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6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63화(163/218)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밝은 광장에는 사람이 북적거렸다.
가게들의 폐점 시간이 가까워지는 이 시간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이렇게 나오는 것도 오랜만인가?’
저번에 테인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넓디넓은 광장의 초입에서부터 부지런히 재촉한 발걸음은 금세 중앙 분수대에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평범한 갈색 머리를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 하나만큼 불쑥 솟은 그를 발견하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느릿느릿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하지만 그를 놀래려는 내 시도는 내가 그의 바로 뒤에 섰을 때 몸을 돌린 칼리온으로 인해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으며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칼리온은 진작부터 내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음……, 그대가 귀여운 장난을 계획한 순간부터?”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아버지나 에일런, 테인에게도 이런 식의 장난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하여튼 기사들은 놀리는 재미가 없어…….”
나는 불만스레 꿍얼거리며 칼리온이 내민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이전이었다면 에스코트 형식으로 격식을 갖추었을 접촉은 이제 단단히 깍지를 낀 연인의 스킨십이 되었다.
“이런. 데이트 초반부터 점수를 잃다니, 제 실책이군요. 이걸로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칼리온은 장난스레 자책하며 나와 맞잡지 않은 반대 손을 내 앞으로 쓱 내밀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건 하늘색 안개꽃이 연보라색 튤립들을 감싼, 너무 화려하지 않은 꽃다발이었다.
두 종류의 꽃과 푸른 이파리로 장식된 꽃다발은 단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당연한 말씀을요. 그대라면 무겁고 화려한 꽃다발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더군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보는 눈이 없어 그대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답지 않게 자신이 없는 칼리온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으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였기에 한 손으로도 충분히 들 수 있었다.
“감사해요. 저는 마음에 쏙 들어요.”
나는 그가 이런 예쁜 꽃다발이 아니라 민들레 한 송이를 가져다주었어도 기쁘게 받아 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 선물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보라색 튤립은 본 적 없는데 되게 예쁘네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정원에서 키우는 꽃입니다. 저도 발견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네요.”
선황비의 정원.
“……이렇게 저한테 주셔도 되는 거예요?”
칼리온이 선황비를 추억하며 지었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그대가 아니면 그 꽃들은 잠시 피었다 져 버릴 운명인걸요. 어머니께서도 그대에게 준 것을 잘했다 하실 겁니다.”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집에 가서 꽃병에 꽂아 둘 거예요.”
그리고 강한 보존 마법을 걸어 두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들지 않겠지.
“흐음, 그럼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요?”
나는 비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표정이 웃겼던 모양인지 칼리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저 그대가 이 꽃을 볼 때마다 저를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부탁 안 하셔도 맨날 생각날 거예요.”
그의 웃음에 괜스레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
“여기는…….”
꽤 시간이 흘렀기에 오는 길에서부터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으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몇 달 전의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 넓지 않은 길이 익숙했다.
“이쪽으로.”
칼리온은 그런 나를 푸른 거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언덕 같은 절벽의 끝으로 이끌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이파리도 없이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였는데.
봄을 지나 성큼 다가온 여름이 커다란 나무에 어여쁜 녹색 옷을 선물한 모양이었다.
곳곳에 푸른색이 수놓아져 있어서 그런지 내려다본 수도의 모습 역시 겨울보다 더 활기가 넘쳤다.
“……같이 가야 할 곳이라는 데가 여기였어요?”
“여름이 되면 함께 와 주시길 청했었으니까요.”
분명 흘리듯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여름에는 더 아름다우니 그때도 함께 오면 좋겠다고.
“저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칼리온은 흘러가듯이 한 말을 기억해 그 약속을 실행했는데, 나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일방적으로 청한 일이니 제가 기억하는 게 맞죠. 저는 그대가 이곳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칼리온은 낮게 웃으며 대신 내 변명을 했다.
“……잊지 않고 다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다시 함께 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칼리온의 다정한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가 이곳에서 고백했다면 그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을 텐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멋들어진 옷을 입은 칼리온이 지금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내밀며 마음을 고백하는 모습은 분명 소설 속의 한 장면 같을 테니까.
‘물론 칼리온이 마릴린이 맨날 보던 그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보다 더 멋지겠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긴 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봐도 칼리온은 완벽한 남자 주인공감이었다.
한 달 전까지는 나도 그가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자 절로 푸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간지럽게 웃습니까.”
“음, 전하께서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같다는 생각?”
“……예?”
내 장난에 칼리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자 유르젠이 짓궂다 평한 내 성격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서점에 가면 ‘레이디를 사랑한 호위 기사’나 ‘사나운 황자의 절절한 사랑법’ 같은 책들이 있거든요. 요즘 아주 인기가 많답니다.”
제목들을 들은 칼리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이군요.”
그 떨떠름한 중얼거림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나름 얌전한 제목인데.
음, 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를 전전했던 칼리온이니 수도의 유행을 모를 법도 하지.
‘저건 순수한 편이라고 말해 주면 놀라려나.’
빨간 딱지가 붙은 것 중에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제목들이 수두룩했다.
예를 들어 ‘절륜한’이나 ‘은밀한’ 같은 노골적인 단어들이 빠지지 않는 그런 제목들 말이다.
그 책들은 내용도 제목과 마찬가지로…… 음, 어쨌든 그랬다.
“뭐, 나름 재미있더라구요. 제 시녀 하나도 그런 소설을 워낙 좋아해서……. 그중에는 전하를 따서 만든 남자 주인공도 있답니다.”
그 말들을 꾹 삼킨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저를…… 말입니까?”
이미 떨떠름하던 칼리온의 얼굴에 미약한 충격이 더해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고 하면 내 성격이 나쁜 거려나.
“그럼요! 전하는 유명하시잖아요. 원래 이런 책들은 유명한 사람들을 소재로 쓰는 경우가 많거든요.”
칼리온의 표정은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은 이의 그것이었다.
‘……진짜 귀여운데.’
그를 모티브로 한 남자 주인공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마릴린이 가지고 있는 것들만 해도 적어도 다섯 손가락은 넘어가지 않을까.’
전쟁 영웅인 칼리온은 제국에서 유명 인사이니 말이다.
마릴린이 아가씨도 심심할 때 보시라며 준 책 중 하나도 누가 보아도 칼리온에게서 영감을 얻은 남자가 주인공이었다.
“제가 다 설렐 정도로 엄청 다정하고 엄청 멋있는 주인공이었어요. 전쟁터에서 피어오른 사랑이 주제였던가?”
물론 나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 중간에 읽다 말았지만, 괜히 짓궂은 장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칼리온이 어딘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제가 더 나을 겁니다.”
그러고는 불만스레 중얼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추측건대 내가 자신과 닮은 책 속의 남자 주인공에게 설렜다는 말에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분수대에서 놀라게 하려는 장난은 실패했지만 이번 장난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하하, 당연하죠. 농담이었어요. 끝까지 읽지도 않았다구요.”
“설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저를 모방해서 만들었다던 그 가짜에…….”
“거짓말이에요. 끝까지 안 읽었다니까요?”
“읽긴 읽으셨다는 뜻이로군요.”
“아니, 그건 맞지만…….”
초반부는 읽었던 게 사실이라 마지못해 긍정하자 칼리온은 조금 더 깊게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내가 그보다 더 작다는 사실을 잊은 게 분명했다.
당연하게도 그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너른 등을 토닥였지만.
그때 내 웃음이 멈출 말이 들렸다.
“그런 책들을 다 불태우라 명해야겠습니다. 다 금서로 지정해야겠어요.”
칼리온은 칭얼거리며 무서운 말을 했다.
순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음, 전하……? 원래 그런 건 알면서도 다 눈감아 주는 거잖아요.”
“눈감아 주는 것이지 원래는 중죄입니다. 감히 제국의 황자를 모방해 책을 썼으니 황족 모독죄에 해당하겠군요.”
그 말이 실행된다면 제국의 모든 로맨스 소설 애독자들이 나를 죽이려 들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군단의 맨 앞줄에는 마릴린이 있겠지.
결국 나는 약 십 분 동안 갖은 고백으로 그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 했다.
칼리온이 생각보다 질투가 심하고 생각보다 더 귀엽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데이트였다.
칼리온이 내 갖은 고백이 좋아 일부러 더 마음이 상한 척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