 신남과 간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몸짓에 나는 차마 간단한 부탁이라 금방 끝날 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하하……. 잘 먹을게요.”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감사하다와 아가씨 최고라는 소리를 연발하며 주방 안으로 쏙 모습을 감추었다.
“하여튼 저놈들을 그냥…….”
에반의 중얼거림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내가 떠난 뒤 세 사람의 운명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하, 그보다 이건 오늘 만든 거예요?”
내가 가리킨 건 디저트라고 놓아 준 딸기케이크였다.
싱싱한 딸기가 예쁘게 잘려 층층이 쌓인 생크림케이크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 케이크 말씀이시지요? 오늘 새벽에 싱싱한 딸기가 들어왔길래 한번 만들어 봤습지요. 요즘 딸기가 제철이라 그런지 가격도 괜찮지 뭡니까? 하하!”
에반이 시원하게 웃었다.
본래의 계획과 달리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지만 입을 호강시켜 준 케이크 덕분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런데 부탁하실 게 무엇이길래 예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아, 이따 점심은 도시락으로 부탁하려구요.”
“도시락 말씀입니까?”
나는 에반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에서 먹으려고 하는데…… 혹시 지금 부탁하면 너무 늦을까요?”
“그럴 리가요! 아직 점심을 만들기 전이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다행이네요. 음, 메뉴는 고기가 들어간 거로 부탁할게요.”
“종류는 상관없으신지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테인이 무슨 고기를 좋아하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테인은 고기라면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었다.
후각이 예민해 향이 심한 건 좋아하지 않지만.
“향이 심한 고기만 아니면 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디저트도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음…….”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테인이 좋아하는 건 초콜릿 맛이었다.
핫초코를 좋아하는 데다가 아이스크림도 초콜릿 맛만 먹으니까.
하지만 이미 딸기케이크를 만들어 둔 에반에게 또 다른 디저트를 요청하자니 좀 그랬다.
“그냥 초콜릿 정도만 넣어 줘요.”
결국 내가 택한 건 그냥 초콜릿이었다.
딱히 무언가로 만들어진 게 아닌 초콜릿 그 자체로도 디저트인 건 맞으니까.
“아, 그리고 도시락은 두 개로 부탁할게요!”
“허허, 알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랑 정원에 가시려고 그러시는 겝니까?”
“테인이랑 가려구요. 아, 테인은 제 호위 기사예요. 에반도 몇 번 봤을 것 같은데…….”
“아하. 그 귀여운 회색 머리 친구 말이군요!”
“맞아요, 귀여운 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테인이 귀엽다는 에반의 말에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마치 내 자식의 칭찬을 들은 것처럼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지금까지는 전부 테인이 사납니, 무섭니, 차갑니……. 하여튼 듬직한 덩치만 보고 오해해서는 말이야.
“사실 테인한테 미안한 게 있어서 기분 풀어 주려고 같이 나들이 가려고 하거든요.”
“호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저도 솜씨 발휘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하!”
에반이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헤헤, 그죠? ……이건 비밀인데 잠깐 대공령에 갔다 오려구요.”
내가 소곤거리듯 한 말에 에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대공령에 가신단 말씀이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 뒤에 숲 있잖아요. 호수 있는 거기.”
들뜬 목소리로 목적지가 어딘지를 알려 주자 에반의 얼굴에 수긍의 기색이 어렸다.
조금 전 내가 말한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아……. 이거 그 친구는 우리 아가씨께 정말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군요!”
당연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