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7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71화(171/218)
‘역시 끝장을 볼 셈인가.’
칼리온은 가만히 자리에 서서 허공의 몇 군데를 스치듯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건 총 여섯 군데. 전부 암살자들이 몸을 숨긴 곳이었다.
‘여덟이라……. 소문이 무성한 특급조인가 보군.’
칼리온은 제 목덜미를 꿰뚫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춘 적들을 앞에 두고도 태연했다.
오늘은 그 상대의 이름값이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높았지만 이런 상황 자체는 익숙했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황후가 보낸 수많은 암살자들이 선물한 경험 덕이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칼리온은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독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지만 그는 뭐든지 확실한 것을 좋아했다.
“한꺼번에 오는 게 좋을 텐데.”
그는 방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암살자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쌔액-
돌아오는 답은 살벌하게 던져진 비수였다.
칼리온은 고개를 미세하게 틀어 날아오는 비수를 피했다.
퍽-!
목표를 잃은 비수가 단단한 바닥에 박혔다.
날렵한 모양의 작은 칼이 꽂힌 바닥 주변이 새하얗던 색을 잃고 거멓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온은 헛웃음이 담긴 숨을 내쉬었다.
‘독……. 미리 듣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준비하셨군.’
자그만 비수에 발린 건 단단한 대리석을 순식간에 부식시킬 정도로 강한 독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하는 암살자의 특성에 걸맞지 않게 공격이 과격했다.
흔적이 남든 남지 않든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어차피 불태울 예정이니 증거가 남아도 상관없다는 건가.’
칼리온은 목숨의 위협을 받는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운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도 쏟아지는 비수는 여전히 많았다.
‘하나라도 맞으면 그만이니 던져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강한 독이 발려 있으니 스치기만 해도 당장 운신에 지장이 생기리라.
대개 저렇게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독은 혼합 독일 확률이 높았다.
흔적이 남는 대신 그만큼 확실한 효과를 자랑하고, 어떤 독을 섞었느냐에 따라 해독약이 달라진다는 게 혼합 독의 장점이었다.
칼리온이 미리 복용한 해독약도 저 독에는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9할 이상이었다.
물론 칼리온은 그런 계획에 당해 줄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날아드는 비수 중 몇몇은 몸을 틀어 피했고, 몇몇은 손에 든 얇은 검으로 쳐 냈다.
모습을 드러낼 의향이 없다면…….
“……안 오면 내가 가야지.”
모습을 숨기고 있어도 상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아무래도 눈앞에 보이는 것만은 못했다.
팍-
목을 향해 날아오는 비수 하나의 흐름을 읽어 순식간에 독이 묻어 있지 않은 손잡이를 잡아챈 칼리온이 빠르게 땅을 박찼다.
이미 암살자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의 신형은 망설임 없이 목표한 곳에 도달했다.
한발 늦게 칼리온의 움직임을 알아챈 암살자가 손에 쥔 무기를 내지르려 했지만 이미 휘둘러진 칼리온의 손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이……, 컥!”
그가 잡아챘던 비수가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가 꽂혔다.
확실한 효과를 자랑하는 독이니만큼 복면인은 즉시 눈을 까뒤집고 명을 달리했다.
만약 칼리온이 저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조금은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지금은 아니었다.
애초에 암살자의 가장 큰 이점인 기습의 효과를 잃은 순간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들도 실력이 좋은 암살자였지만 칼리온은 전쟁 영웅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기사였으니까.
“이제 다섯 남았군.”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온 칼리온의 중얼거림이 곳곳에 숨은 암살자들의 귀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들으라고 한 소리였으니 당연했다.
칼리온은 그 한마디에서 멈추지 않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쥐 새끼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가 먼저 죽은 동료들의 뒤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그렇지 않나?”
빈정거리는 말에 말을 끝내는 물음표가 찍혔을 때였다.
탓-
저들끼리 무슨 신호라도 주고받은 건지 남은 다섯 명의 복면인이 동시에 땅으로 내려앉았다.
후퇴라는 판단을 내리면 곤란했을 텐데 다행히도 끝까지 검을 맞대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땅을 박차고 칼리온에게로 날아든 건 남은 다섯 중에서 제일 커다란 기를 가진 이였다.
***
“하아, 하아…….”
벽에 기대어 선 칼리온은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침실 곳곳에 널브러진 육체의 수는 총 여덟이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잠입한 암살자들의 수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묘하게 저돌적이다 했더니…….”
칼리온은 짜증스레 중얼거린 후 목구멍을 치고 나오는 액체를 뱉어 냈다.
그가 뱉어 낸 건 검붉은 피였다.
“스승님이 아시면 한 소리 듣겠군…….”
그의 오른쪽 팔이 독에 당한 건 다섯 중 둘을 더 죽이고 셋이 남았을 때였다.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세 명이 품에서 검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 들고 그 액체를 마신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이 마신 액체는 비수에 발려 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극독이었다.
평범한 극독이라면 마시는 순간 복용자의 장기를 태우고 목숨을 앗아 갔겠지만, 이 독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극독과 연금술이 합쳐진 결과였다.
‘온몸의 피부에까지 독이 흐르게 만드는 약이라…….’
흔하게 쓰이는 게 아니라 잊고 있었을 뿐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저 액체를 마시는 순간부터 오 분 동안, 복용한 사람의 온몸은 흉기가 된다.
손가락 하나하나, 머리털 한 올까지도 전부 극독에 물들어 닿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다.
그런 액체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들이켠 세 사람은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발악임을 증명하듯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었다.
결과는 지금 보이는 대로였지만.
다행히도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던 덕에 미세하다 싶을 정도로 살짝 스쳐 상태가 아주 심하지는 않았다.
“지독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보통이 아니네…….”
암살자들이야 늘 죽음을 각오하고 임무에 임한다고는 하지만 장기가 타들어 가는 고통까지 망설이지 않고 감내할 줄이야.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면서.
아니,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이미 죽은 자들의 생각을 알 방법은 없었다.
거친 숨을 어느 정도 정돈한 칼리온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얇은 이불을 찢어 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꺼낸 작은 포션을 오른팔에 들이부은 후 찢어 낸 천으로 환부를 꽉 졸라맸다.
최상급 포션으로도 낫지 않는 상처는 결국 자연적으로 치유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였다.
티딕- 틱-
침실 안으로 한정했다가 넓게 퍼뜨린 감각이 무언가 튀는 소리를 감지했다.
작은 불씨가 튀는 것과 흡사한 소리. 그건 칼리온이 기다리던 신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 칼리온을 위해 준비된 신호는 아니지만 그가 이용해 먹을 신호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지.
퍼엉-!
그 작은 불씨가 황자궁을 전부 집어삼킬 화마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
이 황자궁을 집어삼킨 화마는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불이야!”
“세상에, 이 황자 전하의 궁에 불이……!”
혼비백산한 사용인들이 빠르게 소식을 날랐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커다란 폭발음이 황궁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지만 사람들의 입으로도 화재 소식이 전해졌다.
“어쩜 좋아……!”
“황자 전하께서는 나오셨느냐?!”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나?”
“불길이 너무 거셉니다! 조금이라도 진화 작업을 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젠장! 마법사들은 언제 온단 말이냐!”
황궁의 경비를 책임지는 기사단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거대한 불길 앞에서 필요한 건 마법사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후, 드넓은 황궁에서 이 황자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상주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먼저 도착했다.
“1조는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2조와 3조는 바로 진화 작업을 시작한다!”
대략 서른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법을 운용했다.
새파란 물줄기가 불타는 궁을 향해 쏘아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마력을 쏟아부은 물줄기는 굵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들이 모를 뿐 인위적으로 발생한 불길은 마법사들의 진화 작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집을 불려 가며 그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평범한 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저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원이 더 필요해요!”
“궁정 마법사님과 제자분들께서 오고 계십니다! 마탑에서도 지원을 오고 있다고 하니 조금만 더 버티시면…….”
콰앙!
마법사의 난색에 희망적인 대답이 오가던 도중, 그 좋은 소식을 뭉개 버리는 굉음이 울렸다.
누가 들어도 인위적으로 일어난 것이 분명한 두 번째 폭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존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타들어 가던 궁이 순식간에 그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날 밤 황궁의 건물이 하나 줄었다.
그와 동시에 황제 독살 시도에 대한 소식과 그 범인이 이 황자라는 소식이 발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 소식 안에서 칼리온의 목숨을 앗아 가려던 목적의 화마는 어느새 칼리온이 스스로의 범행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도주하기 위해 지른 불이 되어 있었다.