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4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44화(144/218)
부루퉁한 얼굴을 한 메리가 주방으로 떠난 후, 나는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때마침 에일런이 함께 있다는 소리를 들은 차였다.
똑똑-
“들어오렴.”
아버지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같은 집무실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세 사람 다 좋은 오전이에요!”
“왔니, 에리타.”
“잘 잤어?”
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며 인사를 했다.
……아니, 잠깐만.
“안녕하세요, 아가씨.”
책상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서류를 읽어 내리던 페른이 퀭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음, 페른 경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얼굴만 보자면 좀비가 친구 하자고 쫓아와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아버지와 에일런의 얼굴은 여전히 매끈했다.
나는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과 달리 저는 마법사라고요.”
그런 내 시선을 무어라 받아들인 건지 페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체력 훈련을 하라고 해도 들어 먹어야 말이지.”
“원래 마법사는 몸 움직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나도 마법사다만.”
“……장난하십니까?”
진심이다. 페른의 저 말은 진심이 분명했다.
“흠흠, 일단 세 분 다 앉아 주시겠어요? 할 말이 있거든요.”
“저도요?”
“네, 페른도요.”
페른 역시 칼리온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나갈 필요가 없었다.
조만간 페른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게 소파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얌전히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음, 일단 첫 번째로 드릴 말씀은 저주의 파훼를 위한 재료를 전부 모았다는 거예요.”
“……생각보다 빠르구나.”
“라그라스의 상단주는 유능하거든요.”
나는 은근히 유르젠을 치켜세우며 씩 웃었다.
대공가의 창고를 털어 얻은 재료도 상당했지만 유르젠이 아니었다면 모든 재료를 이렇게 빨리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확실히 유능하군요. 보통 재료들이 아니었는데…….”
내 일을 거들어 준 덕에 무슨 재료가 필요한지 정확하게 아는 페른이 감탄했다.
사람이 조금 가벼워 보이긴 해도 의외로 페른은 할 일에는 충실했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보좌관 자리를 차지했을 만큼이나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나는 후후 웃으며 다음 용건을 꺼냈다.
“두 번째로, 재료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전 마법진을 그리는 데 필요한 약을 만들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길면 사나흘 정도 연구실에 박혀 있어야 한답니다.”
이 말을 하면서는 슬쩍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게나 오래 말이냐?”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옆을 보니 에일런의 얼굴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여튼 다들 걱정이 많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조금 웃은 뒤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저도 처음 접하는 분야라서 조금 길게 잡은 거예요.”
“그럼 네가 나올 때까지는 아무도 근처에 지나다니지 말라고 얘기해 둬야겠네.”
“부탁드릴게요.”
내 부탁에 에일런은 한숨을 내쉬며 테르반에게 일러두겠다고 말했다.
내가 테르반에게 말해도 되지만 말해 준다는 걸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깝군요.”
“약에는 시전자의 마력 외에 다른 마력이 섞이면 안 되니까요.”
페른같이 유능한 최상급 마법사와 함께 있음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 탓이었다.
“대신 약을 다 만들고 나서 전하의 저주를 해주할 때는 페른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랑 전하 주위에 결계를 둘러 줘야 하거든요.”
흑마법을 파훼할 장소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페른의 도움이 필요했다.
“최상급 마법사를 결계 치는 데 써먹는 사람은 아가씨뿐일 겁니다…….”
“뭐 어때요. 페른이 도와준다면서요. 원래 조수는 이런 것도 하는 법이라구요.”
헛웃음을 뱉는 페른에게 나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주위에 결계를 두르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건 페른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 얘기가 제일 중요한데요.”
“……아가씨가 중요한 얘기라고 하면 항상 심장이 떨린단 말이죠.”
나는 내 말에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페른의 말을 살포시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들의 제단이 수도의 빈민가 내에 있어요.”
“…….”
“그리고 황후궁의 시녀장이 그 단체의 간부급 이상으로 추정되고요.”
내 말이 끝난 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고요함을 깬 건 페른의 한숨이었다.
“저는 가끔 아가씨의 정체가 의심됩니다.”
“나 참. 기껏 알아 왔더니 반응이 뭐 그래요.”
“보통 정보가 아니니까 그렇죠. 지금까지는 제가 나름 유능하다고 생각했는데…….”
페른은 한탄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건 페른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내가 특이한 거였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기에 나는 멋쩍게 하하 웃었다.
“전하께서 앰버 길드에 말해 둔다고 하셨으니까 자세한 건 그쪽이랑 얘기하시면 될 거예요. 저는 준비할 게 많아서 당분간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내가 직접 빈민가의 제단에 가 보겠다는 건 칼리온의 일이 끝난 후 말해도 늦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일부터 하는 게 낫지.
“어쨌든 제가 할 말은 이게 끝이에요.”
***
칼리온의 길쭉한 손가락이 가죽 노트를 열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동글동글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제 약을 만들 거예요! 그래서 길게는 사나흘 정도 연락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바쁘신 건 알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셨으면 해요. 그럼 약을 다 만든 후에 연락드릴게요!]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주인처럼 모난 곳 없이 둥근 필체를 바라보던 칼리온의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납작한 종이 위의 글씨에서 어떠한 요철이 느껴질 리도 없건만 그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매만지듯 조심스레 종이를 쓸었다.
그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이가 보낸 메시지는 내용마저 그가 간절히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에리타.”
칼리온은 조용히 이름을 한 번 발음해 보았다.
몇 시간 전에 왔던 메시지니 지금은 글에 적힌 대로 약을 만들고 있겠지.
저주를 떠올리자 당장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지겹도록 그를 괴롭히던 고통이 선명히 기억났다.
그건 몸에 새겨진 고통이었다.
“이 고통을 평생 가지고 살 줄 알았는데…….”
전쟁터에서 처음 느끼게 된 두통은 끔찍했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도 그랬으나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해결 방법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구원이 내렸다.
제 스승인 아슬란도 알지 못했고 최상급 마법사인 페른 아일리시도 알지 못했던 고통의 정체는 저주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전하의 저주, 제가 풀어 드릴 수 있어요.
다정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이의 그 말.
팔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에리타는 그에게 선물을 안겨 주고 떠났다.
-행운을 가져다준대요!
서투른 솜씨로 만든 것처럼 어딘가 어설프던 작은 고리.
그리고 그 고리를 건네며 웃어 보였던 보라색의 다정한 눈동자.
에리타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때의 만남은 칼리온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던 위로를 주었다.
“…….”
칼리온이 느릿하게 팔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리 크지 않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기껏해야 작은 책 정도나 들어갈까 싶은 상자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툭-
부드럽게 열린 상자의 뚜껑이 젖혀지고, 모습을 드러낸 건 자그만 고리와 곱게 접힌 손수건이었다.
고급스러운 상자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물건.
하지만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칼리온의 눈빛에서 그가 이 두 개의 물건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대가 다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혹여나 닳을까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고리의 겉면을 매만지던 칼리온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에리타 크로바하츠가 다정하고 강한 사람이라는 건 칼리온 그에게 감사한 일이었다.
그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도 그래서였다.
다정한 에리타라면 분명 깨끗하지만은 않은 자신의 탄생을 불쌍히 여겨 줄 테니까.
단 한 번도 다른 이의 동정을 바란 적 없었지만 그녀의 동정만은 예외였다.
“그대는 내가 이렇게 못난 놈인 걸 몰랐으면 합니다.”
칼리온은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지막이 바람을 읊었다.
자신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정하지도, 배려심이 깊지도 않았고 그렇게 착한 놈도 되지 못했다.
그의 손에 스러진 목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는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죽음에 무뎌졌다.
“모두가 나를 잔인하다 욕해도 좋으나…….”
그대만은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칼리온은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에리타처럼 밝고 다정한 이에게 이기적이고 무정한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가 없어 칼리온은 순하고 불쌍한 양의 탈을 썼다.
그리하면 다정한 그 사람은 저를 외면하지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