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4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41화(141/218)
“……생각보다 넓군요.”
“그렇죠?”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군락지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커다란 나무들이 적어도 장정 다섯 명이 일렬로 누운 것보다 더 넓은 간격을 두고 솟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트란 열매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고 계시죠?”
“모를 수가 없죠.”
내 물음에 칼리온이 가볍게 웃었다.
하긴, 황실에서 마탑과 거래할 때 몸을 사렸던 이유가 트란 열매 때문이었으니 모를 리가.
라그라스가 트란 열매를 유통하기 전인 몇 년 전의 이야기긴 하지만.
트란 나무는 마력을 먹고 자라며 열매를 맺었다.
그렇기에 트란 열매는 가공하지 않은 열매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물론 열매를 그대로 쓰는 바보는 없지만.
트란 열매를 가공해 보석의 형태로 만들어내면 최상급 마력석보다 적어도 열 배는 뛰어난 마력 에너지원이 된다.
보통 열매 하나를 가공하면 다섯 개에서 열 개 사이의 마력석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황궁에는 마력 들어가는 곳이 상상을 초월하게 많으니 마탑에 한 발 져줄 수밖에 없지.’
더군다나 트란 열매의 알맹이가 아닌 겉껍질은 각종 포션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됐다.
다른 재료로 만든 포션보다 뛰어난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얘네는 자랄 때 다른 나무보다 더 많은 양분이 필요해요.”
칼리온이 고개를 끄덕여 알고 있다는 뜻을 내보였다.
트란 열매 자체가 품고 있는 기운이 워낙 방대하니까.
“보통 양분이란 비료나 땅의 기운 이런 걸 말하겠지만 얘네는 특이하게도 주변에 깃든 마력을 먹고 자라거든요.”
“마력…….”
“공기 중에 떠도는 마력이나 땅을 통하는 마력 같은 거요. 물론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양으로는 모자라서 따로 관리도 해요.”
“흐음.”
“뭐, 어쨌든 이 정도 거리는 둬야 서로 뺏어 먹을 생각을 안 하더라구요.”
나는 나무들을 슥 둘러보고는 혀를 찼다.
원작…… 아니, 이제 원작이라고 하면 안 되지.
내가 보았던 글 속에서 얻은 정보에는 트란 나무 군락지의 위치와 간략한 재배법이 적혀 있었다.
그 재배법에는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순도 높은 마력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주기, 그리고 자잘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이 있어 연구를 거듭해 알아낸 결과가 나무 간에 거리를 두는 것이었고.
‘적당한 거리를 찾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값어치가 보통이 아닌 나무라 막 뽑아서 거리를 옮겨볼 수도 없었단 말이지.
이 나무들은 서로가 일정 거리 밖에 있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가까이 있어도 싫어 했다.
까탈스럽기가 보통이 아닌 나무였다.
“그럼 그대가 오늘 여기에 온 것도…….”
나를 따라 나무를 훑어보던 칼리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흐린 끝말은 오늘 내 용건을 짐작하고 있었다.
칼리온은 눈치가 빨랐고,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얘네 밥 주러 온 거예요.”
“밥…… 말입니까.”
“네. 얘네한테는 마력이 밥이잖아요?”
나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칼리온에게 장난스레 눈매를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며 맞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나를 따라 걸었다.
“제가 전하의 저주를 파훼하려면 트란 열매가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예.”
“근데 그것도 조건이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이게 젤 까다로운 조건이기도 한데…….”
“조건이 무엇입니까?”
“나무에서 떨어진 지 한 달이 넘지 않은 열매일 것.”
내 대답에 칼리온은 답이 없었다.
얼굴을 흘깃 보자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역시 이 조건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기 때문일 것이었다.
“……보통 삼 년에 한 번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짧아야 삼 년이고 길면 오 년도 훌쩍 넘으니까요.”
내 끄덕임에 칼리온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리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침 운이 좋았거든요.”
“그럼…….”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룬 채로 칼리온의 손을 잡아끌어 마저 걸었다.
그러고는 나란히 선 두 그루의 나무 앞에 멈추어 서 밝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마침 딱 열매가 맺히기 직전인 나무가 두 그루 있거든요.”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커다란 트란 나무 두 그루에는 트란 꽃이 만개해있었다.
“며칠 후면 열매가 맺힐 거예요. 트란 열매는 맺히자마자 수확하면 되거든요. 오늘은 마지막으로 양분을 부어 주려고 온 거고.”
“…….”
“전하께 같이 오자고 했던 건, 드릴 말씀이 있어서예요. 아티팩트에 마력을 충전하기도 해야 하지만, 지금 할 얘기는 아무래도 제가 직접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트란 열매를 딴 후에는 곧바로 저주의 파훼를 위한 약을 만들 것이다.
그 모든 걸 생각했을 때…….
나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주일 정도 후에 전하께서 시간을 내주셔야 해요. 그때쯤이면 저주를 파훼하기 위한 준비를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바쁘신 건 알지만 하루 정도는 통으로 시간을 내주시는 게 좋아요. 저주를 파훼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릴지는 저도 짐작할 수가 없기도 하고, 많이 아프기도 하실 거니까요.”
내가 칼리온의 대답이 없다는 걸 눈치챈 건 혼자 몇 마디를 더 떠든 후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푸르지만 어딘가 깊게 침잠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음, 전하?”
어쩐지 그의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가볍게 끌어안긴 그의 품이 단단했다.
“고맙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로 내려앉았다.
“……그저 고맙다는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지금은 이 짧은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낮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가 고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목덜미에 열이 훅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품은 단단했지만 끌어안은 팔은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느슨했다.
“……별말씀을요.”
하지만 나는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택했다.
익숙한 듯 낯선 그의 시원한 체향이 싫지 않았고, 보이는 것보다 더 단단한 품이 좋았다.
***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느릿하게 칼리온의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 들어 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포옹 정도야 유르젠과도 테인과도 가끔 하던 것인데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지.
애초에 그다지 진한 포옹이라고 할 수도 없는 가벼운 접촉 정도였는데.
“옆에 있으면 안 됩니까?”
스르륵 풀어지려던 손을 칼리온이 다시금 단단하게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내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안 될 건 없는데…….”
“그럼 같이 있겠습니다. 혼자는 외로우니까요.”
나는 안 외로운데.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었다.
나무에 마력을 건네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는데, 칼리온은 내가 그러도록 내버려 둘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여전히 열감이 남은 얼굴이 빨리 식길 바라며 느릿하게 두 그루 중 가까운 나무로 다가갔다.
옆의 이에게 잡힌 손의 반대 손을 굵직한 나무 기둥에 얹었다.
까끌까끌한 기둥의 표면이 손바닥을 간지럽게 눌렀다.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오래 걸려도 괜찮습니다.”
빠른 대답은 다정했다.
나는 설핏 새어 나오는 웃음을 내버려 둔 채로 가볍게 눈을 감았다.
심장께에서 맴돌던 마력이 내 의지를 따라 손을 타고 나무로 흘러들어 갔다.
너무 적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많지도 않은 양의 마력을 한 번에 부어 넣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뭐, 이것도 타고난 핏줄 덕이겠지만.’
페른은 내 심장께에 머무는 마력의 양이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것도, 마력 조절이 유난히 쉬운 것도 타고난 재능의 덕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쉬지 않고 나무에 마력을 건네준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보통 얼마나 주는 겁니까?”
“마력을요?”
잠시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내 물음에 칼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알아보기 쉬운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음, 대단위 마법을 펼칠 정도…….”
끝을 살짝 흐린 내 말에 칼리온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의 한 다섯 배쯤?”
그 간격은 조그맣게 나온 내 뒷말에 더 좁아졌다.
“그대 혼자 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걸요.”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몸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상단 소속 마법사들이 번갈아 가면서 해요.”
나는 정말 괜찮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으나 칼리온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싶었다.
결국 나는 칼리온의 손에 이끌려 십여 분의 휴식을 취한 후에야 다른 나무에도 마력을 건넬 수 있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무리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과보호…….”
내가 불만스레 중얼거렸지만 칼리온은 웃기만 할 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딱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반응이 완전 오라버니랑 판박이네.’
곤란한 말에는 웃고 넘어가려는 모습이 에일런과 아주 똑같았다.
“에리타 양, 혹시 뒤에 일정이 있습니까?”
그가 그렇게 물은 건 우리 사이의 대화가 잦아들었을 때였다.
“아쉽게도…… 하나도 없답니다.”
내 첫마디에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던 칼리온이 내 뒷말에 환하게 웃었다.
보는 내 얼굴에 절로 같은 미소가 지어질 만큼이나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이었다.
“있다 하셨으면 매달릴 뻔했습니다.”
그의 속삭임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매달리시면 제가 약속을 취소한다나요?”
“그래 주셨으면 하고 매달리는 거니까요.”
부러 새침하게 대답했으나 칼리온은 그마저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겼다.
낯간지럽지만 마음에 쏙 드는 말이기도 했다.
‘나 참……. 황자는 저런 교육도 받는 모양이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정이 있다고 답할 걸 그랬어요.”
“제가 매달리는 게 좋으십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또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영 민망했다.
내가 어물쩍 말을 뭉개자 칼리온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었다.
그 눈웃음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렸다.
“……흠흠, 그런데 일정은 왜 물어보셨어요?”
“오랜만에 보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요.”
칼리온의 대답에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오늘의 그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전에도 우리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데 오늘은 꼭…….’
지금은 마치 그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 같았다.
조금 미묘한 정도에서 성큼 나아가 간질거림이 떠날 생각을 않는 그런.
“따로 생각해 둔 곳은 있으세요?”
“음…….”
내 물음에 칼리온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혹시 없다면 이 근처도 괜찮아요. ……마침 챙겨 온 간식도 있구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 뒷말을 마저 덧붙였다.
에반이 챙겨 준 간식은 얌전히 내 아공간 속에 들어 있었다.
이럴 줄 알고 가져온 건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