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4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45화(145/218)
“……다 됐다.”
나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내가 붓으로 칠하고 있던 바닥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둥근 원의 형태를 띠고 그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약을 완성하는 데에도 예상보다 하루가 더 걸려 이틀을 썼는데, 마법진을 그리는 데에도 이틀이나 걸렸다.
대규모 마법진이 아닌 것을 생각했을 때 이틀이면 오래 걸린 축에 속했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복잡하기가 오죽 복잡했어야지…….’
처음 보는 마법진에다가 술식의 복잡함의 정도가 남달랐다.
비슷한 규모의 마법진을 몇 시간 안에 그려낼 수 있는 내가 이틀이나 걸렸으니.
스스로 말하기에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적어도 내가 걸린 시간의 두 배는 걸리겠지.
이틀 내내 마법진에 매달린 탓에 눈이 쿡쿡 쑤시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당장 침대에 누워 숙면을 하라고 재촉하는 몸을 이끌고 다시 한번 마법진을 꼼꼼히 살폈다.
흑마법을 파훼하는 마법진이니만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다.
***
“으…….”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멍한 머리로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꼼꼼히 쳐진 커튼 사이로 한두 가닥의 노을빛이 주홍색으로 비쳐 드는 방은 익숙한 수도 저택의 내 방이었다.
“마법진 확인하고 여기로 와서 잠들었나 보네…….”
새벽에 작업을 끝내고 잠들었더니 벌써 저녁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후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기절하듯 구겨져 누워 잠들었던 탓인지 온몸이 다 뻐근했다.
“아으, 어깨야.”
내가 바닥을 딛고 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때였다.
달칵-
“아가씨!”
일어나자마자 울린 종소리를 들은 건지 메리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흘 만에 제대로 본 탓인지 평소보다 메리가 조금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안녕, 메리. 잘 있었어?”
“저는 당연히 잘 있었죠. 아가씨는 어떠세요? 배는 안 고프세요? 목욕부터 준비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좋으려나요?”
메리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빠르게 다다다 말을 뱉었다.
이틀째 되는 날에 식사를 건네받으면서 가볍게 얼굴만 보고 곧바로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또다시 이틀을 박혀 있었더니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으음, 잠은 충분히 잤어. 지금은 목욕부터 할게.”
“목욕부터요? 조금 전에 준비해 두라고 했으니까 바로 가시면 될 거예요!”
“역시 메리는 내 마음을 잘 안다니까.”
“아이참……. 저는 언제나 아가씨를 생각하니까 그렇죠.”
내가 샐쭉 웃으며 메리의 팔짱을 끼자 메리는 그제야 걱정을 덜어 낸 듯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메리의 걱정이 과한 건 사실이었으나 메리의 마음이 어떤지 알기에 나는 얌전히 웃기만 했다.
“메리,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집에 계셔?”
“네에. 두 분 다 저택에 계세요. 말씀 전달드릴까요?”
메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일어났다고 전해 줄래? 준비가 끝났다고 말하면 알아들으실 거야.”
“음, 알겠어요!”
메리는 무슨 준비인지 묻지 않고 곧바로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말을 전하러 갔다.
욕실에 도착하자 메리의 말대로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하녀들을 물리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죽겠다…….”
나흘 내내 혹사한 몸이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에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연구실에서도 클린 마법을 중간중간 사용하긴 했지만 역시 목욕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청결 면에서는 똑같지만, 이 나른한 느낌은 클린 마법으로는 느낄 수 없는 거니까.
“그래도 어떻게 일주일 전에는 끝냈네…….”
삭신이 쑤시긴 하지만 실수 없이 빠르게 끝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뜨끈한 물 속에 있고 싶었지만, 여유를 부리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버지랑 에일런도 걱정했을 테고.’
칼리온에게도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읏차-”
해결해야 할 일을 떠올린 내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후 기본 단장을 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앗, 아가씨! 벌써 나오신 거예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도중 메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응, 아버지랑 오라버니 빨리 뵙고 싶어서.”
“후후, 그렇지 않아도 두 분도 아가씨가 나오셨다는 소식에 반색하셨어요.”
“정말?”
“그럼요! 지금 바로 가실 건가요? 혹시 몰라서 주방장님께 간단한 식사를 받아 왔는데.”
그 말에 내 시선이 메리가 조금 전 테이블에 올려 둔 바구니로 향했다.
“음…….”
그리고 다시 고개를 슬쩍 돌리자 누가 보아도 내가 식사를 하고 나갔으면 하는 듯한 메리의 강렬한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네.
장담하건대 나는 평생 메리의 저 애절한 시선을 이길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럼 조금만 먹고 갈까…….”
못 이기는 척 소파로 다가가 앉으니 메리가 화색을 띠었다.
그러고는 바구니에서 하나둘 접시를 꺼내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나 참. 나보다 더 열심히 내 식사를 챙긴다니까.
그렇게 잠시 기다리던 내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저, 메리?”
“네?”
“……간단한 식사라고 하지 않았어?”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으며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간단한 식사의 정의가 메뉴가 다섯 개 이상인 식사로 바뀌었지?
목욕을 그렇게 길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거기다 저 많은 요리를 어떻게 바구니 안에 담아 왔대.’
내 말에 메리는 헤헤 웃으며 저녁이니까요! 라는 변명을 했다.
그러고는 식기 전에 얼른 드시라며 먹기 편하게 접시들을 옮겨 주었다.
“잘 먹을게.”
그 반응에 웃음을 터뜨린 나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딱히 밥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인지 나는 금세 접시들을 말끔히 비워 냈다.
“고마워, 메리.”
“별말씀을요!”
입가심으로 준비된 과일까지 냠, 먹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아버지한테 가 볼게.”
“네에, 다녀오세요!”
내게 저녁을 먹이는 것으로 만족한 메리는 흡족해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하여튼 속이 훤히 보이는 게 참 귀엽다고나 해야 할까.
나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달칵-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엇, 오라버니?”
“안녕, 에리타. 오는 소리 들었어.”
갑작스레 열린 문에 댕그랗게 눈을 뜬 내게 에일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역시 소드 마스터의 청력이란.
그래도 평소에는 내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잘 기다려 주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마중까지 나왔네.
“아가, 얼른 들어오려무나.”
그보다 더 안쪽에서는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지 않게 재촉하시는 걸 보니 아버지와 에일런 두 사람 모두 내가 목욕을 하고 밥을 먹는 동안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괜스레 웃음이 삐져나왔다.
“준비한다고 조금 늦었네요.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잘 계셨어요? 저녁도 드셨구요?”
“벌써 일곱 신데 우리는 먹었지. 너를 깨울까 했는데 푹 자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나는 에일런의 팔짱을 낀 후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아버지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그 후의 이야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약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연구실 아래쪽에 마법진을 완성했다고.
이제 칼리온의 저주를 파훼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
나는 책상에 놓아둔 수정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연락을 기다렸다.
물론 기다리는 연락의 대상은 칼리온이었다.
‘괜히 직접 말하겠다고 했나…….’
칼리온에게 통신을 걸려는 아버지를 말릴 때는 별생각 없이 그냥 내가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유난인가 싶었다.
하지만 헤어질 때 칼리온이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하기도 했고…….
‘그리고 약 완성하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아직 못 했으니까 유난은 아니지……?’
나는 꽤 그럴듯한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웅-
그때 미미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통신구가 반짝였다.
기다리던 연락의 답이었다.
나는 재빨리 갓난아기의 얼굴 정도 되는 크기의 통신구에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라그라스 상단이 유통하는 최상급 통신구가 빠르게 상대의 얼굴을 띄워 냈다.
-좋은 저녁입니다.
언제나처럼 옅은 눈웃음을 지은 칼리온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직접 얼굴을 본 게 며칠 전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통신구를 통해 본 칼리온은 어쩐지 조금 낯설었다.
똑같은 눈웃음일진대 조금 더 나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저녁이라서 그런가?
-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칼리온이 조금 멋쩍어하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인사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 그게 아니라……. 그, 좋은 저녁이에요, 전하.”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에 칼리온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보니 조금 새롭네요. 매일같이 편지만 주고받아서 그런가.
다행히 칼리온은 가볍게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저도 이렇게 보니까 조금 낯설어서……. 빤히 쳐다봐서 죄송해요, 전하.”
-덕분에 그대 얼굴을 실컷 봤으니 내게도 좋았습니다.
그의 말에 한여름의 태양 아래 서 있는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흐릿하게 켜 둔 조명 탓에 주변이 어둑한 것에 감사했다.
칼리온의 능글맞은 태도에는 조금 적응이 됐다 싶었는데, 조용하고 나긋한 그에게는 아직 면역이 없는 모양이었다.
“전하는 말이 너무…….”
나는 누군가 가느다란 나뭇잎으로 간질이고 있는 듯한 감각이 맴도는 손을 꾹 쥐며 웅얼거렸다.
-제 말이 무얼요.
“……좀, 바람둥이 같아요.”
민망해하는 나와 달리 시종일관 잔잔한 칼리온의 얼굴에 괜히 심통이 나, 나는 불퉁한 말을 툭,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