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3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34화(134/218)
에반과 헤어진 후 나는 잠시 연구실에 들렀다.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건드리니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기사단의 점심시간이 한 시간쯤 남은 시점이었다.
“지금 가야겠네.”
나는 연구실을 정리한 후 주방에 들러 에반이 야심 차게 준비한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잘 먹을게요, 에반!”
뭔가 바리바리 만들어 준 모양인지 제법 묵직한 도시락 바구니를 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향하는 방향은 기사단이 훈련하고 있을 연무장이었다.
대공령에 있는 대공저만큼 크지는 않지만 수도의 저택도 기사단을 위한 건물과 커다란 연무장 두어 개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하아…….”
조금 전 에반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남기고 왔지만 지금 내 기분을 설명하자면 초조하다는 말이 딱 맞을 터였다.
‘테인이 많이 속상했을 텐데…….’
속이 말이 아닐 내 늑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그랬다.
연구실에서도 고민했지만 여전히 고민스러웠다.
‘그냥 진작 말할 걸 그랬나…….’
테인은 내가 매년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저택에 여럿 있었으니 이제는 테인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오늘 새벽부터 훈련하겠다고 연무장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지.
게다가 잔뜩 굳은 얼굴로 야무지게 내 허락까지 받아 갔으니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하아…….”
나는 점차 느려지는 걸음을 애써 무시했다.
내가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공교롭게도 내가 아플 때면 테인이 중요한 의뢰를 받거나 먼 지역으로 떠나 있었다.
‘유르젠이 중간에서 힘써 줬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안 됐지만.’
타이밍 좋게도 테인이 늘 자리를 비웠던 건 테인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하는 나를 위한 유르젠의 배려였다.
테인은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고, 또 수많은 아픔을 봐 왔다.
그런 테인에게 내가 아픈 모습까지 더 얹어 주기 싫다는 건 그저 내 만족일 뿐이라는 걸 나도 알았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화난 건 아니겠지……?”
테인이 나에게 화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이번에는 얘기가 좀 달랐다.
내 가족들만큼이나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테인에게 무려 몇 년간 내가 연례행사처럼 아프다는 사실을 숨겼으니.
순하디순한 테인이지만 그렇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착한 테인은 내게 무어라 투정을 부리지도 않고 혼자 속앓이만 하고 끝낼 테니까.
챙- 타닷-
날카로운 소리와 둔탁한 타격음이 작게 들려왔다.
느리지만 착실한 걸음은 어느새 나를 연무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잠시 멈춰 선 나는 테인을 찾아 눈을 굴렸다.
“어디 있지……. 아, 저기 있다.”
기사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대련 중인 넓은 연무장을 놔두고 구석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는 테인의 모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보들보들한 잿빛 머리는 땀에 젖어 축 가라앉은 채 테인이 몸을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차라리 와서 화를 내지.”
저한테만 알려 주지 않아 속이 상한다고 와서 화를 내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저렇게 한바탕 몸을 혹사시키고서는 나중에 와서 그냥 내 걱정만 할 게 빤히 보였다.
“엇, 아가씨?”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내 앞으로 후다닥 뛰어왔다.
“아, 제이.”
나보다 네 살이 어려 눈높이가 조금 낮으며 복슬복슬한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제이는 기사 지망생이었다.
정확히는 기사단의 종자.
제이는 심부름하러 다녀오는 길인지 무기 손질제가 가득 든 상자를 안고 있었다.
“심부름 가던 중인 모양이네.”
“네? 아, 네! 그,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이것만 저기 가져다 두면 되거든요!”
내 말에 제 품을 내려다본 제이는 화들짝 놀라더니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물어 왔다.
이렇게 마주친 게 이 주 만이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내가 거절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에 잠시 테인 쪽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어차피 기사들에게 물어볼 게 있었으니 제이에게 물어보면 될 듯싶었다.
“뛰지 말고 다녀오렴.”
“네!”
내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답한 제이는 대답과 다르게 기사단의 무기 창고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뛰지 말라니까…….”
그 모습을 보자 저절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이는 이 년 전 북부의 숲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 아이였다.
산을 건너다 몬스터의 습격에 부모를 잃고 겨우 목숨을 건진 아이는 삐쩍 마른 상태였다.
그렇게 데려와 정신을 차린 제이에게는 갈 곳이 없었기에 결국 아버지가 내 청을 받아들여 제이를 기사단의 종자로 받아 주셨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여전히 테인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뭘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람…….’
철없게도 괜스레 미약한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평소였다면 진작 내가 왔다는 걸 알아챘을 텐데.
‘……어휴. 철없다, 철없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삐죽한 마음을 탈탈 털어 냈다.
그때 저 멀리 창고의 문이 세게 열리는 게 보였다.
천천히 와도 괜찮다고 했음에도 급하게 뛰쳐나와 우다다 뛰어온 제이가 숨을 골랐다.
“에리타 님! 몸은 괜찮으세요?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그, 이거라도 드실래요?”
그러고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우물쭈물 내민 건 자그만 사탕이었다.
숲에서 제이를 발견한 게 마법 재료를 찾으러 숲에 갔던 나여서 그런지 제이는 유난히 나를 잘 따랐다.
기사단과는 딱히 큰 접점이 없는 나와 마주하는 일이 많지 않음에도 그랬다.
“나 주는 거야? 이거 제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이라고 했잖아.”
“그, 그치만 저는 사탕보다는 에리타 님이 더 좋으니까…….”
조금만 더 놀리면 얼굴을 토마토로 만들 것 같은 제이에 나는 웃으며 사탕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제이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입에 쏙 집어넣은 사탕은 달콤한 복숭아 맛이었다.
“음, 제이,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열 개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씩씩하게 답하는 제이의 얼굴에는 꼭 내 질문에 답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아하하, 열 개까지는 물어볼 게 없는데.”
“헤헤…….”
“있지, 내 호위 기사 말이야.”
“아, 테인 님이요?”
제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고 있구나.”
“그럼요! 테인 님이 처음 오셨을 때 방으로 안내해 드린 게 저거든요! 처음 온 날부터 대공 전하와 대련해서 살아남았다고 형님들이 얼마나 놀랐는데요. 기사단 내에 소문이 자자해요!”
제이는 순진한 표정으로 감탄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우리 가문 기사단의 분위기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슬그머니 걱정이 머리를 내밀었다.
어디서든 무엇 하나가 특출난 이들은 시기 질투에 노출되기가 쉬웠다.
“……혹시 테인이 기사들 사이에서 좀 겉돌거나 그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네에?!”
내 물음에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데리고 온 건 맞지만 테인은 아버지와의 대련으로 스스로 자격을 증명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구태여 흠잡을 구석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테인을 보기 위해 몇 번 연무장에 올 때마다 테인은 항상 구석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야 어색해서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혹시 테인이 겉돌고 있을까 싶어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음, 볼 때마다 맨날 혼자 훈련하고 있는 것 같길래……. 혹시 뭐 아는 거 있니?”
내 말을 들은 제이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빠르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테인 님이 혼자 수련하시는 건 이미 다른 형님들이 덤볐다가 깨져서 그래요. 무슨 말이냐면 저번에 다 같이 대련을 했는데 그때 테인 님이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셨거든요!”
제이의 입에서 나온 두서없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테인 님은 단장님이 아니라 소대공님께 따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희랑은 훈련 내용이 조금 달라요……!”
제이의 얼굴에는 내가 기사단 사람들을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제야 나는 테인이 늘 혼자 훈련하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라버니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는다고?”
내 물음에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에일런과 테인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연구실에 올 때도 둘이 같이 왔었지.’
칼리온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었던 날 에일런과 테인은 같이 연구실에 찾아왔었다.
그때는 오는 길에 마주쳤겠거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영 부자연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테인을 데려왔던 날 에일런은 테인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
‘오라버니한테 물어봐야겠네.’
테인에게 물어도 되겠지만 오늘 그 얘기를 묻기에는 내가 테인에게 사과를 해야 했으니 적절하지 않았다.
“고마워, 제이.”
“별말씀을요!”
그때 저 멀리에서 누군가 제이! 하며 아이의 이름을 외쳤다.
“앗, 에리타 님, 죄송해요! 저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응, 얼른 가 봐. 사탕 고마웠어.”
“헤헤, 조심히 가세요!”
헤실헤실 웃으며 인사한 제이는 제 이름을 부른 곳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
“……열심히 하네.”
제이가 자리를 떠난 후 곧바로 테인에게 다가가려던 나는 생각을 바꾸어 테인과 조금 떨어진 화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기사들의 점심시간까지는 이십 분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으니 테인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특별히 할 게 없으니까.’
평소의 테인이라면 가깝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에 멈춰 선 나를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신중하게 검을 휘두르는 테인의 얼굴이 진지했다.
툭-
나는 적당한 화단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그랬던 의미가 없게도 내가 화단에 앉자마자 테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에리타 님?”
조금 멀리 있는 테인이지만 작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테인은 휘두르던 검을 빠르게 갈무리하고는 곧바로 내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왔다.
마주친 눈동자에 짧게 놀람과 다른 감정 하나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안녕, 테인.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멋쩍은 얼굴로 인사하며 볼을 문질렀다.
“여긴 어쩐 일로……. 그보다 몸은 괜찮으세요?”
내게 다가오려다 멈칫한 테인이 두 발쯤 떨어진 곳에서 물었다.
“으응, 지금은 다 나았어.”
대답을 하는 것뿐인데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원래 잘못한 사람이 제 발 저리는 법이었다.
나는 잠시 옆에 놓아두었던 바구니를 눈짓하며 말했다.
“음,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 싶어서 왔는데. ……시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