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3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36화(136/218)
꽤 많았던 음식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메인 요리들을 전부 먹고 에반이 준비해 준 디저트를 먹을 때까지도 우리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말소리가 아니더라도 푸릇한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동물들이 지나다니는 부스럭 소리가 끊이지 않았기에 고요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에반한테 희귀한 식자재라도 구해 줘야겠네.’
나는 느릿하게 초콜릿무스케이크를 먹으며 생각했다.
라그라스 상단 창고를 살펴보면 디저트에 대한 답례로 충분한 것들이 꽤 있을 터였다.
‘되게 평화롭네.’
나는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했다.
보통 침묵은 어색하기 마련이었지만 나와 테인 사이에서 정적은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테인이 목소리를 찾기 전까지는 침묵이 일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많이 떠든다고 해도 정적이 내려앉는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또 목소리를 되찾긴 했어도 테인은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지금껏 말을 하지 않으며 살아온 탓인지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테인은 순한 성격답게 조용했다.
“……!”
누워 있던 테인의 늑대 귀가 쫑긋 선 건 디저트 접시가 전부 비워졌을 때였다.
바스락-
그리고 몇 초 후 테인의 옆쪽에서 덤불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물인가?”
내 말과 동시에 초록색 덤불 사이에서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뀩-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한없이 낮은 토끼는 폴짝폴짝 뛰어 우리 근처로 다가왔다.
“토끼네…….”
테인은 그런 토끼를 얌전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잠시 갸웃거린 토끼는 테인과 눈이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 세 번쯤 뒤로 물러났다.
그 놀란 소리는 흡사 ‘파바박!’에 가까웠다.
사람에 대한 경계는 없어도 포식자인 늑대에 대한 경계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야 테인을 순둥이로 생각한다지만 실제로 테인은 자연의 먹이 사슬 최상위에 속한 늑대였다.
“하하, 얘 너 경계하나 보다.”
“그야 저는 늑대니까…….”
내가 작게 웃자 테인이 조그맣게 대꾸했다.
테인은 유독 조그마한 것들을 조심스러워했다.
“어, 갔다.”
우리 주위를 잠시 빙빙 돌던 토끼는 결국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호기심보다도 본능을 우선으로 따른 듯싶었다.
“마침 당근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쉬워하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대공저 숲에 간다는 내 말에 에반이 챙겨 준 당근이 바구니 안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쓸 일은 없어 보였지만.
“……죄송해요.”
그때 테인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갑작스러운 사과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묘하게 풀이 죽은 테인의 얼굴이 보였다.
꼿꼿하게 서 있던 귀와 조금 전까지 살랑이던 꼬리가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테인의 사과가 토끼가 도망가 버린 것에 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여튼 이놈의 입이 문제야, 문제!’
테인의 기분을 풀어 주고 사과를 하려 데려온 건데 목적 달성은커녕 테인만 시무룩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 아냐. 하하, 당근은 그냥 여기 두고 가면 나중에 와서 먹을 거니까 괜찮아!”
역시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나는 테인에게 변명하듯 뱉은 말을 증명하기 위해 바구니에서 당근을 꺼내어 적당한 곳에 툭툭 던졌다.
그러고는 주절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끼들은 원래 경계심이 많아서 나 보고도 많이 도망가.”
꺼내고 보니 너무 당연해 바보 같은 말이었다.
순발력이 이렇게도 없다니. 슬픈 일이었다.
“흠흠, 어쨌든 그래서 어릴 때는 좀 속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있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기세에 놀라 도망간 거였지만.
어쨌든 내 근처에서 부리나케 도망쳤다는 건 사실이었다.
가지고 온 당근을 전부 뿌려 둔 나는 점심 바구니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우선 이건 내가 맡아 둘게. 들고 다니려면 번거로우니까.”
“다니려면……?”
테인이 내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점심을 먹으면 바로 돌아가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음, 지금 바로 집에 갈 거 아닌데. 괜찮으면 잠깐 걸을래? 보여 주고 싶은 데가 있거든.”
지금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도 충분히 예뻤지만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면 중에는 이보다 조금 더 예쁜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테인에게 할 말도 있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테인은 내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내 말을 잘 들어주는 테인이 예쁘고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가끔은 화도 내고 내 말을 거절하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테인을 구해 준 사람이어서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기 새는 처음 알을 깨고 나왔을 때 눈앞에 있는 이를 어미로 인식한다.
그와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테인을 격투장이라는 시궁창에서 구해 낸 건 나였다.
그랬으니 은연중에 내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감정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까…….’
테인이 유독 내 말을 잘 듣고 내게 싫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게 그런 이유라면 나는 테인이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이쪽이야.”
나는 테인과 걸음을 맞추어 천천히 호수를 따라 걸었다.
둥근 호수의 반절쯤 오자 시냇물이 호수와 합쳐지는 부분이 나타났다.
이 미터쯤 되는 너비의 시냇물은 우거진 나무가 빼곡한 숲속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로 가자.”
나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방향을 틀어 시냇물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숲속으로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옆으로 따라붙은 테인의 물음에 나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물음이 호위 기사로서의 형식적인 그것이라는 건 나도 알고 테인도 알았다.
“여기 사는 동물들은 거의 다 순해서 괜찮아. 그리고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
그러자 테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살래살래 흔들리는 꼬리를 보니 내 대답이 마냥 좋은 듯했다.
만약 정말 이 숲에 사나운 동물이 산다고 한들 순혈 늑대족인 테인보다 더 강할 리가 없었다.
지금처럼 귀와 꼬리만 드러낸 것이 아닌, 완벽하게 수인화를 한 테인의 덩치는 과장 조금 보태어 집채만 했다.
성인 서너 명은 너끈히 태울 만큼 크다고 하면 더 이해가 쉽겠지.
“여기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 많이 어두울 거야.”
숲의 안쪽은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 햇빛이 드문드문 비쳤다.
그렇게 점점 어두워지는 숲속으로 오 분쯤 걸었을까.
나는 성인 너덧 명이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굵고 높은 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그 나무 옆에는 비슷한 크기의 나무들이 곡선을 그리며 늘어서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아 볼래?”
“눈을요?”
“응, 바로 이 앞인데 한 번에 보는 게 더 예쁘거든.”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아버지와 에일런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였다.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광경을 테인에게도 그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테인은 뜬금없는 내 부탁에도 별말 하지 않고 얌전히 눈꺼풀을 닫았다.
“내가 잘 안내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테인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숲이긴 해도 튀어나온 나무뿌리나 커다란 돌들이 없었기에 눈을 감아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
물론 테인은 운동 신경이 좋으니 땅이 고르지 않아도 잘 걸을 테지만.
바로 이 앞이라는 내 말처럼 눈을 감은 테인을 데리고 걸은 거리는 고작해야 열 걸음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역시 여기는 언제 봐도 예쁘단 말이야.’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주 작게 웃은 후 걸음을 멈췄다.
테인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눈 떠도 돼!”
내 말에 테인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가장 먼저 내 얼굴을 확인한 테인은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내가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을 보았다.
그런 테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 역시 테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광지가 아닌 것치고는 생각보다 괜찮지?”
딱히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임에도 빼곡히 자라난 높은 나무들로 인해 밤처럼 그늘이 진 공간.
그런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건 나무 사이로 아주 옅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과 깊지 않은 연못 속에서 발광하는 푸른 돌들이었다.
“저 돌은…….”
“예쁘지? 여기 보이는 반짝이는 돌들, 전부 마력석이거든.”
“아, 마력석.”
“딱히 마력 함유량이 높은 건 아닌데, 호수가 맑게 유지되는 건 저 마력석들 덕분이야.”
꺼내서 쓰려면 사용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저택 창고에 들어 있는 마력석만 해도 이미 차고 넘치게 많았다.
“이 숲에 사는 동물들이 유독 온순한 것도 이 물을 마시고 살아서 그런 거라는 소리도 있고.”
물론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확실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듯이 팔을 쭉 뻗으며 천천히 연못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여기는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 종종 오던 곳이야.”
나는 아슬아슬하게 연못에 발이 닿지 않는 정도의 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깐 앉아 볼래? 가까이서 보면 더 예쁘거든.”
내가 옆을 툭툭 치자 테인은 천천히 걸어와 내게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옆에 앉았다.
바닥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투명한 연못 안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세운 무릎에 턱을 얹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틀어 테인을 바라보았다.
저를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 모습에 테인의 잿빛 눈동자에 미약한 의아함이 서렸다.
“……오늘 어땠어?”
나는 느릿하게 물었다.
“나 오늘 테인 너한테 사과할 거 있거든. 그래서 나 좀 예쁘게 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