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4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48화(148/218)
“흐아…….”
나는 쓰러지려는 몸을 석판을 짚어 겨우 지탱해 냈다.
미칠 듯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언제나 충만하던 마력이 한 줌도 채 남지 않고 모두 빠져나간 탓이었다.
몇 분간 그렇게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간단한 마법도 못 쓰겠네…….’
지금은 마력을 움직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숨 쉬는 것처럼 쉽게 마력을 다룬다고 해도 말이다.
다행히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고통은 잦아들었지만, 그 고통이 찾아들었던 흔적은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이 흐르는 자리가 죄다 달구어진 것처럼 후끈후끈 아팠다.
‘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몇 시간 푹 쉬면 괜찮아질 건 알지만 지금 당장은 진이 쭉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이 공간을 유지하고 있을 페른을 생각하면 빨리 신호를 주어야 했다.
페른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석판을 짚은 팔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괜찮습니까?”
대신 조금의 놀람이 섞여 있는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전하?”
조금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보인 건 칼리온의 얼굴이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
잠긴 목소리로 낮게 속삭인 칼리온이 순식간에 석판에서 내려왔다.
분명 칼리온의 몸에도 부담이 갔을 터인데 그의 몸놀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가벼웠다.
“저, 놔주셔도 되는데…….”
땅에 내려와서도 나를 부축한 손을 거두지 않는 칼리온에게 슬쩍 말해 보았지만, 그의 팔은 단단히 나를 지탱할 뿐이었다.
“그대 얼굴이 창백합니다.”
“나름 참을 만…….”
“안아서 옮기는 게 더 좋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단호한 칼리온의 대답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몸에 힘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안겨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수치스럽단 말이다.
화악-
그때 천장에서부터 결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페른이 결계 안의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익숙한 연구실 지하의 풍경이 드러났다.
“……성공하셨군요.”
우리를 본 페른이 지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으응, 페른도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나는 그런 페른에게 느릿하게 하하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수준급의 결계를 장시간 펼쳤으니 페른의 피로도 상당할 터였다.
이런 저질 체력의 마법사 둘 사이에서 칼리온은 홀로 쌩쌩했다.
“페른, 우리가 마법사라서 체력이 약한 걸까요?”
“……저희가 정상인 겁니다.”
우리의 쑥덕거림에도 칼리온은 얌전히 웃으며 나를 부축할 뿐이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며 나를 놓아주지 않은 칼리온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단 한 번도 오르기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계단의 길이가 오늘따라 세 배 정도로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그랬나.’
이건 운동과 상관없는 마력 고갈과 고대 마법을 펼친 후유증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나를 흔들림 없이 지탱하는 칼리온의 팔에 괜히 민망해져 그런 생각을 했다.
나를 앞서간 페른의 눈빛이 어쩐지 묘한 것도 같았지만 그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끼익-
페른이 몇 시간 사이 퀭해진 얼굴로 두꺼운 철문을 밀었다.
“에리타.”
가지 않고 연구실에서 기다리겠다더니, 정말로 여기서 일 처리를 하며 기다린 듯한 아버지와 에일런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해서 나는 부러 환하게 웃었다.
“조금 오래 걸렸죠? 파훼는 깔끔하게 성공했어요.”
***
나와 칼리온은 조금의 거리를 두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며칠 후 다시 만나서 앞으로의 일에 관해 얘기하려던 계획은 급하게 아버지에게 연락을 넣은 케이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정확히는 며칠 후 만나려던 것이 지금 당장으로 당겨졌다.
“……지금요?”
“그래.”
내 떨떠름한 물음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체와 시녀장에 대해 알아낸 게 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뒤이은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케이든의 용건을 들으니 확실히 급한 일이긴 하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을 만큼 피곤했지만 케이든이 가져올 소식에 대해 들은 이상 그 마음은 곱게 접어 저 멀리 날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의 피곤함보다는 그가 알아낸 것들이 더 궁금했다.
“……아.”
잠시 느릿하게 눈을 문지르던 나는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여기는 내 연구실이었고, 내가 이 저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말은 지금 필요한 게 바로 이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칼리온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일런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려고?”
에일런의 물음에 잠시 저쪽에 서서 얘기하고 있던 아버지와 페른의 시선마저 이쪽으로 향했다.
심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잠깐 가져올 게 좀 있어서요.”
나는 느릿하게 대꾸하고는 어정쩡하게 일으켰던 몸을 이끌고 내 책상으로 다가갔다.
잠깐 앉아 있었던 몇 분도 쉬기는 쉰 거라고, 아까 전보다는 상태가 조금 나았다.
“여기 있던가……?”
맨 위의 서랍을 열어 보았지만 내가 찾는 건 없었다.
“음…….”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포션을 둘 만한 곳이 어디지?
보통 포션 같은 건 아공간에 넣고 다니지만 남은 재료들로 설렁설렁 만들었던 포션 몇 개는 연구실에 남아 있을 터였다.
아공간에 들어 있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들은 아니라도 지금 이 피곤한 몸을 한결 개운하게 만들어 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찾았다!”
차근차근 책상을 뒤지던 나는 가장 아래 서랍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작은 유리병에서 찰랑거리는 포션은 물처럼 투명한 색이었다.
‘마침 딱 세 병이네.’
나는 밝은 표정으로 몸을 돌려 칼리온과 페른에게 포션을 한 병씩 나누어 주었다.
“간단하게 만든 거라 효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앞에서 느껴지는 에일런의 시선에 저만 쏙 빼놓고 주었다는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포션은 딱 세 병뿐이었고, 에일런의 얼굴은 멀쩡했으니까.
***
케이든이 도착한 건 포션을 마시고 십 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아공간을 열지 못해 아쉬운 대로 찾아 마신 간단 포션은 바닥난 기력을 전부 회복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멀쩡히 앉아 머리를 굴릴 정도로는 만들어 주었다.
“급하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은 정보라.”
케이든은 담백하게 고개를 숙인 후 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나는 연구실에 큰 소파를 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케이든의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보십시오.”
케이든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서류 뭉치의 맨 앞 장에는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비쩍 마른 여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케이든이 꺼내 든 이 초상화 속의 여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델리아 란테…….”
내 옆에 있던 칼리온이 나직하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마 그에게는 낯익은 얼굴일 수도 있을 터였다.
“이름은 델리아 란테. 아시다시피 현재 황후궁의 시녀장이며 나이는 쉰넷입니다. 아이샤 레노센이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해에 시녀장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케이든의 설명을 들으며 델리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가 보았던 장면 속의 델리아는 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고작 신경질적이고 서늘한 말투와 쇳소리가 섞인 것 같은 목소리, 그리고 체격과 이름, 이 정도가 델리아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조금의 분노와 약간의 토기가 밀려들었다.
얼굴을 맞댄 것도 아니고 그저 초상화를 본 것뿐인데도 그랬다.
“한데 찾아보니 이 신분은 거짓이더군요.”
“……거짓이라니. 시녀장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철저한 검증을 거칠 텐데.”
케이든의 말에 의문을 표한 건 칼리온이었다.
확실히 보통 귀족가도 아니고 황궁의 시녀장을 뽑는데 신분 조사를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정확히는 남의 신분을 뒤집어썼다고 해야겠군요.”
“신분을 샀다는 말인가?”
“흐음, 란테 남작가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델리아 란테 남작 부인도 존재하고요.”
케이든은 서류 뭉치에서 종이 한 장을 빼냈다.
“이건 남부에 위치한 란테 남작가의 증명 서류입니다. 이건 저희 측에서 따로 조사한 서류고요. 눈여겨보셔야 할 건 여기입니다.”
여러 쌍의 시선이 케이든의 손가락이 툭툭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략 이십일 년 전 란테 남작가에 닥친 불운이 서술되어 있었다.
[영지에 닥친 전염병으로 인해 당시 가문을 이끌던 게르만 란테 남작과 그의 장남, 차남이 사망. 친척은 연이 끊긴 지 오래되었음. 현재 생존한 란테 남작가의 일원은 델리아 란테 남작 부인이 전부.]보고서를 읽자 남의 신분을 뒤집어썼다는 케이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델리아……, 아니, 그 여자는 델리아 란테의 신분을 뒤집어쓴 거였다.
아마도 진짜 델리아 란테는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명을 달리했겠지.
그리고…….
“설마 란테 영지의 전염병을 일으킨 게 그 여자라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페른이 경악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이었다.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아직 거기에 대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보고서가 올라오면 곧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정말로.”
나는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