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40)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40화(140/218)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칼리온의 얼굴을 바라보자 절로 작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수수한 차림을 했듯이 칼리온 역시 화려하지 않은 평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낯선 듯 익숙한 모습.
“그리 웃으시면 부끄럽습니다.”
반짝이는 은발이 아닌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을 한 칼리온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로 눈매를 접으며 말했다.
“하하, 그냥 오랜만이라서요. 잘 지내셨나요, 리안 경?”
“저야 방랑 기사가 아닙니까. 잘 지냈지요.”
내 장난스러운 물음을 자연스럽게 받은 칼리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도는 마치 여유로운 한량처럼 보였다.
“방랑…….”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우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따지고 보면 얼굴을 본 지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니었음에도 마냥 즐거웠다.
“음, 저기…….”
그때 내 옆쪽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몸을 휙 돌리자 그곳에는 민망하다는 표정을 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볼을 긁적이며 서 있었다.
“누, 누구…….”
나도 모르게 정체를 물으려던 나는 칼리온의 얼굴을 한 번,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칼리온과 함께 있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라면…….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녀님. 이 황자 전하의 보좌관을 맡은 바론 재클린입니다.”
머릿속에 떠올린 이름을 그대로 뱉어 낸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 서렸던 웃음을 보고야 말았다.
“아, 재클린 경……. 미안해요. 제가 주위를 못 봤네요. 에리타 크로바하츠예요.”
나는 애써 밀려오는 쪽팔림을 꾹꾹 눌러 담아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며 인사를 맞받았다.
그러고는 티 나지 않게 칼리온을 흘겨보았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좀 해 주지……!’
분명히 먼저 장난을 친 건 나였으나 어쨌든 알려 주지 않은 칼리온의 책임이 컸다.
그런 내 눈빛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칼리온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본래 그의 웃음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저 눈웃음이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흠흠, 아닙니다. 제가 대공녀님의 뒤쪽에 있었던지라 못 보신 게 당연합니다.”
“그러게 왜 거기 서 있었나? 내 옆에 서 있으라니까.”
“……예?”
칼리온의 갑작스러운 타박에 바론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 바론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지만 칼리온의 저주를 파훼하는 데 필요한 재료에 관해서 몇 번 편지를 나눈 적은 있었다.
‘뭐, 그건 사무적인 용건이긴 했지만…….’
나는 잠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재클린 경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었는데.
“아닙니다.”
바론을 바라보며 묻자 옆에 있던 칼리온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질문의 대상이었던 바론보다 더 빠른 대답이었다.
바론은 미간을 왕창 좁힌 채 그런 칼리온을 아주 살짝 노려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연한 미소를 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큼, 그게,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는데, 별다른 대외 활동을 하지 않으셔서 만나 뵐 기회가 없더군요.”
“아, 제가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애초에 내 성격 자체가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이 되지 못했다.
파티와 모임이 한창인 지금 내가 참석한 사교 모임이라고는 바이올렛의 티 파티가 전부였다.
그러니 바론과 마주칠 일이 없을 수밖에.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감사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감사 인사를요?”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가 내게 고마워할 일이 뭐가 있지?
애초에 얼굴을 맞댄 게 오늘이 처음인데.
내 물음에 바론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대공녀님께서 전하의 그, 저주에 관해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아…….”
“대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우리 전하께서는…….”
바론이 눈에 띄게 울적한 얼굴을 했다.
아까는 그렇게 투닥거리고 노려보더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론이 칼리온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저야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인걸요.”
겸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
시야를 가렸던 하얀 빛이 사그라들고.
“하…….”
눈을 뜬 나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옆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나는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칼리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노려본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하하, 미안합니다.”
“별로 안 미안하신 표정인데요.”
“음…….”
칼리온은 또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바론의 과한 감사 인사와 끝을 모르는 치켜세우기에 잔뜩 당황한 나를 바라보던 조금 전의 표정과 아주 똑같았다.
한마디로 예쁘고 얄미운 표정이라는 소리였다.
“바론이 그대에게 많이 고마워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또 내가 할 말이 없는데.
감사 인사를 원하고 한 건 아니지만 나도 내가 한 일이 칼리온에게는 큰 도움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됐어요.”
민망한 기분이 들어 나는 새치름하게 대꾸하고는 몸을 틀었다.
그렇게 텔레포트를 시전하기 위해 가볍게 붙잡고 있던 칼리온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려던 순간이었다.
“길을 잃을까 무섭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여상스레 내뱉은 칼리온이 떨어지려던 손을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맞잡았다.
정확하게는 내 손이 칼리온의 손안에 감싸인 셈이었다.
“제가 길을 잘 잃는 편이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칼리온이 능글맞게 대꾸하며 씩 웃었다.
‘거짓말…….’
나는 칼리온의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고, 칼리온은 내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거두긴커녕 정말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옆으로 조금 더 붙어 섰다.
자칫 징그러울 수도 있는 그 행동이 그에게는 거짓말처럼 잘 어울렸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칼리온이 싫지 않은,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는 나였다.
“흠흠, 그럼 잘 따라오세요.”
“그러겠습니다.”
앞에 놓인 길이라고는 일자로 뻗어 있는 잘 닦인 오솔길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인적이 없는 길을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평소보다 걷는 속도가 느린 건 누구 하나의 탓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꽤 되는군요.”
칼리온이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 그게, 십 분쯤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잠깐씩 걷던 게 습관이라…….”
생각해 보니 오늘은 군락지 바로 앞으로 이동하는 게 나았을 텐데.
“좋은 습관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네?”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칼리온이 입꼬리를 올리며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느슨하게 잡혀 있던 손이 조금 더 조여들었다.
“아…….”
그 행동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괜히 굳은살 박인 손에 감싸인 내 손으로 신경이 쏠렸다.
‘……진짜 선수 아니야?’
나는 합당한 의심을 하며 고개를 팩 돌려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옆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눈은 여전히 앞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언제 가르쳐 주실 겁니까?”
다행스럽게도 칼리온의 질문은 평범했다.
“음,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둘만의 비밀입니까?”
“……꼭 말을 그렇게 하셔야 해요?”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어 볼멘소리를 냈다.
“제 말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를 흘긋 바라보자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기로 친다면 남우 주연상 정도는 가볍게 받아야 마땅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또다시 엷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제가 전하의 저주를 파훼할 준비가 거의 끝났다고 한 거 기억나시죠?”
“예, 기억합니다.”
트란 열매를 제외한 재료들은 전부 준비되었다.
“여기는 그 마지막 재료가 있는 곳이에요. 오늘 바로는 아니고 사나흘 뒤에 얻을 수 있지만요.”
내 말에 칼리온이 짤막하게 ‘그렇군요.’라는 대답을 흘렸다.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기색이 사라진 목소리에는 어쩐지 복잡한 그의 심정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멸망했다던 세계에서는 눈앞의 이 남자 역시…….
‘아냐, 생각하지 말자.’
그건 이 시간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나로 인해 바뀔 이야기의 결말은 멸망이 아닐 것이었다.
“마지막 재료가 뭔지는 안 물어보세요?”
나는 부러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그에게 밝은 어투로 물었다.
“물어봐도 됩니까?”
그러자 칼리온의 얼굴에서 복잡한 감정이 사라지고, 이내 나와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어차피 곧 도착하면 알게 되실 건데요, 뭐.”
“그럼 그대에게 먼저 듣고 싶습니다.”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트란 열매예요.”
“……예?”
가벼운 내 대답에 칼리온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전하의 저주를 풀기 위한 마지막 재료요. 트란 열매.”
나는 친절히 다시 읊어 주었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제 소유의 트란 나무 군락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