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3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37화(137/218)
“있지, 테인.”
“……말씀하세요.”
예쁘게 봐 달라는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던 테인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엉덩이를 대고 앉은 곳의 조금 아래에서는 반짝이는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짝이는 돌들이 가득했다.
“……일단은 제일 먼저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내 말에 옆에 앉아 있던 테인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테인이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아팠던 거 너한테 말 안 해서 속상했던 거 알아. 미안해.”
그저 지나가는 감기로 한 번 앓았던 게 아니라 매년 아팠던 것을 테인에게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속상할 만했다.
숨겼던 이유가 무엇이든 테인을 속상하게 만들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저는…….”
테인은 쉽사리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연분홍색에 가까운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나는 테인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나직하게 말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하니까 나였으면 속상할 것 같더라고.”
“…….”
“만약 테인 네가 매년 심하게 아팠는데, 그걸 나만 몰랐다면…….”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속상할 것 같았다.
설령 내가 걱정할까 봐 그랬다고 할지라도.
차라리 아픈 테인의 곁에서 걱정하며 마음을 졸이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으면 나는 엄청 속상했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너무했다고 화내도 괜찮아.”
내 말을 끝으로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테인은 약간 센 바람이 우리 사이를 한 번 훑은 후에 입을 열었다.
“저는…….”
나는 부러 고개를 수면에 고정하고 듣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인이 내 눈치를 보지 말고 하고픈 말을 전부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
“에리타 님이 매년 이렇게 아프셨다는 걸 들었을 때, 그리고 그걸 저한테 일부러 말하지 않으셨다는 걸 알았을 때…….”
“응.”
테인의 목소리는 조금 느리고 작았다.
“에리타 님에게 저는 언제까지고 못 미더운 아이인 것 같아서…… 그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나는 테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너무 약해서, 그래서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처럼 느껴져서 저 자신이 너무 한심했어요.”
세상에.
조금 전까지 잔잔한 수면 위에 꽂혀 있던 시선이 나도 모르게 휙 돌아갔다.
시선이 마주친 테인의 얼굴은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오늘 아침부터 연무장에 갔던 것도…….”
테인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건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나를 몇 대쯤 때려 주고 싶었다.
저절로 열린 입이 횡설수설 말을 뱉어 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생각도 못 했……. 아니, 일단 테인 네가 약해서 너를 믿지 못했던 게 아니야!”
하늘에 맹세코 테인이 못 미더워서 말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테인이 작고 약했던 시절부터 봐 왔기에 남동생처럼 여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테인을 믿지 못한 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네가 더는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해서…….”
나는 말을 멈추었다.
지금 하는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테인은 지금까지 원치 않은 아픔을 너무 많이 겪었고, 그렇기에 내가 아픈 걸 보면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를까 싶어 숨겼던 것이었다.
만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가벼운 감기에 걸린 나를 보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덜덜 떨던 테인이었으니까.
“저는 에리타 님이 아프셨던 걸 몰랐다는 게 더 아파요…….”
하지만 내가 아팠던 사실을 저만 몰랐다는 게 더 아프다는 테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테인의 연약한 어린 시절을 계속 상기하고 있던 건 테인이 아니라 나였다.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나는 테인의 손을 붙잡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부딪치며 또박또박 말했다.
“테인, 나한테 너는 가족이나 다름없어.”
“…….”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족을 믿지 못하겠어. 응?”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내 말에 마주하고 있던 잿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테인의 표정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스친 감정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저한테도…… 저한테도 에리타 님은 가족이세요.”
잠시 말을 고르던 테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과 목소리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나는 그 이유가 지금의 분위기 탓이라 여겼다.
“앞으로는 저한테 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응, 꼭 그럴게. 하나도 안 숨길게.”
나는 약한 소리를 하며 안겨 든 테인을 토닥이며 몇 번이고 약속했다.
그랬기에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테인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내 말에 어째서 테인의 눈동자가 일렁였는지도.
***
칼리온과 같이 트란 군락지에 가는 날이 하루 뒤로 다가왔다.
“하아…….”
그 말은 바이올렛을 집에 초대한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소리였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쯤 남았으니 아주 곧이었다.
“아가씨, 자꾸 한숨 쉬시면 머리 망가져요.”
연이은 한숨에 내 머리를 매만지던 마릴린이 건조하게 말했다.
“으응, 미안…….”
고용주에게 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말이었으나 나는 마릴린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아마 내가 오 분 동안 쉰 한숨만 해도 벌써 열댓 번이 넘어갈걸.
나는 눈꺼풀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붓에 눈을 감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나를 달래 주듯 느릿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가씨, 그렇게 긴장되세요?”
내게 옅은 화장을 해 주던 메리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보이지?”
내가 긴장한 것 같아 보이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모두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으음, 아무래도 조금 그래 보이네요.”
아니나 다를까 메리의 긍정에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 진짜 이렇게 긴장한 거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 데뷔탕트 무도회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벤트의 경중을 따지자면 데뷔탕트 무도회 쪽이 훨씬 중한 것이었음에도 어째 오늘이 더 떨렸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살면서 내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울적함에 절로 눈꼬리가 내려갔다.
“아마 사적인 관계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때 머리단장을 마무리하던 마릴린이 덤덤하게 답을 흘렸다.
“사적인 관계?”
“데뷔탕트 무도회는 공적인 거였고 이번에 사비에르 영애님과 만나는 건 사적인 일이잖아요. 의외로 많은 사람이 사적인 관계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음…….”
“그리고 사비에르 영애님은 아가씨가 수도에 오셔서 처음 만난 친구나 다름없잖아요.”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아직 친구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친하지 않지만 어쨌든 바이올렛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으니.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내 긍정에 마릴린이 어깨를 으쓱이는 게 거울로 보였다.
“나 의외로 소심한 성격이었나 봐.”
“뭐든지 처음은 어려운 법이니까요.”
마릴린의 말을 부정하기도 어려운 게, 수도에 오기 전까지 내가 가졌던 사교 관계라고는 북부의 릴리가 전부였다.
기사들이나 하녀들, 그리고 페른과 유르젠, 테인과 친하게 지내긴 했으나 그들과 친구라는 관계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거기다 따지자면 릴리도 크로바하츠의 가신 가문이었기에 알게 된 것이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비에르 영애님도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잘될 거예요! 그렇지, 마릴린?”
“네에.”
메리의 다정하고도 호들갑스러운 응원과 마릴린의 짤막한 긍정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아가씨, 사비에르 후작가의 마차가 방금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으응, 지금 바로 나갈게.”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에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조금 이르게 마친 준비 덕에 남는 시간을 책을 읽으며 때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냥 먼저 정원에 가서 기다릴 걸 그랬나…….’
나는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가며 잠시 후회했다.
보통 귀족들이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문 앞까지 마중을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바이올렛 한 명만 초대해 놓고 내가 준비할 것도 없는 정원에 먼저 가 있자니 그것도 영 애매해 직접 마중을 나가겠다고 한 건데.
‘……아니야. 앉아 있다가 만났으면 더 뻘쭘했겠지.’
계단을 다 내려오자 정면에 있는 현관 앞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테르반이 보였다.
“테르반.”
이름을 부르며 걸어가자 테르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고용인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깐깐하고 무서운 집사님이라 불리는 테르반이지만 내게는 다정하고 친숙한 할아버지였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으응, 같이 정원으로 가려구요.”
“후후, 손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테르반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육중한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잘되어 있는 문은 듣기 싫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때마침 사비에르 가문의 문양을 단 마차가 속도를 늦추며 다가오고 있었다.
푸르르-
점차 느려지던 말의 걸음은 적당한 위치에서 아예 멈추었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마차의 문을 열자 그 안에서 하늘색에 가까운 물빛 머리칼을 가진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