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5화(15/218)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났다.
소대공이라는 위치에도 에일런은 다른 기사들과 똑같이 훈련을 했다.
흙바닥을 뛰고 구르고 먼지투성이가 된 모습이었지만 퍽 멋있었다.
저 얼굴이면 어떤 모습인들 멋있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지겨우면 언제든지 먼저 올라가. 알았지?”
“네!”
전혀 안 지겹겠지만 일단 대답은 힘차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착한 에일런은 훈련을 뒤로하고 나와 있을 테니까.
일정을 방해하는 건 나도 원치 않았다.
“다녀오세요!”
잠시 휴식을 가졌던 에일런이 다시 시작된 훈련에 연무장으로 나섰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에일런이 대련을 준비하는 무리에 합류했다.
그 모습이 이질적인 듯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무심한 표정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에일런은 생각보다 더 기사들과 가까워 보였다.
기사들도 에일런을 그렇게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고.
사용인들이 에일런을 어려워하는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러고 보면 기사들이 참 많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백 명이 훌쩍 넘는 것 같은데.
물론 내가 보지 못한 기사들이 훨씬 많았다.
연무장 옆에 있는 본채보다 조금 작은 건물이 대공가 소속 기사들의 숙소였다.
들어 보니 이곳에 있는 기사들보다 다른 곳에 있는 기사들이 더 많다던데…….
“진짜 이상해. 그것도 엄청.”
아무리 생각해 봐도 원작은 순 엉터리가 틀림없었다.
일단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악당인 건 둘째 치고.
‘왜 그렇게 쉽게 당했느냐는 거지.’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이 세계관 내의 최강자였다.
오라버니 역시 그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그 둘뿐이면 조금 의아하긴 해도 그런가? 하겠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긴 몰라도 수백 명에 달하는 기사단의 전력이 약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원작에서는 왜 그렇게 쉽게 당했을까.’
악당 역할이긴 했는데, 사연이고 과거고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
애초에 아버지가 남주랑 척을 질 이유는 또 뭐고. 오히려 1황자랑 적대 관계라면 모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였다.
“작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담.”
지금만큼 작가의 머릿속이 궁금할 때가 없었다.
원작에서 시원하게 아슬란의 과거를 보여 주기라도 했으면 답답하지라도 않지.
결말을 바꾸겠다고 호기롭게 다짐은 했지만, 아슬란과 에일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원작을 알고 있으면 뭐해. 아슬란이랑 에일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쥐뿔만큼도 없는데.
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내 무력함에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어른이었다면 편하기라도 할 텐데.
“아니야.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이랬잖아.”
우선은 주위 사람들한테서 정보를 좀 얻어 보자.
딱 떠올려 봤을 때, 얘기를 듣기 가장 수월할 것 같은 사람은……
“역시 에반 할아버지겠지.”
차가운 인상과 반대로 주방장인 에반은 굉장히 유쾌하고 수다스러웠다.
가끔은 닮은 얼굴 탓에 집사님이 생각나 흠칫하기도 했지만.
소소하지만 방향을 정하자,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나는 머리를 흔들고는 벌떡 일어섰다. 스트레칭도 할 겸 팔다리도 쭉쭉 펴고.
요즘 내가 열심히 지키고 있는 규칙이 있었다.
매일 아침 기지개 켜기와 하루에 우유 석 잔씩 꼬박꼬박 마시기.
일단은 어린아이의 몸이 아닌가.
“빨리 커야 할 수 있는 게 많아지지. 기왕이면 키도 좀 크고.”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키를 떠올렸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데도 전혀 둔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렵해 보였지.
거기다 저기 기사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을 만큼 훤칠한 에일런을 보라.
이래 봬도 에리타 역시 같은 유전자를 공유했다, 이거지.
기대감이 쑥쑥 차올랐다.
이전에는 그리 큰 키가 아니었기에 이번 생에는 키가 좀 컸으면 싶었다.
그때였다.
“주군! 처리해야 할 서류가……!”
“됐다. 급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급하지 않다니요!”
장신의 바람을 담아 까치발을 들고 팔을 쭉 뻗던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입꼬리가 저절로 밀려 올라갔다.
몸을 휙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이쪽으로 걸어오는 아버지와 페른이 보였다.
“아버지!”
“그래.”
나는 후다닥 아버지의 앞으로 달려갔다.
자연스레 나를 안아 드는 품도 이제 익숙했다.
저번이었나, 쑥스러워서 안기지 않으려고도 해 보았지만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에 그냥 계속 안기기로 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페른 얼굴이……, 음.”
잘생긴 얼굴이 잔뜩 퀭해진 페른을 보자 저절로 말이 흐려졌다.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당연히 괜찮겠지. 자네보다 내 일이 더 많았으니까.”
“지금 전하와 저를 비교하시는 겁니까? 저는 마법사라구요!”
심드렁한 아버지의 대꾸에 새되게 소리치는 페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 들으라고 하는 소리긴 한데, 정작 들어야 할 이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다.
사실 페른의 저런 모습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그러거든. 일주일에 한 다섯 번 정도?
갈수록 깊어지는 한숨이 짠했지만 힘없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버지가 페른의 속을 더 뒤집기 전에 말을 돌리는 것 말고는.
“그,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은 어디 간다고 얘기도 안 했는데.
“저택에 주군의 눈이 닿지 않…….”
“위에서 너와 에일런이 있는 것을 보았다.”
페른이 하려던 말을 단칼에 끊은 아버지가 무심히 말했다.
“……왜 자꾸 제 말을 끊으십니까.”
“죄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니 그렇지.”
페른의 항의 역시 단호하게 잘려나갔다.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슬며시 그를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친 페른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아주 달관한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혼자 심심하지 않았느냐.”
속으로 페른에게 심심한 응원을 건네던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조금 전까지는 오라버니랑 같이 있었는걸요.”
“에일런?”
“네! 아까 오라버니가 대련하는 거 봤는데, 진짜 멋졌어요!”
내 말에 아버지가 에일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마침 상대의 검을 날려 버린 에일런이 덤덤하게 제 검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와아……!”
아까에 이어서 벌써 3연승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오기 전에도 오라버니가 두 번이나 이기셨거든요.”
나는 아버지에게 자랑하듯 말해 주었다.
오라버니 대단해! 이런 마음을 잔뜩 담아서 말이다.
“그래. 실력이 많이 늘었어.”
아버지는 에일런을 한 번 바라보고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내가 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족스레 웃으며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일런이 빠른 걸음으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아버지.”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아직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멀었지만요.”
에일런은 갑작스러운 칭찬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고 했던 에일런의 목표는 차근차근 진행 중인 듯싶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나는 부자간의 훈훈한 광경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기왕 내려왔으니 그간 얼마나 늘었나 볼까.”
“봐주지 마십시오.”
“네가 하는 거 봐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훈훈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불타오르는 데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잠시 다녀오마. 괜찮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당사자 둘이 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거기다 아버지가 대련하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
에일런의 대련은 자주 보았다지만 아버지가 검을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안전하게 나를 땅으로 내려준 아버지가 셔츠 위에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제가 들고 있을게요!”
나는 아버지가 페른에게 넘겨주려던 재킷을 대신 받아 들었다.
“무거우면 페른에게 넘겨주고.”
“네!”
“다녀올게, 에리타.”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다치시면 안 돼요!”
나는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응, 그럴게.”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둘은 그냥 귀여운 걱정 정도로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가벼운 셔츠 차림의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에일런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나는 커다란 아버지의 재킷을 팔에 걸친 채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훈련은 잘되어 가나?”
아버지가 연무장으로 들어서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볍던 분위기에 기합이 바짝 들었다고 해야 하나.
“충성을!”
그리 외친 기사들이 일제히 주먹을 쥔 채 가슴께를 두 번 두드리고 떼어 냈다.
“와…….”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그 절도 있는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익숙하게 그 중심에 선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몇백 년 전부터 이어진 기사단의 인사법입니다.”
내 옆에 서 있던 페른이 덧붙여 설명했다.
몇백 년이나 이어진 인사법이라니.
익숙지 않은 시간 단위에 감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페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를 표한 페른이 싱긋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대련에 앞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아버지를 본 후, 페른에게 이전부터 궁금했던 사실을 물었다.
“페른은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처음 나를 데리러 왔을 때도 함께 왔었지.
서로에게 익숙해 보이는 게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페른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아버지의 보좌관인 게 신기하기도 했고.
“음. 아무래도 육 년 전부터 모셨으니까요.”
“육 년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페른이 찬찬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대공 전하를 처음 뵌 건 십 년 전입니다.”
“십 년이면……?”
나는 페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리 많게 봐주어도 이십 대 중반인데.
“제가 열여섯 살 때 참가한 마물 토벌전에서였죠.”
“열여섯에요?”
이곳이 판타지 세계인 건 알고 있지만 마물 토벌전이라니.
그다지 상상하고픈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열여섯이면 오라버니보다 두 살 많을 때잖아.
이곳의 성인이 열여덟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꽤 이른 나이였다.
“뭐, 그 당시 저는 가문에 불만이 많았거든요.”
“아…….”
“제 마법 실력이면 나가도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그때는 참 혈기왕성했다고 말하며 페른이 하하 웃었다.
아무리 가문에 불만이 많아도 그렇지. 마물 토벌전에 나간……
……그러고 보니 페른도 성이 있었지. 평민은 성이 없는데.
게다가 생각해 보니 그는 예법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페른도 귀족이었어요?!”
“예. 아일리시 백작가의 차남입니다.”
모르셨군요. 내 놀란 물음에 선선히 대꾸한 페른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그 태연한 대답에 나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했다.
백작의 차남이면 고위 귀족이잖아.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 몰랐는데.
“하지만 집안과는 거의 절연한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네?”
“육 년 전에 집을 뛰쳐나왔거든요. 그때 호적에서 파 버린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진짜 팠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때 이후로는 마주칠 일도 없고 해서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합니다.
페른이 하하 웃었다.
‘엄청난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도대체 뭘 어쨌길래 호적을 파 버린다는 소리까지 나온 거야.
나는 놀라운 사실에 입만 벙긋거렸다.
“흠흠. 재미없는 제 가정사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완전 재밌는데. 대박 재밌어요.
와아아-!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나는 들려온 함성 소리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주군과 도련님이 대련을 시작하시니까요.”
그곳에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있었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아버지랑 오라버니부터 보고.
“대신 다음에 들으러 가도 되나요?”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원하신다면 기꺼이요.”
“그럼 다음에 꼭 갈게요!”
페른이 웃으며 대답함과 동시에 대련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