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60)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60화(160/218)
칼리온의 위로를 들은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파고들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았으면 합니다. 정 계속 떠오르거든 제 생각을 해 주세요.”
그렇게 속삭인 칼리온이 거리를 좁혀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성큼 다가온 단단한 품에 얼굴을 묻자 칼리온 특유의 체향과 밤의 온실이 내뿜는 은은한 풀 향기가 밀려들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라더니 자기가 직접 실행시켜 주네…….’
좋아하는 사람의 널찍한 가슴팍에 안긴 순간부터 그에 대한 것이 아닌 다른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정말……. 이러면 다른 생각을 어떻게 해요…….”
나는 작게 웅얼거리며 느릿느릿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질 좋은 실크 셔츠가 맨살에 문질러지는 느낌이 묘했다.
“그렇다면 성공이군요.”
칼리온이 내 어깨를 조금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그렇게 가만가만 나를 보듬던 그가 이내 나직하고 다감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불쑥 사람의 온기가 그립더군요. 사람을 베고 사람의 온기를 원한다는 게 모순적이긴 하지만요.”
그럼 이 따뜻한 포옹은 열다섯이었던 그때의 칼리온이 받고 싶던 위로였을까.
“외롭지는 않으셨어요?”
나는 여전히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댄 채로 그렇게 물었다.
칼리온이 처음으로 사람을 벤 전쟁. 그 전장 위에는 칼리온의 편이 없었다.
황후와 레노센이 손을 써 최전방이면서도 죄 칼리온과 관련이 없는 세력들만 모인 곳으로 그를 보낸 탓이었다.
그곳에서 열다섯의 칼리온은 홀로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끔찍한 죄책감을 감내했겠지.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솔직히 말하면 당장이라도 전장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습니다.”
“…….”
“그것도 점점 무뎌져 나중에는 그곳이 집처럼 느껴질 정도가 되었지만요.”
칼리온이 덧붙인 뒷말이 나를 달래기 위함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그런 말이 오히려 내게 더 슬프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때 전하를 이렇게 안아 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담뿍 담아 그의 허리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때는 이렇게 크지 않았으니 그대를 안아 줄 수 있는 몸을 가진 지금이 더 좋습니다.”
실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지금 그대를 안은 것에는 제 사심이 섞인 터라. 그때는 불순한 의도를 섞기에는 조금 어렸죠.”
뒤이어 칼리온이 나직한 웃음을 담은 말투로 고백했다.
그 말에 나는 칼리온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달빛을 받아 더 깊어진 푸른 눈과 마주하자 그가 작게 눈을 휘었다.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실망하셨습니까.”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로 묻는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실망하긴 무슨.
그의 품에 안긴 순간부터 쿵쿵 뛰어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불쑥 그에게 내 마음을 속삭이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뿐이니까.
“전하.”
“네, 에리타.”
고개를 빠끔히 든 내 부름에 칼리온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무 달큼해 누군가 심장을 살살 간질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전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는 툭, 마음을 꺼냈다.
“제가 전하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 같다는 표현은 너무 모호하게 느껴져 단정형으로 한 번 더 말했다.
무언가를 볼 때면 가장 먼저 칼리온이 떠올랐고, 함께 있을 때는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가 들릴까 봐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를 간지럽게 바라보는 깊고 푸른 눈이 좋았고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좋았다.
예쁜 옷을 입은 것도, 아름다운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명소에 있는 것도, 화려한 꽃다발을 든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내 고백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뱉어 낸 고백이라 더 그랬다.
그리고 분위기도 이만하면 꽤 괜찮지 않나.
달빛 아래의 유리온실.
단어의 조합부터 로맨틱함이 물씬 풍겼다.
“좋아해요, 전하.”
우수수 쏟아진 고백에 칼리온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나를 단단하게 안고 있던 그의 손이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대는…….”
평소의 능글맞고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로 간 건지 칼리온은 제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전하께서 이렇게 당황하실 줄은 몰랐어요.”
나는 작게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라면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 내 말에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칼리온이 결국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합니다, 에리타.”
그러고는 숨길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웃으며 자그만 목소리로 내게 진중한 마음을 건넸다.
“제가 그대를 좋아합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짤막한 고백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진실하게 다가온 고백이기도 했다.
나는 보지 못하지만 나 역시 칼리온 못지않게 환하게 웃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제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그대에게 순서를 빼앗겼네요.”
“저는 기다리는 데에는 재능이 없거든요.”
낮게 웃으며 속삭인 그의 말에 나는 장난스레 답했다.
사실 기다리는 건 익숙했지만 칼리온을 향한 내 마음을 시원하게 인정하고 나니 딱히 인내하고 싶지 않아졌다.
“제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서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샐쭉하게 웃으며 묻자 그가 단호할 정도로 빠르게 부정했다.
그 반응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심장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좋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나 참…….”
칼리온의 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헛웃음을 뱉으면서도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쿵- 쿵- 쿵-
칼리온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귓가를 작게 울렸다.
평균 심박 수와 비교해 보지 않아도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믿으시겠군요.”
굳이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아니, 사실은 칼리온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는 그의 품에 머리를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는 꼴이 됐으나 그와 떨어지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 심장만 요란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나니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하는 언제쯤 말하려고 하셨어요?”
그건 문득 든 궁금증이었다.
조금 전 순서를 빼앗겼다며 허탈한 듯 웃던 칼리온의 얼굴이 생각난 탓이었다.
“솔직하게?”
“네, 솔직하게요.”
내 끄덕임에 그는 음, 하며 잠시 미적거리다가 이내 내일이요, 하고 작게 속삭였다.
“……정말요?”
나는 그의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휙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칼리온은 옅게 웃으며 다시 한번 그렇다고 긍정했다.
“정말입니다. 근사한 곳에서 최대한 예쁘게 차려입은 뒤에 고백하려 했어요. 그대에게 건넬 꽃다발도 미리 골라 두었는데.”
내 서투른 고백이 아니었다면 실행에 옮겨졌을 내일의 계획을 조곤조곤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그와 별개로 조금쯤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칼리온이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과 나를 위해 준비한 꽃다발을 놓친 게 말이다.
“오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고 올 걸 그랬습니다. 제가 나름 제복이 잘 어울리는 몸이거든요.”
그런 내 기색을 알아챈 칼리온이 장난스레 제 자랑을 했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느라 흐트러진 내 머리를 부드럽게 정돈해 주며 부탁했다.
“그러니 내일도 저를 만나 주시겠습니까?”
“……데이트 신청인가요?”
“음, 그렇죠. 첫 고백은 그대가 차지했으니 첫 데이트 신청은 제가 하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레 웃는 칼리온의 웃음이 예뻐 나는 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골라 둔 꽃다발은 첫 데이트 날에 건넬 수 있겠네요.”
칼리온은 그 말을 덧붙이며 정돈한 내 머리카락 한 줌을 쥐고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살짝 불긋하던 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
비슷한 시간의 황후궁.
그 안에서는 쇳소리 섞인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후! 제정신이신 겝니까?!”
황궁 회의가 끝나고도 몇 시간이 흐른 후에야 황후궁에 발을 들인 레노센 공작의 호통이었다.
두 시간이 훌쩍 넘게 기다리며 느꼈던 황후궁 내의 음울한 공기.
그 질척하고도 음산한 공기는 가구의 파편이 사방에 널린 황후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더 짙어졌다.
그리고 일렁이며 황후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새카만 아지랑이.
부정할 수 없이 순리를 거스른 자의 모습이었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아무리 아버님이라고 해도 여기는 내 궁입니다.”
분통을 터뜨리는 레노센 공작에게 황후가 나직이 경고했다.
꾀꼬리 같던 목소리는 되돌아온 저주를 견디느라 끔찍하게 쉬어 버린 채였다.
“내가 지금 목소리를 낮추게 생겼습니까? 오늘 황궁 회의에 올라온 안건이 무엇인지 아느냔 말입니다!”
레노센 공작은 그 경고에 목소리를 낮추긴커녕 형형한 눈으로 고함을 쳤다.
지푸라기보다 더 얇았던 희망은 음울한 황후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분노로 바뀌었다.
“아버님이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으셔도 이미 들었습니다. 이번 전염병이 흑마법사들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지요. 이 내가 흑마법을 다룬다는 것까지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영 멍청한 것 같지만.”
황후가 무표정으로 킥킥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 기괴한 모습이 마치 정신이 나가 버린 이 같았다.
그녀의 방이 엉망인 이유도 황궁 회의의 내용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전의 황후궁은 칼리온과 아실라를 저주하는 끔찍한 언어들로 가득했다.
“그래, 들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흑마법에 손을 댔느냐. 흑마법사들을 부리는 걸로도 모자라 어찌하여 직접 손까지 댄 것이냐고 묻질 않아! 도대체 왜!”
황후의 태연한 대답에 존대를 집어치운 레노센 공작이 황후를 몰아붙였다.
제국이 공적이라 명명한 흑마법사들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건만.
제국의 황후이자 레노센의 직계인 아이샤 레노센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가문의 멸문으로도 모자라 삼족이 내리 멸해질 수도 있었다.
레노센의 피를 이은 모든 이가 죽는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마도 황제의 아들인 일 황자, 테시스 루인 엘베르뿐일 터였다.
그조차도 평생 유폐되어 살겠지만.
“그 자리에 앉으니 보이는 게 없더냐. 이 일을 어찌 해결할 것이냔 말이야!”
레노센 공작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파 앞의 테이블을 쾅쾅, 두드렸다.
이대로라면 레노센의 앞길에 남은 건 끔찍한 몰락이 전부였다.
그 불안감이 공작의 목을 죄어 왔다.
“지금 당장 알지 못해도 황실과 신전이 나서면 그들과 네 관계를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다. 그걸 왜 몰라!”
“알아차리는 게 시간문제라…….”
레노센 공작의 말을 들은 황후가 픽 웃었다.
그건 훗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계획을 조금 더 앞당기면 해결이 될 문제였다.
“그럼 시간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황후의 말에 레노센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 딸이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는 얼굴이었다.
“사흘 뒤에 황제가 직접 귀족들과 백성 앞에서 공표한다 했다. 그리되면 제국의 모든 화살이 그들을 겨눌 터인데 어찌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야!”
황제가 흑마법에 대해 알리는 건 사흘 뒤였다.
사아에 대한 추적은 벌써 시작되었고.
하지만 황후의 얼굴에는 조금의 초조함도 스며 있지 않았다.
“과녁을 하나 더 만들어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주 크고…… 아주 화려한 것으로.”
황후는 그리 스산하게 중얼거리며 깔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