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5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57화(157/218)
배후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냐는 칼리온의 말에 귀족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미리 말해 둔 얘기였기에 평온한 이 황자파와 달리 일 황자파와 중립파는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일 황자파의 귀족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후작께서는 뭐 아시는 것 있습니까?’
‘난들 알겠습니까? 공작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이게 대체 무슨 얘기란 말입니까.’
대충 그런 뜻을 담고 있는 시선들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으니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겨우겨우 당황한 낯을 숨기고 애써 평온을 유지하려 애쓰는 다른 한 사람.
레노센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단정한 얼굴로 여유롭게 웃고 있는 칼리온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이샤가 부리는 이들의 정체를 알아냈단 말인가?’
노쇠해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조차 딸이 부리는 검은 로브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건만.
그들이 누구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선대공비를 죽이고 선황비마저 죽인 힘을 가진 자들이 아니던가.
증거조차 남기지 아니하고.
그런데 저놈이 어찌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단 말인가.
그가 느낀 불안감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중립파의 굳건한 중추, 메르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전하, 그 지목하실 배후에 대한 증거는 확실한 것인지 여쭈고 싶습니다.”
그의 물음은 타당했다.
아무리 황제가 전권을 위임한 두 황자 중 하나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전염병 같은 큰 안건에 대한 배후를 지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물음에 칼리온이 메르본 공작을 지그시 응시했다.
의뭉스러운 웃음을 띤 깊은 벽안을 마주한 메르본 공작은 괜스레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올해 열아홉이 되셨다고 했던가……. 눈빛만 보면 노련한 장군 못지않군. 확실히 선황을 빼닮으셨다.’
전쟁에서 사 년을 구르며 벼려진 눈빛은 웃음으로 가렸다고 한들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전장은 일분일초에 생사가 오가는 최전방이었으니.
그러나 그 눈빛에 담긴 것이 자신의 물음에 대한 만족이라는 것을 안 메르본 공작은 놀라움을 감추고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고의로 전염병을 퍼뜨린 배후가 있다면 속히 잡아들여야 할 줄로 압니다. 전하께서 고작 심증만으로 저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닐 테지요.”
그 말에 칼리온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그대들에게도 확신을 주어야 하니 심증만으로는 부족하죠.”
“하면 그 확신이라는 건…….”
“사비에르 후작.”
“예, 전하.”
칼리온의 부름을 받은 사비에르 후작이 문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오게!”
***
칼리온이 내민 첫 번째 증거는 사람이었다.
가장 처음 전염병이 발병해 궤멸하다시피 한 지역 생존자의 증언.
-사냥하러 산에 갔다가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수원지에서 얼쩡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 번이나요.
그 수원지의 물은 산에서 마을로 흘렀다.
평민들은 그곳에서 옷을 빨고 물을 길어다 썼고.
물론 그 증언만으로 충분한 증거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전하, 고작 몇 사람의 증언만으로 사실을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전염병의 근원을 찾았다면 어떻습니까.”
칼리온의 말에 다시 한번 분위기가 달라졌다.
평민의 증언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지만, 전염병의 근원은 얘기가 달랐다.
“흠흠.”
칼리온의 신호를 받은 바론이 앞으로 나서며 헛기침을 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확인한 바론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건 처음 전염병이 발병한 남부 로렌스 지방 시아스 마을의 수원지에서 발견한 겁니다. 로렌스 영주와 그 사병, 그리고 제1 황실 기사단이 발견한 것이니 의심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주머니의 조르개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내는 손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꺼내진 내용물은 손바닥의 반절 정도 되는 크기의 새카만 구슬이었다.
우웅-
바론이 마법을 사용해 새카만 구슬을 허공에 띄워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의 중앙으로 보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 전부가 그 불길한 모양새를 보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저 구슬이…….”
“남부를 강타한 전염병의 근원이지요. 아니, 정확히는 저주의 매개체라고 해야 할까요.”
바론이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주……!”
“저주라니! 그게 무슨……!”
그에 돌아온 반응은 거셌다.
회의장이 충격으로 술렁였다.
“전하, 그 말씀은 이 전염병의 배후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까?”
한 귀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보면 되겠군요.”
저주.
금지된 술법.
이 땅에서 흑마법이 사라진 지 삼백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정계에 진출까지 한 귀족이라면 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기 마련이었다.
흑마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 당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하, 하지만 그 구슬이 저주의 매개체라는 증거가 없질 않습니까……!”
당연하게도 상황을 부정하는 이도 있었다.
칼리온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이 구슬에 저주가 깃들어 있다는 걸 확인한 건 크로바하츠 대공입니다.”
“……!”
크로바하츠 대공.
이를 드러내지 않으나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최고 권력가.
황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의 수장.
개인 자체만으로도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이.
아슬란 크로바하츠의 이름은 그만큼이나 무거운 무게를 담고 있었다.
“내 보좌관인 페른 아일리시가 확인한 사실이오. 나 역시 그 결과를 확인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관하던 아슬란의 첫마디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대공께서 직접 확인하셨단 말입니까……?”
“내가 대공께 부탁했습니다. 그리하면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슬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칼리온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반절 이상의 귀족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의심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최연소로 최상급 마법사가 된, 이론 면에서는 마탑의 최상급 마법사보다 더 능통하다는 페른 아일리시의 확인.
그리고 그 결과를 보증하는 아슬란 크로바하츠의 공언.
‘그렇다면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귀족들이 공통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크로바하츠가 항상 중립을 유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의 수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로바하츠가 굳건한 제국의 방패가 되어 주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그때 레노센 공작의 눈짓을 받은 귀족 하나가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부족하다?”
칼리온이 느릿하게 되물으며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에 후덕한 몸집을 자랑하는 귀족은 잠시 멈칫했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 대공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사료되, 됩니다.”
용감하게 일어섰던 것과 달리 귀족은 중간중간 말을 더듬었다.
그도 지금 제가 한 말이 대공의 말만으로는 구슬이 흑마법의 증거가 되기 충분하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음을 아는 탓이었다.
“제국의 방패인 대공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애써 포장했던 말을 칼리온이 적나라한 말로 읊조리자 귀족이 퉁퉁한 손을 내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에게도 대공의 이름은 두려운 것이었다.
살벌한 레노센 공작의 눈빛이 아니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터.
“황자 전하.”
그때 아슬란이 칼리온을 불렀다.
“예, 대공.”
“하면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확인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서 다시 확인을?”
칼리온은 흥미롭다는 듯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사전에 전부 이야기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이 공간에 몇 없었다.
아슬란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좌중을 슥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나른한 얼굴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페른 아일리시가 사실을 증명하면 되겠군요. 뭐, 그로도 모자라다 생각하는 치들이 있는 것 같으니 신전에도 요청하고.”
***
아슬란은 제 말을 빠르게 실행시켰다.
제단에서 인질과 흑마법사를 빼내어 앰버 길드에 맡긴 후 마력 보충 포션을 복용하고 바로 황궁으로 들어온 페른이 귀족들의 눈앞에서 구슬이 순수한 마력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보였다.
그 후에는 신전에서 나온 고위 신관이 순도 높은 신성력을 주입해 구슬이 저주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제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까, 피그 백작.”
“예? 예, 예! 물론입니다!”
칼리온의 물음에 벌써 손수건을 세 개째 사용하던 피그 백작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퉁실한 얼굴이 부르르 흔들렸다.
더는 미세한 부분조차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증명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사장되었던 흑마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회의장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이 이 상황에 대해 우려와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레노센 공작만큼은 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잠시 가졌던 일말의 기대조차 페른 아일리시와 고위 신관의 등장으로 박살이 났다.
페른 아일리시는 대공의 보좌이니 어렵사리나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신전은 달랐다.
아무리 그가 신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는 해도 모든 신관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아슬란이 불러온 저 고위 신관도 레노센을 따르지 않는 이 중 하나였다.
‘흑마법……. 흑마법이라니!’
그는 이 전염병이 딸아이가 부리는 이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온이 전염병의 배후로 지목한 자는 흑마법을 사용했다.
그 말은 아이샤가 부리던 검은 로브의 이들이 흑마법사임을 뜻했다.
‘이래서 알려 주지 않은 것이냐!’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그는 자랑스러운 제국의 대귀족이었다.
하나 만약 황후가 흑마법사들을 부린다는 것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기껏해야 동방의 주술사 정도로 생각했건만!’
주술과 흑마법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지금껏 막강한 영향력을 펼쳐 왔던 레노센 공작이지만 이 문제 앞에서 그간 휘둘렀던 권력은 전부 죗값의 무게로 다가올 뿐이었다.
저 구슬이 발견된 게 처음 전염병이 발발한 지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의는 제기할 수 없었다.
제1 기사단뿐이 아니라 그 마을 사람, 그리고 로렌스 지방의 영주까지 나서 함께 발견한 것이니.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 오히려 레노센 공작, 그가 역풍을 맞을 터였다.
‘제길!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건 공작에게 있어 가슴이 선득하게 조여드는 의미를 가졌다.
저 구슬이 전염병이 처음 발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게 사실이라는 뜻이니까.
어떻게든 제 살길을 찾아내려 머리를 굴리는 레노센 공작의 표정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레노센 공작은 모르는 일이었나.’
그 얼굴을 바라보던 칼리온과 아슬란은 생각을 수정했다.
레노센 공작 역시 흑마법사들의 존재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선황비와 선대공비를 죽이는 데에 가담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죽인 방법이 흑마법이라는 것만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분위기가 과열된 것을 느낀 칼리온이 테이블을 두드려 시선을 집중시켰다.
“진정들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전부 얘기한 것이 아니니.”
“이게 전부가 아니라니……. 하면 또 다른 정보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있다마다. 황후와 레노센을 나락으로 밀어 넣을 정보가 더 있었다.
아직 전부 내보이지는 않을 거지만.
“이번 전염병을 일으킨 이들의 이름은 사아. 삼백 년 전 황실의 칼을 피해 도망쳤던 흑마법사들의 후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