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6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61화(161/218)
오늘따라 유난히 해가 밝은 것 같았다.
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노트를 펼쳤다.
거기에는 우리가 자정이 넘도록 주고받았던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렇게 많이 적을 줄 알았으면 그냥 통신구를 쓸 걸 그랬나…….”
통신구를 사용하면 정말 잠들기 싫을 것 같아서 노트를 쓴 거였는데.
나는 괜히 멋쩍어하며 새로운 글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반짝거리고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그대가 보고 싶어 잠이 오지 않는 새벽입니다. 원래 밤이 이렇게 길었던가요. 그대는 단잠에 들었기를 바랍니다. 잘 자요.] [아침 훈련을 하러 가기 전에 간단하게 편지 남깁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D]하나는 내가 잠든 새벽에, 하나는 내가 일어나기 조금 전에 온 글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다정한 편지를 보낸 상대는 칼리온이었고.
나는 기분이 좋아져 실실대면서도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단정한 필체를 흘겨보았다.
“……진짜 선수 아냐?”
뭐, 본인은 아니라고 말하긴 했지만.
잠을 설쳤다면서 내 단잠을 바라는 거나, 좋은 하루 뒤에 붙은 앙증맞은 표정이나.
연애를 시작한 지 대략 열 시간.
뭐든지 귀여워 보일 내 눈에 저 말들은 오 분에 한 번씩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칼리온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귀여워 보일지 아는 게 틀림없어.’
내가 칼리온의 속내를 훤히 알았다면 실실 웃으며 하지 못했을 말이긴 하나 어쨌든 지금 나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저는 방금 일어났어요. 이제 아침 먹으러 내려가려구요! 전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노트를 덮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들고 다니는 게 낫겠지? 응, 그게 낫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주절거린 나는 노트와 만년필 하나를 들어 아공간으로 쏙 넣었다.
아니, 칼리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노트를 여기 두고 가서 못 받으면 조금 그렇잖아?
다른 사람의 연락에 대한 답을 미루는 건 좋지 않으니까.
나는 평소 내 성격을 아는 이들이 들었다면 코웃음 칠 생각을 하며 복도로 나섰다.
오늘따라 도자기에 꽂혀 있는 꽃들이 화사하게 느껴졌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뭐 좋은 일 있으셨어요? 얼굴이 환하시네요!”
“으응?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날이 좋아서? 하하.”
나는 자꾸만 도독이 솟으려는 광대를 애써 누르며 답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하녀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더니 의뭉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흠흠,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다들 좋은 하루 보내!”
그 웃는 얼굴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속내가 탈탈 털리는 기분이라 나는 빠르게 몸을 빼냈다.
그렇게 룰루랄라 식당으로 내려가던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이다.
***
“흐흥…….”
샐러드에 들어 있는 토마토를 집어 든 나는 속으로 흐흐 웃었다.
이때의 나는 내가 속으로만 웃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나는 밥을 먹다 말고 혼자 실실 쪼개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토마토를 보고 웃음이 나온 이유는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헤어질 무렵 발견했던 칼리온의 붉게 달아오른 귓가가 말이다.
‘나만 부끄러운 줄 알았는데.’
하도 능숙하게 끌어안고 말을 이어 가고 거기다 머리칼에 입맞춤까지 하길래 칼리온은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불긋한 귓가가 그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속삭여 주었다.
‘하여튼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나는 괜히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입 안으로 토마토를 쏙 밀어 넣었다.
오늘따라 토마토가 더 달게 느껴졌다.
“…….”
“…….”
나는 식사 내내 칼리온 생각을 하느라 혼자 샐샐 웃는 나를 보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흠흠, 에리타.”
아버지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부른 건 식사를 마치고 시원한 차를 홀짝이고 있을 때였다.
“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제야 나는 내가 또다시 혼자 실실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복도에서 마주친 하녀들도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표정 관리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하하……. 그냥 날이 좋아서 조금 들떴나 봐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술한 변명을 꺼내 들었다.
가장 손쉽게 댈 수 있는 변명이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아직은 칼리온과 연인이 되었노라 고백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보다 앰버 길드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나요?”
지금 어제의 이야기를 꺼낸 건 말을 돌리려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원래 물어보려고 했던 말이기도 했다.
어제 칼리온과 그런 일이 있기 이전에 제단에 다녀온 일이 먼저였다.
거기서 페른이 데리고 탈출한 인질들과 흑마법사 두 명은 앰버 길드에 맡긴 상태였다.
“인질로 잡혔던 이들은 라그라스가 조금 더 돌본 뒤에 본래 있던 곳을 찾아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유르젠이요?”
“그래. 케이든 앰브론이 라그라스 상단주에게 부탁한 것 같더구나.”
아직도 유르젠을 소개해 주지 못했지만 어쩌다 보니 서로 다 알게 되어 있었다.
특히 케이든은 유르젠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쓸데없는 편지를 자꾸 보낸다는 유르젠의 짜증을 들은 적이 있었다.
“흐음. 저도 조만간 상단에 한번 들러야겠네요.”
가서 유르젠 얼굴도 보고 돌보고 있다는 사람들도 한번 보고.
“그럼 앰버 길드는 그 흑마법사들을 맡은 건가 보네요?”
저번에 보니 확실히 정보 캐내는 솜씨는 뛰어난 것 같던데.
“그래. 아까 온 연락에서 이르길 뭔가 알아내는 데에는 오늘부터 사흘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구나. 잡아 온 두 놈 전부 금제가 걸려 있는 모양이야.”
“금제……. 하, 지독한 놈들 같으니.”
금제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둘에게 금제가 걸려 있는 거라면 어째서 앰버 길드에서 사흘이라는 기간을 불렀는지도 이해가 갔다.
금제.
말 그대로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어 놓았다는 뜻이었다.
보통 첩자나 암살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조치.
정확히는 그들을 부리는 윗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마련한 안전장치였다.
무언가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을 입 밖으로 내려고 마음먹은 순간 머리를 터뜨리거나 뇌를 녹여 버리는, 저주에 가까운 계약.
물론 앰버 길드는 유구한 대륙 역사상 최고의 정보 길드인 만큼 금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었다.
“금제가 걸려 있는데 사흘이면 엄청 빠른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앰버 길드의 능력은 믿을 만하니까.”
에일런이 내 말에 가볍게 긍정해 주었다.
“황궁에서 공표하는 건 이틀 뒤라고 하셨죠?”
“그래. 대대적으로 공표할 작정이다. 뒤로 빠져 있던 황제가 직접 말이다.”
정무에 관한 것들을 일체 두 황자에게 맡겼던 황제가 이 일에 관해서는 직접 공표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망할 황제. 큰 공적이 될 만한 사건은 꾸역꾸역 직접 맡겠다는 뜻이네.’
한 것도 없으면서 칼리온과 우리가 알아낸 사실을 홀랑 채 가 자신이 떠벌리겠다는 황제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나는 칼리온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던 그의 아픈 이야기를 잊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가 내보였던 연약한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내가 황제를 싫어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그 뒤로 우리는 공적인 일에 관한 이야기를 몇 분 정도 주고받았다.
‘……빨리 나가야겠다.’
그 생각이 든 건 내게 무언가 물어볼 게 있는 듯한 아버지와 에일런의 표정을 눈치챈 순간이었다.
다행히 나는 두 사람이 나를 부르는 것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소식 있으면 알려 주세요. 저는 연구실에 가 있을게요! 밀린 아티팩트를 만들어야 해서요. 하하.”
나는 타당한 변명을 주르륵 꺼낸 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애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관계를 알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칼리온과 상의하는 게 먼저였다.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아버지, 오라버니. 죄송해요…….’
나는 속으로 의미 없는 사과를 건네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
에리타가 재빠르게 몸을 빼낸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
평소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신이 나 조잘조잘 떠들던 에리타가 오늘은 입을 딱 다물고는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주 부자연스럽게.
아슬란은 에리타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에일런.”
“예.”
“너는 뭐 아는 것 있느냐.”
“……없습니다.”
아슬란의 물음에 에일런은 아주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도 모른단 말이냐?”
“제가 에리타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짐작 가는 건 있지만…….
에일런은 어젯밤 에리타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전했을 때 칼리온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생생히 기억했다.
다행히 이런 쪽으로는 둔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제 아버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루는 참을 줄 알았더니.’
에일런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조만간 칼리온과 대련을 한번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